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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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양해식 교수(화학과)를 예정보다 30분 일찍 찾아갔다. 지난 9월 17일 부산대 화학관 내 연구실 문을 두드렸더니 그는 연구실에서 내게 설명할 때 쓰려고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의 슬라이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부산 영도의 흰여울마을 앞바다를 떠올렸다. 양 교수를 만나러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 김에 지인이 가보라고 한 바닷가 예술마을에 부리나케 들렀던 것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배들, 그리고 서점 한 곳, 고양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양 교수가 작업을 멈추고 슬라이드를 TV 모니터에 띄웠다. 그걸 한 장씩 넘기며 자신의 연구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양해식 교수는 카이스트 88학번이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대학에 들어간 건 아니었다. 동기생이 522명이었는데, 수학을 잘하는 등 특출한 동기생이 많았다. 그 속에서 내가 뭘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2학년 올라갈 때 화학을 선택했다.”

전기화학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

그는 이후 방학 때마다 교수들의 실험실에 들어갔다. 2학년 여름방학 때는 생화학실험실(이영훈 교수), 3~4학년 방학 때는 유기화학실험실(강성호 교수)에 들어갔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학부 2학년이 교수 실험실에 들어가는 건 너무 이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스트는 1971년 대학원 과정만을 둔 교육기관으로 문을 열었고, 학부 학생은 1986년부터 뽑기 시작했다. 양 교수가 카이스트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4학년이 없었다. 당시 카이스트 교수들은 데리고 같이 연구할 학생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카이스트 3~4학년 때만 해도 유기화학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잘 맞지 않았다. “유기화학은 매일매일 결과가 나온다. 합성을 해가는데 하루에 한 단계씩 결과가 나온다. 유기화학자는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그게 힘들었다. 나는 어떤 때는 밤늦게까지 연구하고, 아침에 늦게까지 퍼져 자는 스타일이다. 약간은 불규칙적인 생활을 즐긴다. 그래서 유기화학이 아니라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심했다. 그 결과, 전기화학을 하게 됐다.”

그는 공학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대학 학부 때 공대 과목을 몇 개 들었다. 양 교수가 보여주는 슬라이드에는 그가 대학 4년간 들은 과목이 적혀 있다. 1학년 ‘포트란’, 2학년 ‘응용수학 1·2’, 3학년 ‘디지털시스템’ ‘기초공학실습’(기계가공), 4학년 ‘재료과학개론’ ‘전자공학개론’ ‘C언어’(독학). 그는 이런 공학 공부를 화학과 결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고, 그런 생각은 그를 전기화학자로 이끌었다.

그의 카이스트 석사와 박사 과정 논문에는 ‘임피던스’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다. 양 교수는 “임피던스는 전자공학에서 쓰는 용어이고, 화학에서는 익숙하지 않다. 나는 그전에 학부에서 공학 과목을 공부한 경험이 있기에 석사에서도 박사 때도 임피던스를 이용한 연구를 했다”라고 말했다. 임피던스는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양 교수는 “직류 전압을 회로에 가했을 때 전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가 저항으로 표시되고, 교류 전압을 가했을 때 전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는 임피던스로 나타낸다”라고 설명했다. 저항은 하나의 값으로 표시되고, 임피던스는 두 개의 값(크기와 위상각)으로 표시된다고 했다. 그는 “임피던스를 측정하기 위해, 석사와 박사 때 남들이 할 수 없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석사 때는 극미세 전극이 고체 표면에 접근할 때 임피던스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험으로 최초로 보였다. 극미세 전극에 교류 전압을 걸어주고, 교류 전류를 측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카이스트 은사는 전기화학자인 곽주현 명예교수다. 곽 교수는 미국 유학(오스틴-텍사스대학) 시절 전기화학적 주사현미경(SECM·Scanning Electrochemical Microscope)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SECM은 주사탐침현미경과 비슷한데 전기화학적으로 하는 것이다. 양 교수는 “곽 교수님이 내게 SECM에 임피던스 측정을 접목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교수님이 만든 전기화학적 주사현미경은 3차원으로 움직인다. 그와 달리 내가 석사 때 만든 건 아래위로 1차원으로만 움직이면서 전기화학 임피던스를 측정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장치의 미세한 움직임을 얻기 위해 정밀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장치와 임피던스를 측정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양 교수가 수십 년 전 사진을 보여준다. 대전에서 공부하던 그가 서울 청계천 공구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낸 기어 박스가 들어가 있는 장치를 찍은 거다. 사진 속의 장치는 높이 25㎝쯤 되어 보이고, 크게 세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의 키워드 ‘임피던스’

임피던스는 전기공학에서 유명한 단위인데, 시중에 그걸 측정하는 장치는 나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뭘 만들었다는 것일까? 양 교수는 “SECM에 임피던스를 접목하기 위해 새로운 측정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내가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 수집 보드’와 ‘전기화학 측정 장치’를 직접 설계하여 제작하고 그 당시 MS-DOS 운영 체계에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박사 때도 임피던스 연구에 몰두했다. 석사 때 연구가 특정 교류 전압을 가했을 때 나오는 교류 전류로 전기화학 임피던스 값을 알아냈다면, 박사 때 연구는 한 가지 값을 추가로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무게 관련 임피던스 값이었다. 양 교수는 “전기화학 임피던스와 무게 관련 임피던스를 동시에 측정하려는 게 박사 때 연구”라고 말했다.

