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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9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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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세상 읽기]노벨상의 계절, 자취 감춰버린 한국의 과학기술

이덕환  서강대 명예 교수 duckhwan@sogang.ac.kr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월 17일 울산 남구 울산시청에서 열린 전국경제투어 ‘수소경제와 미래에너지, 울산에서 시작됩니다’ 수소경제 전략보고회에 앞서 수소경제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문 대통령 왼쪽은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photo 뉴시스
일본이 올해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제 일본은 스위스를 제치고 24명의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5대 노벨상 강국이다. 그런데 우리 과학기술은 절망적이다. 망국적인 탈원전으로 뒤죽박죽돼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국정(國政)에서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일본의 소재 수출 금지와 ‘조국 사태’의 혼란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과기부는 운전면허증을 휴대전화에 넣어보는 궁리나 하고 있다.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 업무를 기재부에 빼앗겨버렸고, 원자력진흥법에 명시된 원자력진흥 업무도 소멸시켜버렸다. 기초과학연구원도 행정감사로 망쳐버렸다. 그야말로 지리멸렬이다.
   
   리튬이온 배터리(LIB)의 상용화로 올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요시노 아키라(吉野彰)는 아사히카세이(旭化成)라는 중소 종합소재기업에 취업한 평범한 기술자였다. 그 흔한 박사학위도 없었다. 교토대학에서 공학사(1970)와 공학석사(1972)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일본의 기업에서 근무하던 기술자의 노벨상 수상은 요시노만이 아니다. 197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에사키 레오나(江崎玲於奈), 2002년 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 2014년 물리학상을 받은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등 ‘샐러리맨 노벨상’ 신화가 이어지고 있다.
   
   노벨상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일본의 기초연구 저력은 놀라운 것이다. 일본은 단순히 기초과학의 진흥을 위해 열심히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과 출연연이 기초연구를 선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부가 화려한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연구개발의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억지 협력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또 선택과 집중을 외치면서 대규모 예산 지원을 몰아주는 것도 아니다.
   
   중견 규모의 민간 기업도 온전하게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미래를 위한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과학기술이다.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진지하게 학문하는 자세와 환경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노벨상 이상으로 성공했다
   
   우리의 경험은 일본과 전혀 달랐다. 모든 일을 정부 주도로 추진해왔다. 과학기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예산과 제도적 지원을 집중했다. 현대 기술의 후발 주자인 우리에게는 절대 나쁜 방법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정책으로 세계가 놀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원자력·정유·화학·중공업·자동차·반도체·조선 산업이 모두 그렇게 성장시킨 것이다. 반세기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추게 된 것은 그런 전략과 노력의 결과다. 우리가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술을 지혜롭게 ‘선택’해서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발전시켰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우리의 그런 노력을 ‘추격형’이었다고 폄하하고 후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했고, 최선의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기초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주는 ‘노벨상’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실제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열심히 달리기를 해놓고, 왜 높이뛰기는 하지 않았느냐는 푸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성과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정부 주도의 낡은 패러다임 여전
   
   일본의 느닷없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금지조치에 화들짝 놀란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고 화려했다. 경제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공급망 안정성 확보, 가치사슬 구축, 재정지원을 주축으로 하는 추진 전략도 내놓았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2조원 이상의 재정을 투입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강화 특별조치법’도 제정하고, 중소기업 자금 조달을 위한 ‘펀드’도 조성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부 주도의 선택과 집중 정책이다. 민간은 정부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가면 소부장 경쟁력이 강화된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 같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정부 주도의 정책이다. 하지만 이는 정부가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이상 반세기 전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독일·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5위의 소재·부품 강국이다. 작년에는 소재·부품 분야에서만 1390억원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1970년대 후반 정밀화학산업에서 출발해서 40여년 동안 애써 이룩한 성과다. 2001년에는 소재·부품 전문기업 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5조 4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세상이 달라지면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물론 아직도 개발해야 할 소재·부품·장비가 널려 있다. 그런데 대부분이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은 품목들이다. 수요가 충분히 많은 범용(汎用) 소재와 달리 애써 개발하더라도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다는 뜻이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초고순도 불화수소, EUV용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가 모두 그렇다. 우리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는 꼭 필요하지만, 전 세계 수요가 일본의 중견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 불과하다. 정부가 앞장서서 국산화에 성공하더라도 기업의 생존에 필요한 충분한 시장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과연 일본 중소기업의 품목을 개발하기 위해 정부가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정부 주도의 낡은 패러다임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새로운 과학기술 정책이 필요하다. 현대 기술을 포기한 사회는 퇴화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정부 주도의 과학기술 개발이 아니라 민간이 스스로의 독립적인 영역을 개척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민간의 역량을 신뢰하고, 간섭을 최소화하는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정부가 과학기술을 끌고 가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정부가 허겁지겁 마련한 소부장 경쟁력 강화 정책은 아무도 성과를 보장할 수 없는 ‘묻지마식’ 투자에 가까운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칫 쏟아지는 연구비에 관심을 보였다가 무한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10년 만에 원전 능력 상실한 영국의 교훈
   
