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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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나 물리학자 중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수식을 만든 사람이 있다. 피타고라스(피타고라스 정리), 오일러(오일러 항등식), 뉴턴(제2법칙·만유인력법칙), 아인슈타인(장방정식), 슈뢰딩거(파동방정식)…. 지난 7월 13일 만난 중앙대 성재영 교수(화학과)는 “우리가 만든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수식”이라며 ‘화학요동법칙(Chemical Fluctuation Principle)’이라는 걸 컴퓨터 화면에 띄워 보여줬다. 그는 “세포의 생명활동은 유전자 정보로부터 필요에 따라 특정 생체고분자(mRNA와 단백질)를 만들고 소멸시키는 화학반응을 통해 일어난다. 화학요동법칙은 세포 내에서 생성-소멸되는 생체고분자들의 농도 평균과 요동 실험 결과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최초의 수식이다”라고 말했다.

성 교수는 주로 이론화학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사용한다. 그 도구로 연구하는 대상은 세포의 유전자 발현과 세포 신호전달이다. 성 교수는 “현대 화학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생명현상의 신비를 화학반응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화학요동법칙’을 만들다

성 교수에 따르면, 단백질은 세포 내 복잡한 반응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세포는 이러한 반응 네트워크를 통해 무질서한 개별 화학반응들을 제어하여 생명현상을 구현해낸다. 특히 단일분자 분광학의 아주 최근의 발전 덕분에, 살아있는 세포반응 네트워크를 세포별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히 생명현상의 근간인 유전자 발현으로 생성되는 mRNA와 단백질의 양도 각 세포별로 측정할 수 있다.

성 교수가 만든 화학요동법칙은 세포의 유전자 발현량 조절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다. 즉 단백질 농도의 평균뿐 아니라 세포 간 발현량 변화의 크기 혹은 분산을 설명한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주로 ‘평균’에만 집중해 왔고 세포 내 화학적 요동의 분산을 기술할 수 있는 정확한 이론이 없었다. 우리 연구단이 얻어낸 화학요동법칙은 세포 내 생체고분자의 농도 평균과 요동을 정확히 설명한다.”

그는 화학요동법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분방정식에 기초하지 않은 새로운 반응속도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화학과 물리학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된다. 세포 내 화학반응을 확률적으로 기술하는 데 오랫동안 쓰여왔던 게 볼프강 파울리(1945년 노벨물리학상)의 마스터방정식이다. 이게 미분방정식이다. 그런데 미분방정식에 기초한 방법들로 세포 내 환경에 따라 반응속도가 요동치는 생고분자 화학반응을 정확하게 기술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세포화학동역학 분야의 개척자

미분방정식이 아니면 뭘까? 그는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면서 세포 내 특정 시점에 생성되고 또 다른 특정 시점에 소멸되는 단일 생체고분자의 개수를 두 계산함수(Heaviside step function)의 곱으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큰 가정 없이 화학요동법칙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을 설명해줬다. 구체적 수학적 유도 과정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개념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 교수가 화학요동법칙의 간단한 버전을 발표한 건 2015년이다. 미국 물리화학 학술지 ‘피지컬 리뷰 X(Physical Review X)’에 발표했다. “이 버전은 미분방정식에 기초한 것으로 생체고분자의 생존시간이 간단한 지수함수를 따라 분포하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세포 내 생체고분자들은 소멸 과정이 복잡해 생존시간이 간단한 지수함수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미분방정식에 기초한 이론으로는 생체고분자 농도를 정확히 기술하기가 어렵다. 미분방정식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서야 이 문제를 극복한 일반적인 화학요동법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2018년에 논문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화학요동법칙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실렸다. 논문에 붙은 보조자료만도 책 두께 분량이었다. 논문 본문은 세포 내 화학반응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새로운 반응속도 모델과 이 모델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수학적 방법론, 그리고 이 이론을 사용해 기존에 설명되지 않던 다양한 세포 유전자 발현 실험 결과를 정량적으로 설명하고 새로운 실험 결과를 예측하는 내용까지 담았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세포화학동역학 분야는 융합과학이다. 세포의 유전자 발현을 연구한 것이니 생물학이고, 유전자 발현을 구성하는 실체가 생체고분자 반응이니 이를 묘사하는 화학적 모델을 도입하는 화학이기도 하다. 이 화학적 모델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 새롭게 도입된 수학적 방법론과 이론들은 물리학 분야의 비평형 통계역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이 논문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심사하기가 쉽지 않아 심사과정에서 논문 심사자들을 이해시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학제 간 학술지 에디터들은 수식이 많이 등장하는 논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 대중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평어로 쓴 논문을 선호한다. 수식이 많이 등장하는 연구 성과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학제 간 학술지에 발표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성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87학번. 수식을 만들기 시작한 건 서울대 화학과 대학원과정 때, 학위 지도교수인 이상엽 교수 그룹에서 공부하면서부터다.