양 교수가 박사과정을 할 때는 사람들이 전도성고분자 연구를 많이 하던 때였다. 전도성고분자는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말한다. 전도성고분자가 산화환원될 때 일어나는 현상을 많이들 연구했다. 양 교수는 이 연구에 자신이 석사 때 했던 임피던스 연구를 결합해, 박사 때 연구주제로 삼았다. 양 교수 설명을 들어보자.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인 전도성고분자 막의 산화환원 반응이 일어나면, 고분자 막 안으로 물과 이온(양이온·음이온)이 들락날락한다. 고분자 막 안으로 음이온과 양이온 중에서 무엇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이온들 무게를 재야 했다. 그 작업을 통해 고분자 막 안으로 뭐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연구는 두 이온을 분리해서 무게를 쟀고, 각각의 이동속도를 알아냈다는 면에서 세계 최초였다.”

박사 때 연구는 미국 물리화학 학술지(Journal of Physical Chemistry B)에 시리즈 논문으로 세 번 발표했다. 양 교수는 “당시 한국의 화학 수준이 높지 않았고, 학위 할 때 그 정도 하면 잘한 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양 교수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박사 공부를 3년 반 만에 마쳤다. 남들은 최소 4년은 걸리는데 빨리 끝낸 것이다. 1997년 8월이었다. 하지만 아뿔싸, IMF외환위기가 한국을 휩쓸기 직전이었다. 그는 공부를 시작하던 처음부터 교수로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외국 유학 다녀온 사람이 워낙 많을 때이니, 한국에서 박사 해서는 대학에 자리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취직하려고 했으나 기업이 사람을 뽑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박사후연구원으로 다녀와서 취업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프레드 앤슨 교수 실험실로 갔다. 당시 프레드 앤슨 교수에게는 한국인 제자가 많았다. ‘과학 연구의 최전선’ 취재를 위해 만났던 서울대 정택동 교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양 박사는 앤슨 교수 방에서 하던 연료전지 연구가 재미 없었다. 그래서 6개월쯤 지났을 때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L)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일하는 제임스 에번스 교수(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 재료공학과) 실험실에서 일했다. LBL에서는 리튬 배터리의 알루미늄 전극 부식 연구를 했다. 리튬 배터리의 양극에 존재하는 알루미늄이 안정적이기는 하나, 특별한 전해질 안에서는 부식이 일어난다. 그는 박사 때 임피던스 측정으로 ‘고분자 막 무게’를 알아내는 연구를 한 걸 응용해서 알루미늄의 부식 메커니즘을 알아냈다. 미세한 무게 변화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했다.

얘기가 여기까지 나왔을 때 양해식 교수의 연구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사진기자였다. 이야기를 멈춘 양 교수가 사진을 찍기 위해 1층에 있는 실험실로 안내했다. 7~8명의 대학생이 보였다. 인도네시아 유학생도 있었다. 교수가 나타난 데 대한 불편한 기색은 보지 못했다. 실험실 분위기가 좋다는 걸로 해석됐다. 20여분 사진을 찍었다. 촬영이 끝나고 그와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초고감도 바이오센서는 면역센서

계단을 올라오면서 물었다. “교수님의 연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그때까지 나는 그의 연구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약간 조바심이 났다. 그는 “잠시 뒤에 말하겠다”라며 계단과 복도를 마저 걸어갔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양 교수는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초(超)간단 바이오센서 만들기”라고 말했다. 큰 그림을 보고 싶어 좀 더 얘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학위 때는 새로운 측정장치 개발에 집중했고,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들어간 ETRI(전자통신연구원)에서는 반도체 공정을 이용한 소자, 즉 센서를 제작했다. 그리고 교수가 되어서는 초(超)고감도 바이오센서 개발에 집중했다. 이런 걸 바탕으로 초간단 바이오센서를 개발하는 걸 목표로 한다”라고 말했다.

초간단 바이오센서는 무엇일까? 그는 “면역센서를 개발하고자 한다. 면역체계의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한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갔다. “임신 여부를 진단하는 키트가 있지 않느냐. 그게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하는 간단한 바이오센서다. 임신진단키트는 소변에 특정 호르몬(항원)이 있는지를 검출하는 게 목표다. 항원(특정 호르몬)이 있으면 그게 항체에 결합하고, 그 결과 진단키트에 빨간색 줄 두 개가 나타난다. 이 신호는 임신했다는 걸 뜻한다. 이때 호르몬은 농도가 매우 높다. 그래서 검출하기가 쉽다. 나는 아주 극소량의 물질이 있는 경우에도 검출할 수 있으면서도 간단하고 빨리 결과를 알 수 있는 바이오센서를 만들고자 한다. 그걸 면역센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생체의 면역체계가 외부 침입자(항원)를 무력화하기 위해 이용하는 항원항체 반응(면역 반응)을 쓰기 때문이다.”

