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성 포항공대 교수(화학)를 지난 10월 16일 포항공대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박사과정(스탠퍼드대학)과 박사후연구원(하버드대학) 생활은 지옥과 천당으로 갈렸다. 그는 포항공대 화학과 95학번. 석사까지를 포항공대에서 마친 뒤 2004년 스탠퍼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스탠퍼드는 미국 서부 지역의 최고 명문 대학 중 하나다. 이곳에서 그는 캘리포니아의 좋은 기후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새가 없었다. 지도교수(드미트리 얀들로프)가 터프(tough)했다. 지도교수의 눈높이가 높아 박사과정 5년간 논문을 한 편밖에 쓰지 못했다. 같은 실험실의 학생들은 지도교수와의 불협화음으로 하나씩 떠나갔다. 물론 그로부터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이다. 그의 지도교수는 수년 후 정년(tenure) 심사에서도 탈락했다. 이은성 박사과정 학생이 박사 4년 차일 때였다. 정년 심사에서 떨어지면 대학을 떠나야 한다. 실험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모두 다른 교수를 찾아 떠나 이은성 학생 혼자 남았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스탠퍼드와 하버드, 천당과 지옥을 오가다

지도교수가 학교를 떠난 뒤 박사논문 방어(defense)를 혼자서 해야 했다. 그의 연구 분야는 ‘유기금속화학’이었고, 팔라듐(원자번호 46번)이라는 금속을 갖고 탄소(C)와 불소(F)의 결합 만들기가 연구 주제였다. 얀들로프 교수는 학교를 떠났으나 이은성 학생의 논문 ‘디펜스’ 자리에는 참석해 그를 심사위원에게 소개하는 일은 했다. 그간 열심히 공부했기에 다행히 ‘디펜스’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맞아 일할 자리가 없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취업이 안 되니,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경쟁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하버드대학 화학과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교수는 토비아스 리터(Tobias Ritter). 리터 교수는 방사성 동위원소로 의약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은성 박사가 스탠퍼드에서 한 연구를 듣고 박사후연구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교수는 “보스턴의 삶이 훨씬 행복했다. 좋은 결과가 있어 좋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토비아스 리터 교수의 실험실에서 그는 불소 동위원소(불소-18)를 복잡한 분자에 붙이는 연구를 했다. 불소-18은 극소량만 사용해도 방사선이 많이 나오는 방사능물질이다. 박사학위 때에도 불소를 갖고 연구하기는 했으나, 그때는 불소-19였다. 불소-19는 자연에서 안정적인 물질이고, 음이온의 형태로는 그리 유해하지 않다.

이은성 교수는 “불소-18이 전자를 만나면 인체에 아주 해로운 감마선을 내놓는다. 불소-18을 방사성의약품으로 사용하려면 아주 조금 사용해야 한다. 이걸 탄소에 붙이는 연구를 박사후연구원 때 했다. 이 작업이 어려웠다. 금속을 이용해서 이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박사과정 때 스탠퍼드에서 사용했던 팔라듐 금속을 갖고, 불소-18을 복잡한 분자의 탄소에 붙이는 성과를 먼저 냈다. 이어 니켈을 갖고 똑같은 일을 해냈다. 팔라듐을 갖고 한 연구는 2011년 저명한 학술지 ‘사이언스’에, 니켈을 갖고 한 연구는 2012년 미국 화학회지(JACS)에 발표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런 연구 실적이 있어서 2013년 3월 포항공대 교수로 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토비아스 리터 교수는 지금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뮐하임 안 데러 루르 소재)에서 디렉터로 일한다.

포항공대 교수로 다시 만난 스승

하버드대에서의 3년3개월 생활을 뒤로하고 포항공대에 와서 그는 다시 옛 은사인 김기문 교수를 만났다. 김기문 교수는 그의 학부 4년간 ‘담임’에 해당하는 지도교수였다. 그 인연으로 석사 때에도 김기문 교수의 실험실에서 공부했다. 김기문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 74학번이고, 현재 IBS(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복잡계 자기조립연구단) 단장으로 일한다. 여전히 포항공대에서 가르친다. 이은성 학생은 김기문 교수의 지도를 받아 석사 때인 2000년과 2001년 독일 화학회지(앙게반테 케미)에 논문(폴리로텍산 연구)을 연속 발표한 바 있다. 앙게반테 케미는 JACS와 함께 최고의 화학학술지라고 얘기된다. 그런 연구 성과가 있었기에 미국 서부의 명문인 스탠퍼드대학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이은성 교수는 김 교수에게 배우면서 ‘무기화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바 있다.

김기문 교수는 동료교수가 되어 돌아온 옛 제자를 도와줬다. 자신이 이끄는 IBS 연구단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이 교수는 연구비 마련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5년간 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무기 유기금속화학 실험실’에 들어온 학생이 늘어났고, IBS 연구단으로부터 받는 연구비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그는 IBS로부터 독립했다.

