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017년 5월 5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브리핑룸에서 ‘국민이 만든 10대 공약’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017년 5월 5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브리핑룸에서 ‘국민이 만든 10대 공약’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대선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여야의 예비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캠프의 몸집을 불리면서 화려한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오로지 대선 승리만을 목표로 은밀하게 운영되는 ‘밀실 캠프’ 인사들이 만들어낸 졸속 포퓰리즘 공약(空約)이 대부분이다. 누가 봐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엉터리 선심성 퍼주기 공약으로 불안한 유권자의 표심을 노리고 있다. 그동안 대선 공약의 핵심이었던 과학기술·산업·외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국가의 장기적 미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공약(公約)도 찾아볼 수 없다.

국정에서 사라져버린 과학기술

지난 60여년 동안 우리는 ‘낯선’ 과학기술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변변한 석탄 화력발전소도 갖추지 못했던 우리가 1956년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1주일에 1달러로 연명해야 했던 세계 최악의 빈국이 ‘과학기술입국’을 외쳤던 것은 놀라운 선택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추고, 문화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그 결과였다.

그런 과학기술이 이제는 국정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과학기술로 국가 경제를 일으키고, 국민 생활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용기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떠들썩하던 4차 산업혁명의 열기도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일본과의 소재·부품·장비 갈등을 해소하고, 정체도 불확실한 수소경제를 일으키는 요술방망이로 전락해버렸다. 과학기술계 인사는 듣도 보도 못 한 낯선 인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참여정부의 화려했던 ‘과학기술중심사회’의 꿈을 나락으로 떨어뜨려버린 황우석 사태도 대선 캠프 출신의 ‘황금박쥐’(황우석 서울대 교수·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박기영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가 만들어낸 참극이었다. 당장 기적처럼 완성될 것인 양 야단법석을 떨었던 배아줄기세포 치료기술과 복제소 산업에 대한 관심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토목사업이라고 떠들썩했던 ‘4대강 운하’를 비롯해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녹색성장’도 밀실 캠프가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22조원의 예산을 쏟아부은 4대강 사업은 반복적인 감사원 감사와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에 녹조로 가득 채워진 16개의 보(洑)를 남기고 끝나버렸다. 허황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꿈도 기능·역할이 분명치 않은 기초과학연구소(IBS)로 축소되고 말았다. 원전과 조력(潮力)발전으로 환경을 지키고 경제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녹색성장은 국제적 허풍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히려 국가연구개발 예산의 총괄관리를 맡고 있던 부총리급의 과학기술부를 해체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밀실 캠프를 압도하고 있던 정책 전문가들의 황당한 실책이었다. 어렵사리 출범한 교육과학기술부와 국가과학기술위원회도 오히려 과학기술의 해체에 더 크게 기여를 하고 말았다.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를 외쳤던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학기술부의 복원을 외치며 어설프게 급조한 미래창조과학기술부는 낯선 재미 과학자의 장관 영입 논란으로 시작부터 어수선했다. 결국 이동통신 사업자의 보조금 정책에 휘둘리고, 민간의 창의력으로 4차 산업혁명의 꿈을 달성하겠다는 X-프로젝트로 법석을 떨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탈핵 국가’ 선언으로 시작해서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으로 빠르게 변질된 탈원전도 1000명이 넘는 교수들로 구성됐던 역대 최대 규모의 밀실 캠프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기술을 개발한 원자력 전문가들이 한순간에 국민 안전을 위협하고 환경을 망쳐버린 적폐세력으로 전락해버렸다. 창원의 원전부품산업도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무작정 중단시켜버린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재개를 결정한 공론화위원회의 의견도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무시해버렸다. 원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59%였고, 원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은 32%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멀쩡한 월성1호기의 조기폐쇄를 밀어붙이던 백운규 장관이 산업부 공무원을 “너 죽을래”라고 윽박지르게 만든 것도 밀실 캠프가 만들어낸 신(新)적폐 때문이었다.

국회가 ‘제왕적 공약’ 견제해야

물론 대선 공약을 포기할 수는 없다. 후보의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후보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대선 공약이다. 그렇다고 대선 공약이 세상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실은 몹시 안타까운 것이다.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의 발전에 필수적인 과학기술을 국정에서 밀어내버린 것도 어설픈 대선 공약이었다.

대통령 후보가 내세운 공약이 헌법과 법률을 넘어서는 막강한 제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은 비정상이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공약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존의 법과 제도를 손질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법과 제도를 수정하기 위한 사회적 설득 노력을 해야 하고 제도적 절차를 지켜야만 한다. 오로지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사회적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적폐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국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제왕적 공약을 감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을 가진 헌법기관이 바로 국회이기 때문이다. 원자력안전법·녹색성장기본법·전기사업법을 통째로 무시해버린 대통령의 황소고집은 법치국가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에게 돌아갈 부담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검토도 외면해버리고 고작 109명의 찬성으로 탄소중립기본법을 통과시켜버린 책임도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전문성과 윤리성이 모두 의심스러운 어설픈 선무당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모은 밀실 캠프가 문제의 핵심이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후보는 절대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 캠프 출신으로 국정을 어지럽힌 전력을 가진 인사들을 다시 끌어모으는 대선후보도 경계해야 한다.

밀실 캠프의 선무당들을 중용(重用)하는 인사 관행도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공직은 대통령의 사사로운 보상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권이 자격 미달의 캠프 출신 인사들의 ‘회전문 인사’로 민심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핑계로 사실은 자신들의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캠프 출신들을 경계하고 통제하는 것이 대통령의 가장 막중한 책임이 돼버린 세상이다. 과학기술과 법치는 21세기의 자유민주국가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