양 교수가 준비한 슬라이드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진 촬영을 하러 가기 전에 했던 설명을 다시 이어갔다. 그는 미국 버클리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1999년 초 한국에 돌아왔다. 대전 ETRI에서 전기화학센서 연구자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다. ETRI에서는 2004년 가을까지 5년간 일했다. ETRI에서 바이오센서를 설계했다. 연속측정형 혈당센서 개발 관련 일을 했다. 1회용 센서와는 달리 연속측정형 혈당센서는 피부 아래에 센서를 놔둬 혈당 변화를 계속 확인할 수 있다. 반도체 공정이나 소자를 제작하는 경험을 이때 ETRI에서 쌓았다. 아주 적은 양의 용액을 제어하는 기술인 미세유체(Microfluidics) 제어기술을 이때 배웠다.

그가 부산대 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건 2004년 9월부터다. 양 교수는 “교수가 되고 뭘 할까 고민했다. 전기화학을 했지만, 화학반응 공부도 많이 했다. 그쪽으로 승부를 걸자고 생각했다. 화학반응을 이용한 신호 증폭에 연구를 집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6년간 초고감도 바이오센서를 개발해왔다.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을 당시에 나노물질이 많이 나왔기에 나노입자를 어떻게 바이오센서에 접목할까 하는 궁리를 했다. 그는 “다시 설명하면, 특정 물질이 있는지 여부를 고감도로 검출, 확인하기 위해 매우 큰 신호증폭 기술을 새로 개발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

신호증폭 기술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새로운 효소(혹은 인공효소)를 이용한 신호증폭법과, 산화환원 순환을 이용한 신호증폭법이다. ‘효소’를 이용한 신호증폭법에서는 효소가 신호를 증폭시키는 일을 한다. 측정대상 물질(항원)이 항체에 결합하면 항체에 달아놓은 효소가 활동을 한다. 효소 한 개가 많은 생산물(Product)을 만들어냄으로써 미세한 양의 측정대상 물질만 있어도 검출해낸다. P(생산물)가 많이 생겼는지 여부는 색깔 변화, 혹은 형광이 나오는지, 혹은 전기화학적인 신호(예 전류 변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효소로 큰 신호증폭을 얻는 데 한계가 있고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 효소보다 나은 특성을 보이는 ‘인공효소’를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나노입자가 ‘인공효소’가 돼 효소처럼 작용한다. 가령 효소 자리에 금 나노입자를 붙여 놓으면, 생체 효소보다 더 큰 신호증폭 효과를 내놓는다. 양 교수는 “효소보다 금 나노입자가 반응을 하는 활성 부위가 더 많다. 그래서 더 큰 신호증폭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신호증폭법인 ‘산화환원 순환’에 대해서 양 교수는 “진짜 많이 한 연구”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P가 하나 있다. 산화됐다가 환원됐다가 하는 반응이 계속 일어난다. 산화 반응과 환원 반응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P가 많이 만들어진다. 이게 순환, 사이클 반응이다. P가 많이 나오니 신호가 증폭된다. 그랬기에 낮은 농도의 물질을 측정할 수 있는 고감도 센서를 만들 수 있었다.”

2006년 미국 화학회지 JACS에 쓴 논문이 그가 교수가 된 뒤에 쓴 사실상 첫 번째 논문이다. ‘나노촉매에 기반한 단백질 분석’이라는 제목이다. 양 교수는 “인생 논문이다. 교수로서의 연구 출발점에서 Big Shot(‘크게 한 방’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후 연구들은 그걸 확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6년 JACS 논문에는 ‘인공효소’와 ‘산화환원 순환’이라는 그의 연구의 핵심 개념이 들어 있다.

무세척 바이오센서 연구도 진행 중

고감도 센서를 개발한 뒤, 그는 2014년부터 무세척 바이오센서 연구를 했다. 무세척 센서는 센서의 세척이나 센서 안에서 용액을 흘려 보낼 필요가 없어, 현장에서 빠른 진단을 위해 유용하다. 전극과 표지(Label·앞에 소개한 연구에서는 ‘효소’ 혹은 ‘금 나노입자’가 표지였다) 사이의 거리에 따라 전자 전달속도가 달라지는 걸 이용한 연구다. 무세척 바이오센서 연구는 2018년 JACS(미국 화학회지)와, 지난 10월 앙게반테케미(독일 화학회지)에 논문이 나왔다. JACS 논문은 전도성고분자를 표지로 사용한 것이고, 앙게반테케미 논문은 광촉매를 표지로 이용했다.

그는 초간단 바이오센서 개발이 목표라고 했다. 감도가 뛰어나고, 세척하지 않아도 되기에 필요한 사람이 사용하기 간편하고 빠른 시간 내에 현장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센서가 초간단 센서다. 양 교수는 초간단 바이오센서 개발이라는 목표지점까지는 “70~80% 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화학은 정직한 학문”이라면서 “연구에 정답은 없고, 노력한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정답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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