취재를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도 그의 학생은 많고 실험실 공간은 부족해 보였다. 포항공대 화학관 내 이 교수 개인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였다. 학생 4명이 책상을 두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교수 연구실 안의 공간에 학생들이 있는 건 처음 보는 풍경이다. 랩(LAB)이 좁아서 개인 오피스 일부를 학생들을 위해 내준 것이었다. 그의 실험실에는 박사후연구원 4명, 학생이 16명이 있다고 했다.

새로운 라디칼 만들어 주족화학에 기여

교수가 된 뒤에는 무슨 연구를 해왔을까? 그는 “무기화학, 유기금속화학을 지금도 하지만 요즘은 무기화학 중에서 주족화학(main group chemistry)을 주로 한다. 하나 더 말한다면 촉매화학, 즉 촉매 개발을 한다”라고 말했다. ‘주족화학’이라는 용어는 처음 듣는다. 주족화학은 ‘주족원소(main group element)’를 갖고 하는 화학 연구를 가리킨다. 주족원소는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산소 등 30여개이며, 화학 주기율표에서는 1족(수소 제외)과 2족, 그리고 12~18족에 들어가 있다. 이 교수는 “주족화학에 내가 기여한 건 새로운 라디칼(Radical)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라디칼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한다.)

그의 그룹이 만든 라디칼은 NHCNO (2015년), 트리아지닐(Triazenyl·2017년), 옥심 이서 라디칼(Oxime Ether Radical·2018년)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생체 내에서 안정한 유기 라디칼’을 세계 최초로 합성했고, 이 연구는 현재 논문을 투고한 상태다. 라디칼이 화학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국외자로서는 잘 모르나, 이걸 만든 연구 결과가 최고의 화학학술지들에 실린 걸 보면 연구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었을 것 같다. NHCNO 합성(2015년)과 트리아지닐 합성(2017년)은 미국화학회지(JACS)에, 옥심 이서 라디칼은 2018년 앙게반테 케미에 논문이 실렸다. 이 교수는 “학계에서는 옥심 이서 라디칼은 화학반응을 하는 도중에 중간체로 만들어질 거라고 추측해왔다. 하지만 그 존재를 확인한 건 우리 그룹이 세계 최초”라고 말했다.

그는 주족화학 말고는 촉매 개발을 한다고 했다. 촉매 연구와 관련한 성과에는 2018년에 만든 CONY라는 이름의 새로운 리간드 합성이 있다. 리간드라는 분자는 금속 원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며, 이런 ‘금속 원자+리간드’ 구조는 촉매가 된다.

이은성 교수 연구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연구의 주요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너무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듯하다”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N-헤테로고리 카빈(N-Heterocyclic Carbene·NHC) 화합물이 첫 번째 키워드이고, 두 번째 키워드는 라디칼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우리 그룹은 특히 NHC를 많이 다루고 있다”라고 했다. 기억을 살려보니, 부산대 화학과 박진균 교수 취재 때 NHC 얘기를 들었다. ‘N-헤테로고리 카빈’에서 ‘헤테로고리’라는 말을 보자. 그건 탄소 원자 5~6개로 만들어진 오각형 또는 육각형 구조가 있을 때, 탄소 말고 탄소를 대신해 다른 원소가 하나 이상 들어와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N-헤테로고리’의 경우에는, 탄소를 대신한 원자가 질소(N)인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N-헤테로고리 카빈’이란 말 속의 ‘카빈(Carbene)’은 생체 내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촉매로 사용되는 분자다.

NHC에 대해 학술지 네이처(2014년 6월 25일 자)를 찾아보니 이런 문구가 있다. ‘NHC는 1991년에 분리하는 데 성공하고 특성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후 유기화학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이은성 교수는 “NHC가 여러 가지 특징을 갖는데, 그중에서도 카빈은 사람들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던 화학종을 안정화시키는 일을 한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 연구의 두 번째 키워드인 라디칼은 또 무엇일까? 이 교수는 이러이러한 라디칼을 만들어왔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라디칼이 무엇인지를 일반인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라디칼은 분자의 오비탈(분자 내 전자들의 궤도를 말한다)에 전자가 하나만 채워진 경우다. 이 교수는 “분자가 크면 오비탈에 전자가 하나씩 채워질 수 있다. 두 개가 다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분자가 매우 불안정하다. 다른 곳에서 부족한 전자를 얻으려고 한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라디칼은 반응성이 매우 높고, 그건 화학자가 라디칼을 이용하는 이유가 된다. 반응이 잘 일어나지 않는 분자가 있으면 라디칼과 결합시켜 전체적으로 분자의 반응성을 높인다. 반응이 안 가는 걸 가게 만들어준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계속 들어본다.

“NHC 속의 카빈이 라디칼과 공유결합을 하면 불안정한 라디칼을 안정화시킨다. 또 그 라디칼을 분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구조분석도 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라디칼을 합성하는데, NHC를 갖고 했다.”

