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성탄절 특집극 ‘고마워, 웃게 해줘서’로 재기 장애인 가수 강원래도 등장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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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되자 자연스럽게 장애인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장애인이 되면 ‘내가 쓸모없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세상에 쓸모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국가 공인 1급 장애인’인 제가 장애인의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나선 겁니다.”

KBS 김영진(50) PD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급 장애인이 됐다. 그가 10년 만에 드라마 ‘고마워, 웃게 해줘서’를 연출한다.

김 PD는 2000년 7월 미국 유학 중인 아내와 자녀를 만나러 미국 시카고에 갔다가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다섯 달간 뇌사상태로 누워있었다. 당시 6명이 차에 타고 있었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김 PD는 그해 12월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뇌 손상이 와서 마누라도 못 알아봤어요. 뇌 4분의 1 정도를 잘라서 냉장고에 넣어놓았다가 다시 이어 붙였다고 들었어요. 큰애 작은애도 구별 못하니까 애들이 ‘아빠 이상하다’면서 막 울었어요. 또 병원에서 중국영화를 보고 있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오면 ‘나 여기 중국이야’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전에 드라마 ‘야망의 전설’ ‘사랑하세요’ 등을 성공시킨 김 PD는 그렇게 세상과 헤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성공했고 2002년 9월 KBS에 복직했다. “그동안 작가 관리, 탤런트 선발을 맡아 왔어요. 회사(KBS)에 ‘나 아직 더 일할 수 있으니 써달라’고 했어요. 저는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코너에 나오는 개그맨 왕비호(윤형빈)가 하는 말을 좋아하거든요. 선생님이 ‘수업 끝’이라고 하면 ‘누가 수업 끝이래?’라고 외치면서 나오잖아요. 아직 제 삶도 끝난 게 아니니까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한 거죠.”

출연진 중 9명이 장애인

김 PD가 10년 만에 연출을 맡은 성탄절 특집극 ‘고마워, 웃게 해줘서’는 12월 25일 밤 11시10분 KBS 1TV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성우가 꿈인 지체장애 소녀와 성대가 결절된 남자 가수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여기에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가수 강원래와 현재 그가 운영하는 장애인 공연단 ‘꿍따리 유랑단’의 이야기를 녹였다. 출연진 중 9명이 장애인으로 실제 꿍따리유랑단 단원들이다. “가수 강원래씨랑 같이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어요. 2002년 복직을 해서 강씨에게 ‘내가 만약 드라마 하면 같이 하자’라고 했죠. 결국 8년 만에 같이 하게 됐네요. 그는 드라마에서 ‘으라차차 유랑단’ 단장으로 나와요.”

남녀 주인공은 3인조 그룹 ‘디토’의 메인보컬이었지만 발성장애 진단을 받고 가수를 포기한 오세준씨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운전하던 경운기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된 김지혜씨가 맡았다. 이들의 가족으로 나오는 배우 손현주, 권해효, 김규철, 조양자 등은 “김 PD와의 의리를 지키고 싶다”면서 무료로 출연한다. 여기에 청각장애 댄서, 외팔 무에타이 선수, 손 없는 마술사 등이 등장한다. “장애인 출연자들에게는 각자 개인기가 있어요. 청각장애 댄서는 보청기 진동을 느끼면서 춤을 춰요. 한 손 없는 마술사는 다른 한 손으로만 마술을 해요. 연습 중 폭발 사고로 손을 잃었는데 호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것으로 설정을 해서 ‘건방진 마술사’라는 별명을 붙여 이미지 메이킹을 다시 했어요.”

현장·연기·스토리 모두 ‘리얼’

김영진 PD(오른쪽)와 가수 강원래.
김영진 PD(오른쪽)와 가수 강원래.

대본 작업은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에서 ‘서연아, 울지마, 사랑해!’라는 작품으로 체험수기 부문 우수상을 받은 바 있는 김효선 작가가 맡았다. “처음으로 함께 작업하는데 드라마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더라고요. 아마 작가님도 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아픈 경험이 있어서 장애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와의 인연은 1998년 시작됐어요. 김 작가가 KBS저널 객원기자로 저를 인터뷰했다고 하더라고요.”

10년 만에 돌아온 촬영장이 김 PD에게 녹록할 리 없다. “10년 만에 연출하니 바뀐 것도 너무 많아서 어리벙벙했어요.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욕을 먹기도 했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엔 진통제가 잘 안 들었는데 요즘에는 효과를 본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왼쪽 발에 감각이 없는데도 아팠어요. ‘상상통’이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매우 피곤하지만 다시 일하는 즐거움이 더 큽니다.”

그는 촬영장에서는 주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한다. “일을 빨리빨리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하지만 신기한 게 다 같이 힘들어하다가도 ‘우리는 다 병신이다. 병신육갑을 하든지 잘 놀아보든지 하자’라고 외치면 또 힘이 나요. 우리끼리 ‘이 드라마는 장애에 관한 리얼 다큐’라고 이야기하죠. 촬영현장도, 연기도, 스토리도 모두 ‘리얼’입니다.”

2부, 3부 계속 만들 것

김 PD가 지금처럼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하지만 걸을 수 있게 됐어도 드라마 연출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둘 다 오랜 준비 끝에도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안 맡겨줘서 뮤지컬과 영화를 하려고 했어요. 이를 통해 제가 아직 연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두 작품이 모두 엎어지면서 깨달았어요. 장애인 이야기를 재활 위주로 접근하면 재활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 절망에 빠진다는 겁니다. 재활 성공률은 별로 높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장애 극복이 아니라 장애 안에서의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인간 승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소리 들으면 속으로 ‘얼어 죽을, 무슨 인간승리냐. 아직도 이렇게 힘든데 말이야. 언제까지 힘들지 모르는데’라고 생각해요. 장애는 보통 죽을 때까지 회복이 안됩니다. 회복을 생각하며 재활을 하면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회복이 안되니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김 PD는 대학(연세대 영문과) 졸업 후 오리콤 카피라이터, 한국일보 편집기자를 거쳐 1987년 KBS에 입사했다. 3년간 ‘오후의 교차로’ ‘밤의 교차로’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주로 하다가 1990년 드라마국으로 왔다. ‘야망의 전설’의 성공을 시작으로 ‘사랑하세요’ ‘아름다운 비밀’ 등으로 사랑을 받았다. “학과 커플인 아내는 지금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어요. 아이들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죠. 저는 지금 누나랑 같이 살아요. 앞으로도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번 작품은 3부작의 처음이에요. 저는 ‘존재’라는 제목을 따로 붙였어요. 이어서 ‘다시’(2부), ‘제거’(3부)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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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호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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