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우버, 그랩 등 승차공유 서비스 기업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신화통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우버, 그랩 등 승차공유 서비스 기업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photo 뉴시스·신화통신

현대·기아차가 자동차 제조사가 아니라 승차공유 서비스 기업인 ‘그랩(Grab)’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건 흥미롭다. 지난해 11월 현대·기아차는 그랩에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가 1억7500만달러, 기아차가 7500만달러를 맡았다. 그런데 10개월 전인 1월에도 현대·기아차는 2500만달러(약 284억원)를 투자했었다. 불과 10개월 만에 10배 규모로 투자액을 늘린 것이다. 총 투자액만 2억7500만달러(약 3120억원)다. 단일 투자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올해부터는 그랩에 현대·기아차가 만든 전기차도 공급할 계획이다. 전기차 코나EV 200대를 그랩에 공급하면 그랩 소속 운전자들이 카셰어링에 활용할 예정이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그랩은 동남아 여행을 해본 사람에게는 익숙한 서비스다. 앱을 활용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차량을 호출할 수 있는 세계 3위 모빌리티 기업으로 최소한 동남아에서는 절대강자다. ‘동남아판 우버’나 마찬가지다.

현대차·도요타·소프트뱅크 모두 투자한 그랩

현대차는 왜 그랩에 투자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나오지만 일본 자동차 기업의 움직임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랩에 투자한 주요 기업 중에는 일본 기업, 특히 라이벌인 도요타자동차가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지난해 6월, 무려 10억달러를 그랩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전기차가 아닌 자율주행차를 그랩에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전 세계 주력시장 가운데 현대·기아차가 공략에 힘겨워하는 지역이 동남아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 성장잠재력도 높은 곳이라 도요타가 그랩에 투자하는 걸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 도요타는 왜 그랩에 투자했을까. 무엇보다 모빌리티 산업이 가진 가능성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도요타보다 한 해 앞선 2017년 3월, 소프트뱅크는 그랩에 이미 10억달러를 투자했다.

그랩에 투자했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회사의 대표는 지난해 10월 4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만나 악수를 나눴다.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사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이날 양사가 하나의 회사를 만들었다며 공동 기자회견에 나섰다. 사회자의 말대로 “일본 시가총액 1위(도요타자동차)와 2위의 만남”이었다. 그들이 만든 회사의 이름은 ‘모네테크놀러지(Monet Technologies)’. 두 회사가 공동출자하는 모빌리티 기업인데 2020년 중반부터 자율주행차로 운행하는 승차공유 서비스를 내놓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일본 내에서는 이 사업의 시작을 2015년으로 본다. 2015년 아키오 사장이 손 회장을 찾아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관해 의논했고 한 살 차인 둘이 의기투합했다는 얘기가 일본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키오 사장은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문을 열 때마다 그 앞에는 손 회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모빌리티 산업에 접근할 때마다 한발 앞서 손 회장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모빌리티는 손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분야다. 기자회견에서도 손 회장은 “승차공유 서비스를 ‘배차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승차공유 서비스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이동성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보통 글로벌 기준 승차공유 서비스 빅5는 중국의 디디추싱(Didi Chuxing), 인도의 오라(Ora), 미국의 우버(Uber)와 리프트(Lyft), 그리고 싱가포르의 그랩(Grab)을 꼽는다. 흥미로운 점은 빅5 중에서 리프트를 제외한 4곳에 손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량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사진까지 파견해 경영에 참여하기도 한다. 원래 벤처캐피털은 동일한 시장을 두고 경쟁하는 기업에 교차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손 회장은 이런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한 지역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 기업 모두 소프트뱅크의 자금을 받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소프트뱅크가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데 뛰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버가 그랬다. 우버 이사회는 2017년 11월 소프트뱅크가 제시한 100억달러의 투자를 받기로 결정했다. 소프트뱅크는 80억달러로 우버 지분 15%를 보유하고 나머지는 직접 투자를 실시했다. 우버가 투자를 받아들인 건 자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소프트뱅크 1000억달러 비전펀드’(소프트뱅크가 신기술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만든 1000억달러 규모의 펀드)의 운영을 담당하는 라지브 미스라는 “우버 이사회와 주주를 개인적으로 설득하는 데 6개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우버가 그의 설득에 동의한 이유 중 하나는 부메랑 효과 때문이었다. 이미 경쟁사들에 투자하고 있는 소프트뱅크이기에 만약 투자 제안을 거절할 경우 그 거대한 자금이 경쟁사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작동했다.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대표적 사례다.

“손 회장이 먼저 나서서 데이터 중요성 강조했다”

매년 3억5000만명이 사용하는 서비스로 성장한 맵박스(Mapbox)는 구글과 위치정보 서비스를 두고 다투는 스타트업이다. 완성된 데이터를 갖춘 구글지도와 달리 재가공이 가능한 지도 서비스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수익성 문제 해결이 관건인 기업이다. 그래서 집중하는 분야 중 하나가 자율주행차 서비스에 적합한 지도 서비스였다. 그런데 맵박스의 창업자 에릭 군더슨 CEO 역시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2017년 7월 손 회장을 만났다.