일산화질소를 라디칼로 많이 사용

취재를 마치고 라디칼이 무엇인지 자료를 추가로 찾아봤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오는데 라디칼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과학문화포털 ‘사이언스올’에 따르면, 라디칼은 화학변화가 일어날 때 분해되지 않고 다른 분자로 이동하는 원자의 무리다.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무기화합물의 라디칼을 형성한 원자 무리는 독자적인 이온이 될 수는 있지만 독립된 물질이 될 수는 없다. 예컨대 Zn+H2SO4→ ZnSO4+H2의 반응식에서 SO4이온은 1개의 원자처럼 분해 또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이동한다. 이 SO4이온을 황산기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흔한 라디칼로는 CH3-(메틸기), C2H5-(에틸기), HO-(하이드록시기) 등이 있다.”

이은성 교수가 많이 사용하는 라디칼은 일산화질소(NO)다. 일산화질소는 생체에서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일산화질소의 생체 내 농도에 따라 기능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에 따라 일산화질소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1998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생체 내 일산화질소 연구자에게 주어졌다. 미국인 로버트 퍼치고트(뉴욕주립대 교수) 등 세 명의 수상자는 심혈관 시스템에서 일산화질소가 신경전달물질로서 기능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은성 교수에 따르면 일산화질소는 문제가 있다. 반응성이 너무 높다. 생체 내 반감기가 6초밖에 안 된다. 이 교수는 “NHC를 이용해서 일산화질소를 포집하고 오랫동안 보관하고, 또 필요할 때 방출할 수 있는 연구를 세계 최초로 했다. NHCNO 라디칼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게 2015년 JACS에 실린 연구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NHC를 갖고 라디칼을 만드는 연구의 대표적인 성과는 2017년 ‘트리아지닐 라디칼’ 합성이다. 이 분자는 미국 화학회가 내는 학술지의 하나인 C&EN (Chemical and Engeering News)이 선정한 ‘올해의 분자’ 중 하나가 되었다. 올해의 분자들에 속했고, 1등을 정하는 투표에서는 2등을 했다. 1등은 중국 연구자가 만든 분자가 차지했다. 중국은 화학자가 많으니 투표에서는 어찌해볼 수가 없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은성 교수는 ‘라디칼’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걸 쓸모가 있는 데 이용하고 싶어 한다. 유기화학자는 라디칼을 갖고 배터리에 쓰려고 많이 노력해왔다. 이 분야 연구를 이 교수도 하기는 하나, 많은 사람이 하기에 그만의 연구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다른 응용처를 찾았다. 이 교수는 “생체 내에서 안정한 유기 라디칼이 아직까지는 없다. 이걸 만들면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고 생각한다”라며 “MRI(자기공명영상)조영제로 유기 라디칼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주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라고 말했다.

콩팥 나쁜 사람은 쓰지 못하는 기존 조영제

MRI조영제는 사진을 찍을 때 특정 조직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환자에게 투여한다. 현재 MRI조영제로는 가돌리늄(원자번호 64번)을 쓴다. 문제는 가돌리늄이 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할 물질이 없기에 부작용이 있어도 그냥 사용한다. 콩팥이 나쁜 사람은 가돌리늄 조영제를 쓰지 못해 MRI 촬영을 하지 못한다. 유기 라디칼 기반의 조영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 교수는 “엄청나게 어려운 연구다. 그런데 생체에서 안정된 유기 라디칼을 우리 그룹이 최근 합성했다. 논문을 한 학술지에 제출했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단한 성취가 아닌가 싶었다. 그는 이번에 생체 내에서 안정한 유기 라디칼을 한 개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앞으로 생체 내에서 안정한 유기 라디칼의 종류를 늘려갈 예정이다. 이런 유기 라디칼을 변경하는 연구를 통해 MRI조영제로 응용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약은 유기분자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 라디칼로 된 약은 거의 없다. 라디칼이 생체에서 안정하지 않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물질로 바뀌기 때문에 그간에는 약을 만들 수 없었다. 이 교수는 “유기 라디칼 기반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 아주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내가 직접 만든다는 건 아니다. 그것들을 약 물질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다른 연구자와 협업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연구는 지난 10월 6일 삼성미래육성재단에 의해 과제로 선정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삼성미래육성재단 과제의 제목은 ‘초안정 유기 라디칼의 합성과 생체 내 응용’이다. 삼성미래육성재단은 도전적인 주제를 과제로 선정하고, 넉넉한 연구비를 지급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매우 기쁘다고 했다.

이은성 교수는 그간 가장 재밌었던 연구는 2015년 JACS에 실렸던 논문이라고 했다. NHC를 이용해 일산화질소를 붙잡을 수 있었던 연구 결과다. NHC는 그의 연구를 관통하는 큰 키워드 중의 하나였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스탠퍼드대학 박사 시절 지도교수가 가르쳐줘서 처음 접했다. 스탠퍼드대학 유학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지옥에 들어간 경험을 했는데, 그곳에서 화학자로 길을 걷는 등불 하나를 발견해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은성 교수는 “화학은 부지런하면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그는 “또 뭔가를 손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게 물리학과는 다른 화학의 특징이다.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나만의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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