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보람이’ 친모로 알려진 석씨가 지난 3월 11일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photo 뉴시스
구미 ‘보람이’ 친모로 알려진 석씨가 지난 3월 11일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후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photo 뉴시스

경북 구미에서 반(半)미라 상태로 발견된 ‘보람이’의 정체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동생이 떠나버린 빈 집에서 홀로 고통스럽게 숨지고 버려졌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아래층에 사는 외할머니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사실도 황당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사실은 숨진 보람이의 친모라는 기막힌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야말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엽기적 사건이 돼버렸다. 그런데 경찰이 마지막 퍼즐을 속 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면서 국민들의 피로도가 증폭되고 있다.

과학수사가 밝혀낸 참혹한 진실

당초 보람이 사망 사건은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철없는 젊은 엄마가 저지른 안타까운 사건으로 여겨졌다. 물론 윤리적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과도한 육아 부담을 견뎌내지 못한 철없는 부모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최근 우리의 삶이 더욱 팍팍해지면서 그런 패륜적인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2006년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과 작년의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과학수사가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이용한 ‘친자 검사’와 ‘혈액형 검사’로 드러난 진실은 상상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끔찍했다.

산부인과의 출생기록에 보람이의 혈액형은 A형이었다. 친모의 혈액형이 B형이었고 친부의 혈액형이 AB형이었다. 일반적인 항원·항체 검사로 파악하는 혈액형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친부의 혈액형이 AB형이라면 보람이의 혈액형이 A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멘델이 밝혀낸 현대 과학적 유전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DNA 검사로 밝혀진 친모의 ‘유전자’ 혈액형이 놀랍게도 BO형이 아니라 BB형이었다. ABO혈액형에서 BB형의 친모와 AB형의 친부 사이에서는 A형의 자녀가 절대 불가능하다. 자녀의 혈액형은 반드시 B형이나 AB형이어야만 한다. 그런 경우의 혈액형 유전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진실이다.

물론 산부인과의 혈액형 기록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적혈구의 항원과 그에 따른 항체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신생아의 혈액형 검사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라 상태로 발견된 보람이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검사 과정에서 DNA를 이용한 혈액형 검사를 실시했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경찰과 국과수가 분명하게 밝혀줘야 할 부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DNA를 이용한 친자 검사였다. 보람이와 친모·친부 사이에 친자 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친모의 유전자 혈액형에서 얻은 결과와 모순되지 않은 결과였다. 오히려 외할머니로 알려진 석모씨의 DNA에서 보람이와의 모녀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결과가 얻어진 모양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이었다.

상황은 간단치 않다. 친자 관계로 추정되는 석모씨와 가족들이 출산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경찰도 석모씨의 출산 사실을 입증할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추측과 억측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김모씨가 낳은 딸의 행방도 묘연하다.

DNA 검사 정확도의 정확한 의미

언론을 통해 온갖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의 섣부른 발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DNA 검사의 정확도가 99.9999%라는 주장이 대세다. 심지어 친자 검사를 4번이나 반복했지만 동일한 결과가 얻어졌다는 사실도 강조되고 있다. DNA 검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석모씨가 임신 거부증이나 해리성 기억장애에 걸렸을 것이라는 과도한 주장도 있고, 경찰 수사에 저항하는 가족들에 대한 불필요한 소문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

경찰이 수사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과학수사의 증거 능력은 막강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모든 유전정보가 담겨 있는 DNA 검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33년 전에 수거했던 증거물에 남아 있는 범인의 희미한 DNA 흔적만으로도 진범 이춘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실제로 범인이 남긴 DNA를 용의자와 비교하는 ‘동일인 검사’의 경우에는 100%의 정확도를 기대할 수 있다. 증거물과 용의자의 DNA 염기서열 30억개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자 검사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46개의 염색체로 구분되어 있는 DNA는 부모로부터 각각 절반씩을 물려받는다. 그렇다고 모든 자식이 똑같은 DNA를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정자와 난자에 들어가는 DNA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교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한 염기서열의 DNA를 가지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DNA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국 DNA의 염기서열만으로는 100% 정확한 친자 관계 확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염색체에는 짧은 염기서열이 특정한 횟수만큼 반복되는 STR(short tandem repeat)이라는 ‘좌위’가 있다. 한 쌍의 염색체에서 동일한 좌위에 있는 STR은 각각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그런 STR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DNA의 구체적인 염기서열은 다르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DNA에서 충분히 많은 좌위의 STR을 비교하면 친자 관계를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국과수에서는 23곳의 STR 좌위를 활용한다.

부모의 DNA가 모두 확보된 경우에 친자 검사는 동일인 검사의 경우만큼 정확할 수 있다. 보람이가 김모씨와 김씨의 전 남편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결론은 유전자 혈액형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친부나 친모 중 어느 한 사람의 DNA만으로 친자 검사를 하는 경우에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 쌍의 STR 중 어느 것이 확보한 DNA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부와 친모 한쪽의 DNA만 확보했을 경우 비교하려는 한 쌍의 STR 중 확보한 DNA와 일치하는 것이 친모일 수도, 친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 사건처럼 석모씨와 보람이의 DNA만 확보하고 친부의 DNA가 없는 상태에서는 석모씨가 보람이의 친모인지를 99.9999% 확신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보람이가 석모씨의 친자라면 비록 아버지가 다르더라도 보람이와 김모씨의 자매 관계 가능성도 DNA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한계는 뚜렷하다.

과학수사에서 얻은 증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더욱이 과학적 증거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학수사가 단순히 증거를 수집·분석하는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심지어 수사 상황의 공보에도 과학수사 전문가의 적극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