군더슨은 손 회장을 만나면 맵박스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따로 프레젠테이션이 필요 없었다. 오히려 손 회장이 자신의 웅대한 구상을 설명하고 나섰다. 앞으로 로봇에 의해 노동시장이 변하는 특이점이 도래하면 인공지능이 수송·교통·음식·노동·의료·금융 등의 분야에서 격변을 일으킬 것이고, 그런 격변을 책임지는 기업의 일부를 보유하는 게 자신이 조성한 ‘비전펀드’가 해야 할 미션이라는 얘기였다.

군더슨은 “기계나 로봇이 지탱하는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손 회장이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비전펀드는 맵박스에 1억6400만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비전펀드 측은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기술에는 위치 데이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밝혔다.

손 회장이 승차공유 서비스에 접근하는 법도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스 퉁 GGV캐피털 매니저는 “손정의 회장은 세계 차량공유 서비스의 패권을 쥐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라이벌 기업에 일제히 투자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페이 마 홍콩 중문대 MBA 교수는 “소프트뱅크의 전략은 그 지역에서 최고의 승차공유 서비스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프트뱅크의 투자가 시작된 뒤 승차공유 서비스 시장에서 지역 재편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다. 우버와 그랩은 2013년 이후 동남아 각국에서 고객을 서로 뺏으며 혈전을 벌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집중적으로 서비스를 구축하고 할인 캠페인 등을 전개해온 그랩이 우버에 한발 앞서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3월 우버는 동남아 사업을 그랩에 양도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그랩 지분 27%를 취득해 다라 코스로샤히 우버 CEO가 그랩 이사진에 합류하기로 했다.

동남아 시장에서 출혈 경쟁을 펼치던 우버와 그랩. 2018년 우버가 사업권을 그랩에 양도하면서 시장이 재편됐다. ⓒphoto 뉴시스·AP
동남아 시장에서 출혈 경쟁을 펼치던 우버와 그랩. 2018년 우버가 사업권을 그랩에 양도하면서 시장이 재편됐다. ⓒphoto 뉴시스·AP

소프트뱅크 투자 후 시장 재편

양쪽 모두 대주주인 소프트뱅크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사업 재조정과 같은 모습이다. 로이터통신은 “밍 마 그랩 사장도 이번 사업 재편에서 소프트뱅크가 참여했던 점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버는 동남아에서 철수하며 원래 강점이 있는 미국과 유럽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동남아 시장에는 이제 그랩과 고젝(Go-jek)만 남았다. 고젝은 구글이 투자한 승차공유 서비스여서 일종의 진영 싸움이 된 셈이다. 만약 그랩이 고젝마저 꺾으면 동남아 시장은 사실상 독점할 수 있게 된다.

동남아 재편 이전에도 이런 식의 교통정리는 이뤄지고 있었다. 2016년 디디추싱은 우버의 중국법인을 인수하면서 10억달러를 투자했다. 디디추싱은 지난해 1월 라틴아메리카에서 우버와 경합하던 브라질 최대 승차공유 서비스인 ‘99’를 인수했다. 디디추싱의 첫 해외 진출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사업양도나 기업인수에 등장하는 우버, 디디추싱, 그랩, 그리고 99까지도 모두 소프트뱅크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고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중국, 동남아에 이어 남미에서도 시장이 정리되면서 이들 ‘소프트뱅크 연합’은 라이벌 기업과의 출혈을 피하며 자신들만의 시장에 깊이 파고드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손 회장이 그리는 미래는 뭘까. 시마 사토시 전 소프트뱅크 회장 비서실장은 손 회장이 스마트폰과 유사한 길을 자동차에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대박을 치고 있는 건 단말기 제조사가 아니라 구글과 애플처럼 플랫폼을 통제하는 회사다. 손 회장은 자동차 업계도 유사하게 갈 것이라 보고 그 플랫폼이 될 승차공유 분야의 지배를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 미래에 대한 손 회장의 준비는 꽤 치밀하다. 손 회장이 밝힌 일화다. “삼성의 오너일가와 이야기를 해보니 지금 삼성 반도체의 최대 고객은 30% 정도를 차지하는 스마트폰이고 자동차는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면 모빌리티, 즉 자동차가 반도체의 최대 고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네테크놀러지의 바람대로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돌게 되면 거기에는 수많은 반도체 칩이 필요하다. 여기서 2016년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영국의 반도체 기업 ‘암(arm)홀딩스’가 빛을 발한다. 암(arm)은 사람의 두뇌를 닮은 칩을 개발하는 곳으로 초연결사회에서 더욱 중요하게 취급받는 곳이다. “234억파운드의 인수 가격이 너무 비싸다” “통신사가 왜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냐”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결국 손정의 회장이 생각하는 퍼즐에서 중요한 한 조각이었던 셈이다.

김회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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