1999년 어느 날 성재영 박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6개월간 연구 끝에 얻어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엽 교수 그룹에서 박사과정 동안 연구한 ‘액체상 가역 결합 반응의 농도 이완 동력학’ 문제의 새로운 해결방법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 결과를 기존 이론 및 정확한 전산모사 결과와 비교해서 4일 후 이스라엘 와이즈만과학대학(Weizmann Institute of Science)에서 열리는 학회에 발표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화면에 새롭게 얻어진 이론으로 예측되는 ‘농도이완곡선(relaxation curve)’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용했던 그래픽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있어 이따금씩 선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컴퓨터를 껐다 다시 켜면 선이 보였다. 그런데 그날은 컴퓨터를 몇 번 껐다 켜도 선이 보이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순간 다시 화면을 보니, 곡선이 보였다. 숨어 있었다. 이론 결과가 시뮬레이션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해 얼핏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와이즈만과학대학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과학 분야 고등교육기관이다. 이 학교의 한 화학자가 당시 ‘배틀’을 제안해놓은 상황이었다. 이슈는 화학 ‘액체상 가역 결합 반응의 이완곡선’을 어떤 이론이 가장 잘 설명하는가였다. 당시 이 학회에 저명 이론화학자와 비평형 통계물리학자가 100여명가량 참석한 걸로 그는 기억했다.

화학요동법칙의 간단한 버전. 2015년에 만들었다.
화학요동법칙의 간단한 버전. 2015년에 만들었다.

이스라엘에서의 ‘배틀’

성 교수에 따르면, 화학반응은 근본적으로 가역반응이다. 화학반응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방향으로 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면 반대방향으로도 진행된다. 그러나 마리안 스몰루코프스키(폴란드 물리학자·1872~1917)가 시작한 액체상 화학반응 속도이론은 반응이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비가역반응만을 기술했다. 당시 성 교수는 이 이론을 가역반응에 적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고 있었다. “액체상 화학반응 분자의 농도가 시간에 따라 평형상태 농도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구다. 10여년간 풀리지 않던 문제였다. 이 문제는 소위 ‘다체(many-body) 문제’로 정확한 답이 없다. 나는 이 문제를 풀었고, 지도교수인 이상엽 선생님과 함께했던 일 중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연구결과는 ‘다체 커널(Many-Body Kernel) 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존하는 이론 중 액체상 가역반응이 일어나는 분자들의 농도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꾸준히 인용되고 있다. 물론 이상엽 교수와 성재영 박사는 당시 와이즈만과학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 완승을 거뒀다.

성 교수는 이날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번 은사 이야기를 했다. 성 교수는 “선생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액체상 확산지배 반응속도이론을 전 세계적으로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하신 분”이라며 자신의 은사가 1970년대 서울대 화학과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고 자랑했다. 이상엽 교수는 2013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마틴 카플러스 교수(미국 하버드대학)로부터 하버드대학에서 배웠다. 카플러스는 계산화학자였지만, 이상엽 교수는 그의 연구실에서 계산화학뿐 아니라 해석적 이론화학연구도 공부했다. 성 교수는 “이 교수님이 계산화학보다는 해석이론화학이 더 재밌다고 생각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리화학의 미래 발전에 해석이론화학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석적 이론화학은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다양한 화학 문제와 화학 접경 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굉장히 강력한 도구이다”라고 강조했다.

