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남자 100m 금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마르셀 제이콥스(왼쪽). ⓒphoto 뉴시스
도쿄올림픽 남자 100m 금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마르셀 제이콥스(왼쪽). ⓒphoto 뉴시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 번개’ 우사인 볼트(34·자메이카)가 은퇴한 뒤 처음 열린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대이변이 펼쳐졌다. 이탈리아의 마르셀 제이콥스(27)가 올림픽 ‘육상의 꽃’ 100m 최강자로 우뚝 선 것이다. 올림픽 남자 100m에서 유럽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한 건 무려 29년 만이고, 미국과 자메이카 이외 국가의 선수가 우승한 것도 24년 만이다. 제이콥스의 100m 기록은 9초80. 볼트가 보유한 남자 100m 최고 기록 9초58(2009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자신의 최고 기록이자 유럽 신기록까지 달성했다.

탄성 13% 높인 ‘줌X’ 폼

육상선수들의 기록 경신에는 첨단기술이 큰 기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해 첨단기술을 녹여낸 운동화의 힘이다. 신기록을 향해 달리는 육상선수들의 운동화에는 어떤 기술이 접목되었기에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록 단축이 가능할까.

0.01초, 0.001초의 찰나에도 승패가 엇갈리는 100m 육상은 어느 종목보다 운동화가 중요하다. 198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육상 신발을 가볍게 만드는 쪽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했다. 선수가 신발을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 모를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 신발 제작업체들의 목표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200m 세계신기록을 세운 마이클 존슨이 신었던 운동화는 96g의 초경량이었다.

운동화의 바닥은 밑창, 중창(밑창과 깔창 사이 부분), 깔창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밑창의 강도는 운동화 종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육상 단거리 종목의 경우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가볍고 밑창이 단단한 운동화를 신는다.

반면 점프 동작이 많은 농구 선수들은 발목과 무릎 관절을 보호해야 하므로 우레탄 등의 푹신푹신한 재료로 밑창을 만든다. 마라톤화 또한 선수들의 발에 가해지는 힘을 줄이기 위해 가벼우면서도 충격 흡수가 강한 쿠션이 부착된 운동화가 필요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이봉주 선수도 충격 흡수가 뛰어난 특수 제작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마라톤화는 중량과 통풍, 충격 흡수력, 탄성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만든 스포츠 과학기술의 결정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운동화 기술은 어느 쪽으로 진화했을까. 세계 육상계가 주목하는 최근의 운동화는 탄소섬유와 같은 첨단 소재를 이용한 기술이다. 과거에는 밑창에 얇은 고무판을 활용한 운동화를 신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경쟁했다면, 지금은 중창에 탄소섬유 소재의 첨단 기능이 집중된 운동화가 실력의 판세를 바꾸기도 한다. 나이키의 운동화 ‘베이퍼플라이’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베이퍼플라이의 중창에는 스펀지처럼 가늘고 뻣뻣한 탄소섬유판이 박혀 있다.

나이키에 따르면 베이퍼플라이의 중창에는 폴리우레탄보다 탄성이 뛰어난 폴리에테르블록아미드(PEBA) 소재를 사용한 ‘줌X’라는 나이키 자체 개발 폼(form)이 들어 있다. 이 탄소섬유판이 투석기의 지렛대나 스프링과 비슷한 역할을 해 착지 후 내딛는 힘을 85%까지 높여준다. 기존 운동화에 비해 반발 탄성이 13% 높다. 신발의 폼과 탄소섬유판의 결합이 지면을 차고 달려 나갈 때의 에너지 사용을 기존보다 4% 줄여준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베이퍼플라이의 무게는 기존 운동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선수가 힘을 덜 들이도록 반발 탄성을 높이는 쪽으로 소재를 개발했다. 어떤 성분의 탄소섬유를 첨가하는지, 얼마만큼의 비율로 소재를 넣는지가 중창 연구의 핵심이라는 게 나이키 측의 설명이다.

육상선수들은 ‘줌X’ 중창을 사용한 운동화를 신고 세계기록을 쏟아냈다. 2019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마라톤에서 케냐의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35)는 중창에 탄소섬유판 3장을 넣은 특수 베이퍼플라이를 신고 달려 인간 한계로 여겨지는 마라톤 ‘2시간 장벽’을 처음으로 깼다. 1시간59분40초가 그의 세계기록이다.

또 지난해 9월 벨기에 브뤼셀 킹보두앵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육상연맹 다이아몬드리그 시범경기 ‘1시간 달리기’에서는 장거리 영웅 모 파라(37·영국)가 2만1300m를 달려 세계기록을 세웠다. 2007년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에티오피아)가 작성한 2만1285m를 15m 경신한 기록이다. 여자부 1시간 달리기에서도 세계기록이 탄생했다. ‘중장거리 최강자’ 시판 하산(27·네덜란드)이 1시간 동안 1만8930m를 달려, 2008년 디레 투네(에티오피아)가 세운 1만8517m를 322m 넘어섰다. 1시간 달리기는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먼 거리를 달리는 이색 종목으로, 세계육상선수권이나 올림픽 정식 종목은 아니다. 2019년 세계 주요 마라톤대회에서 1~3등을 차지한 선수 36명 중 31명이 나이키 베이퍼플라이를 신고 뛰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도 육상 첫 경기였던 육상 남자 1만m 금·은·동메달리스트부터 여자 100m 금메달리스트, 남자 100m 금·은메달리스트, 남자 400m 허들 은메달리스트까지 나이키의 줌X폼이 들어간 운동화를 신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키의 운동화 ‘베이퍼플라이’. 중창에 탄소섬유판이 박혀 있다.
나이키의 운동화 ‘베이퍼플라이’. 중창에 탄소섬유판이 박혀 있다.

기술 진화가 스포츠정신 위배?

이처럼 운동화의 기술 진화로 기록이 경신되자 기록 단축을 위한 과학기술과 스포츠의 접목은 스포츠정신에 위배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어떤 장비나 도구 없이 오로지 훈련과 신체능력으로만 도전해야 진정한 스포츠정신이라는 것. 우사인 볼트 또한 기능성 운동화를 신지 않는 선수들에겐 불공정한 경기 환경이라며 세계육상연맹에 조처를 요구했다. 운동화의 첨단 기술이 일종의 ‘기술도핑(technology doping)’에 해당한다는 논란이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첨단기술 운동화는 시간 경기에서 주요한 발전이라며 스포츠의 진정성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기술 도입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육상 트랙이 돌에서 합성고무로, 장대높이뛰기의 장대가 대나무에서 유리섬유로, 테니스 라켓이 나무에서 금속으로 재질이 바뀌었듯 운동화도 탄소섬유로 바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세계육상연맹은 지난해 국제경기용 신발 규정을 발표했다. 밑창 두께는 40㎜ 이하, 탄소섬유판은 1장만 넣도록 제한했다. 그러자 나이키, 아디다스 등은 중창에 1장의 탄소섬유판과 밑창 두께 39㎜라는 기준선 안에 맞춰 선수들의 기량을 극대화하는 신제품을 내놓았다. 또 세계육상연맹은 트랙 스파이크 운동화의 경우 800m 이하 단거리일 때는 밑창 두께를 20㎜, 800m 이상 중장거리는 25㎜로 제한했다. 해당 규정들은 도쿄올림픽에도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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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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