   새로운 기술의 개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애써 개발한 기술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함부로 포기할 수 없다. 영국 칼더홀에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이 세워진 2년 후인 1958년부터 지난 60년 동안의 노력으로 한국의 원전 기술은 오늘날 EU와 미국의 인증까지 받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원전기술은 절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원전이 ‘위험’해서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 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추지 못한 선무당의 황당한 궤변이다. 음주운전으로 대형 인명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자동차의 운행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위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기술을 포기해야 한다면 77억의 인구가 70세를 넘게 살고 있는 현대의 인류 문명을 통째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자연 속에서 짐승과 똑같은 수렵채취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현대의 모든 기술은 ‘편익’과 ‘위험’을 함께 가지고 있다. 편익을 극대화시키고, 위험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현대 기술의 핵심이다. 기술의 ‘위험성’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기술이라도 함부로 사용하면 위험해지는 법이고, 반대로 아무리 위험하다는 기술도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관리하면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탈원전 정책은 서둘러 폐기해야 한다. 탈원전으로 무너지는 것은 25기의 원전만이 아니다. 지난 60년 동안 애써 일궈놓은 ‘원전산업’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 상업용 원전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이 자신들의 땅에 원전을 지을 능력까지 상실해버렸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원전은 물론이고 핵폭탄 기술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영국이 원전을 설계·시공·운영할 능력을 상실하는 데는 10년 남짓이 걸렸을 뿐이다. 우리의 사정도 다를 수 없다. 원전 해체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정책은 자동차 산업은 포기하고, 폐차 산업을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농담’이다.
   
   맹목적인 탈원전의 부작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3기의 안전 가동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원전의 안전 가동을 관리해야 할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비전문가로 가득 채워진 현실부터 매우 위험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래가 불확실해진 원전 현장의 전문인력 이탈도 심각하다. 한빛원전 1호기의 사고가 운전에 전문성을 확인할 수 없는 비전문가의 조작 실수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원전 부품의 조달도 심각하게 어려워질 것이다.
   
   탈원전이 신재생 기술의 개발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국이 중국산 태양광 패널로 도배가 되고 있고, 어설프게 설치한 전기저장장치(ESS)에서 폭발·화재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신재생 산업계의 이해상충과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
   
   과학기술 정책의 낡은 패러다임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조국 사태로 드러난 과학기술계의 도덕적 해이도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실과 연구논문이 자녀들의 스펙 쌓기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것이다. 그동안 계속 지적되어왔던 연구윤리 위반, 연구비 유용, 비윤리적 연구실 운영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문제다.
   
   
   과학기술은 ‘적폐’가 아니다
   
   정부가 강요하고 있는 산학협력에 따른 이해상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 정비도 필요하다. 특히 기술과 특허의 상업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연구개발로 얻어진 특허의 수익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의 창의적 노력에 대한 보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특허의 수익을 어떤 비율과 형식으로 나눌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특허의 현재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거친 기업 현장에 아무 보호 장치도 없이 과학자들을 내몰아서는 안 된다. 산학협력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주기 위한 확실한 제도가 필요하다.
   
   정부의 제도적 관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도 많다. 과학기술계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없이 외고생의 병리학 논문을 철회시켜버린 대한병리학회를 모범 사례로 삼아야 한다. 실험을 도와주었고, 영어 논문 작성에 기여했다는 옹색한 변명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학술논문을 발간하고, 학술회의를 주최하는 ‘학회’의 운영도 자발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정부 지원금과 민간 기업의 후원금을 받기 위한 학회는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비영리 학술단체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소수 운영진의 방만하고 비민주적인 운영도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가 인식을 바꿔야 한다. 과학기술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적극적인 비호 속에서 안주해왔던 적폐라는 비뚤어진 인식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극도로 제한된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과학기술계의 성과를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행태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확인할 수도 없는 ‘의혹’만으로 임기가 보장된 출연연의 기관장을 해임시키고, 총장급의 원로 과학자를 국제적으로 망신 주는 황당한 일은 절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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