계산화학과 해석이론화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성 교수에 따르면 두 분야는 이론화학의 기둥이다. 계산화학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화학을 한다. 실험실에서 합성을 하지 않고 컴퓨터로 합성을 한다. 반면 해석이론화학은 컴퓨터가 아니라 수식을 연역적으로 얻어내 이론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성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고려대학교 조민행 교수 그룹에서 일하며 병역을 마쳤다. 조민행 교수는 액체상 비선형 분광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다. 성 박사는 2000년부터 미국 MIT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다. 이게 물리화학자인 그가 생물학 쪽으로 연구를 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MIT의 지도교수는 로버트 실비(Robet Silbey). 본래 고체분광학 이론 전문가였지만 성 박사는 실비 교수와 함께 이곳에서 당시 각광받기 시작했던 단일분자 분광학 연구를 주로 했다. 인근 하버드대학 한 실험가의 실험 결과에 주목하고, 그걸 정확히 해석하려는 게 ‘단일효소 반응속도론’ 연구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 하버드대학의 중국계 교수 이름을 얘기했으나, 기사에 언급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하버드대학 실험화학자의 실험은 옳았으나 해석이 잘못됐다는 걸 알아냈다고 했다. 이걸 기화로 시작한 ‘단일효소 반응속도론’ 연구는 2011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그 연구는 ‘세포화학동역학’에 뛰어들게 된 씨앗이 되었다.

화학요동법칙의 완전한 버전. 2018년에 나왔다.
화학요동법칙의 완전한 버전. 2018년에 나왔다.

세포 의사결정에 불확실성이 개입

성 교수의 연구 성과는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적지 않은 학술지 에디터들은 그의 연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컴퓨터에는 논문 투고의 히스토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학계의 인정을 받아 학술지를 통해 연구 성과를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2015년 12월에는 한국연구재단의 리더연구자(창의적 연구) 지원사업을 중앙대학교 최초로 수주했다. 그래서 세포화학동력학 창의연구단을 설립하고 ‘세포화학동력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새로 만들었다. 9년간 이어지는 프로젝트다.

그는 “궁극적인 연구 목표는 생명체 내 무질서한 화학반응들로부터 질서가 구현되는 방식을 화학반응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이 지식을 응용해 의약학 분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포는 외부환경에 따라 자신을 조절한다. 이 조절은 다른 게 아니라 세포 내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생체고분자 화학반응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때 비록 유전자가 같은 세포라 할지라도 단백질 개수가 다르다. 이에 따라 세포는 다른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은 세포의 의사결정도 화학반응 과정을 거쳐 일어나고 화학반응 과정 자체가 불확실한 확률 과정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세포 의사결정에 유전정보로 완벽히 조절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유전자 발현량의 조절능력을 설명한 화학요동법칙을 알아낸 건 이제 시작이다. 생명현상을 만드는 화학반응은 이런 수많은 유전자 발현 과정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얽혀 있다. 아주 많은 화학반응이 외부 신호에 따라 교차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신호전달 과정과 유전자 발현 과정이 엮인 복잡한 네트워크로 우리 생명체가 돌아간다. 그런 큰 규모의 네트워크(Large Scale Network)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이론화학자였지만 최근 실험연구도 시작하였다. 같은 과에 합류한 나노광학 분야 전문가인 윤상운 교수, 단일 생체고분자 분광학 실험 전문가인 고혜련 교수와 협력, 연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순수이론연구나 타 그룹의 실험 결과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지만 경쟁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실험 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성 교수의 세포화학동력학 창의연구단에는 또 젊은 이론화학자인 김지현 조교수가 있고, 생화학 분야 실험전문가인 김진한 연구교수도 있다. 김진한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87학번으로 성 교수와 학과 동기다. 미국 스크립스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바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뛰어난 이론가와 실험가라고 했다.

그는 이제 막 시작된 세포화학동력학이 크게 발전할 거라고 했다. 그는 “세포화학동력학 연구를 통해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화학반응의 근본적 확률적 성질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다”고 말했다. 새로운 분야를 일궈내며 생명현상의 신비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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