“호주는 라이프스타일 수퍼파워.”

2016년 11월 멜버른에서 개최된 ‘다문화 비즈니스 시상식’에서 당시 호주 외교부 장관이던 줄리 비숍이 공표한 말이다. 비록 정치·경제·군사 분야에서는 열강이 아니라도 삶의 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랑이다. 똑같이 영국의 죄수 유형지로 시작해서 지금은 패권국가로 도약한 미국에 대한 묘한 비교의식이 담겨 있다. 양국은 서로 ‘사촌(Cousin)’으로 부를 정도로 긴밀한 사이지만 모든 부문에서 미국이 절대우위에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호주에 영국이 국가의 모체 역할을 한 ‘어머니’라면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준 ‘대형(Big Brother)’이다. 그렇게 대단한 미국도 라이프스타일만큼은 호주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호주가 은퇴 희망국가로 각광받는 이유도 ‘라이프스타일 수퍼파워’ 이미지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최근 한국의 푸르덴셜생명이 서울과 5대 광역시에 사는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은퇴 후 생활계획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60.4%가 은퇴 후 해외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고 답했는데 은퇴 후 가장 살고 싶은 나라 1위가 호주였다. 응답자의 16.8%가 호주를 꼽았다. 이어 캐나다(14.4%), 하와이·괌(11.8%), 뉴질랜드(8.8%), 스위스(8.4%) 순으로 선호했다. 무엇이 자타가 인정하는 라이프스타일 수퍼파워로 만드는 걸까?

흔히 쾌적하고 청정한 자연환경을 드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시드니, 멜버른, 브리스번, 퍼스, 아들레이드, 호바트같이 해안에 자리 잡은 주도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과 기후조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연안 지역을 벗어나 펼쳐지는 광활한 내륙에는 사바나와 사막기후도 나타나고 인도네시아와 가까운 다윈 지방은 아열대기후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 생활에 그리 우호적인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는 아니다. 결국 어떤 곳을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인간 환경이다.

호주의 라이프스타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두 가지 핵심 요소는 ‘건강한 개인’과 ‘안전한 사회’이다. 최강의 수퍼파워를 자랑하는 미국도 대놓고 부러워하는 호주의 특장점이다.

건강한 개인과 안전한 사회

미세먼지 같은 불가항력적 문제가 없는 자연환경과 함께, 누구나 무상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립의료보험인 ‘메디케어’가 호주를 건강한 개인들이 사는 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메디케어의 성공 덕분에 적어도 환자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진료를 받지 못하는 비인도적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통이나 감기 같은 사소한 증상으로 너무 자주 의사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급증하는 의료재정이 문제가 되곤 한다. 호주 정치권은 재정적자 해결을 위해 환자의 자부담 비율을 도입하려고 애를 썼지만 강력한 국민 저항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메디케어의 존재는 단순한 의료보험제도를 넘어 인간을 존엄하게 여기는 평등사회라는 호주의 상징이 된 듯하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금기로 취급된다.

‘안전한 나라’는 미국과 비교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호주의 강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총기사고 앞에 누구도 미국의 치안을 믿지는 못할 것이다. 호주는 미국과 달리 1996년 20명이 희생된 포트아서 총기 학살 사건을 계기로 효과적인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당시 총리였던 존 하워드는 거센 반발을 감수하고 무려 70만자루가 넘는 총기를 회수해서 폐기하는 등 정면 돌파를 감행했다. 그 결과 호주는 총기 대학살 같은 사건이 발생하기 어려운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은퇴지로서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하지만 정작 호주에서의 은퇴생활을 즐기기 위해 극복해야 할 관문이 만만치 않다.

첫째는 비자 문제이다. 호주는 오랫동안 55세 이상으로 일정 수입과 재산을 증빙하면 누구나 4년 은퇴비자를 통해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허용했었다. 2005년부터는 50만달러 이상 국공채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투자은퇴비자를 신설 운용해왔다. 주 20시간 노동허가가 주어져 은퇴는 물론 사업과 취업활동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2018년 5월부터 더 이상 신규 신청을 받지 않는다는 이민부의 발표로 이제는 사실상 폐지된 비자이다. 투자 여부를 떠나 순수하게 은퇴를 목적으로 받을 수 있는 호주 비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은퇴비자 폐지로 호주를 은퇴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녀의 반 이상이 영주권자이거나 시민권자인 경우로 제한된다.(자녀가 둘일 때 한 아이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라야 함) 이들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 자녀들의 초청을 받은 부모 자격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 65세 이상이면 좀 더 완화된 조건의 노부모 초청이민도 가능하다.

은퇴비자 사실상 폐지

두 번째는 역시 돈 문제이다. 부모 초청이민으로 어렵게 영주권이나 거주자격을 획득해도 은퇴자금이라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시드니는 최근 몇 년간의 부동산 광풍으로 평균 주택 가격이 100만호주달러(약 8억1000만원) 이상 치솟기도 할 만큼 생활비가 비싼 도시이다. 이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 시드니를 떠나 외곽에서 은퇴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교수로 정년퇴임 후 지난해 3월 호주로 은퇴한 김모(66)씨도 시드니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타그라(Tuggerah) 지역에 집을 사서 아내와 둘이 생활하고 있다. 왜 자녀들이 살고 있는 시드니에 집을 사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지체 없이 ‘너무 비싸서’라고 답했다. 타그라에서 방 4개짜리 집을 60만호주달러에 장만했으니 시드니에 비하면 거의 반값 수준이라는 것이다. 자녀들도 멀지 않고 은퇴한 교민들도 하나둘 전입하고 있어 아직까진 만족스러운 은퇴생활이라고 했다. 언어장벽과 문화적 고립감은 어쩔 수 없어도 새로운 환경에서 도전하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자평했다. 부인 이모(62)씨는 동화작가인데 호주에 와서 원주민 이야기 등을 소재로 더욱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호주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주의 선동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이민 정서 때문에 해외 은퇴자들을 향한 문호가 대폭 열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호주가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려면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이민자도 줄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두껍게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주거비는 물론 생활비의 급증으로 안락한 은퇴를 위한 비용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냉정하게 말해 호주에서의 은퇴생활이 주는 효용보다 그것을 이루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과도한 것 같다. 아무리 호주가 스스로를 ‘라이프스타일 수퍼파워’라고 자랑해봤자 은퇴를 꿈꾸는 한국인들에게는 ‘여우의 신포도’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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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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