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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41호] 201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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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여인]⑨ ‘제주의 화가’ 이왈종과 김예순씨

“氣 살려줘야 그림도 잘 그리죠… 그냥 지고 살아요”

황은순  차장대우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낙수소리가 들릴 만큼 지척인 곳, 정남향의 집안 가득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눈앞에 제주의 푸른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져 있다. 정원엔 사철 돌아가며 화사한 색을 선물하는 들꽃들 사이로 ‘50살’이 넘었다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한창 붉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서울의 번잡함을 피해 그 좋다는 교수직(추계예술대)도 버리고 제주도에 터를 잡은 지 20년, 이제는 ‘제주의 화가’로 불리는 한국화가 이왈종(66) 화백의 서귀포 작업실 풍경이다.
   
   낮은 하얀색 나무 대문을 열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 화백이 준비해놓은 ‘인동차’를 직접 만들었다는 도자기 컵에 내놓았다. 따뜻한 서귀포의 햇살이 덥혀 놓은 방안에서 차를 마시고 앉아 있으니 불과 몇 시간 전 한파에 얼어붙은 서울을 떠나온 것이 아득해졌다. 영하 17도의 서울과는 달리 이날 서귀포의 수은주는 영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있는 통유리 창으로 이 화백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동백나무 사이로 이 화백이 “직박구리”라고 말한 새들이 연방 날아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 화백의 그림 속으로 들어와 앉아 있는 듯했다. 이 화백이 “천당보다 서귀포가 낫다”고 말할 만했다.
   
   이 화백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 작가다. 지난해 말 국내 생존작가 중 인지도 높은 작가 순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그림을 그리기 바쁘게 컬렉터들이 가져가는 바람에 전시회를 할 작품이 없을 만큼 잘 팔린다고도 한다. ‘왈종(曰鍾)? 이름도 독특하다. 사연이 있었다. 본명은 이우종(李禹鍾). 한 점만 출품하게 돼 있는 국전에 작품을 더 내고 싶어 스승의 말을 듣고 ‘이왈종’ ‘이우종’으로 두 점을 냈다. 이상하게 ‘이왈종’으로 출품한 작품만 입선을 하더란다. 그때부터 ‘이왈종’을 사용하고 있다.
   
   이 화백의 그림은 ‘예술’이랍시고 무게를 잡지 않는다. 한국화라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모두 이 화백의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이다. 작업실 앞 작은 정원에 있는 수선화·동백나무·매화나무와 개·새·물고기·자동차가 모두 이 화백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 그림 속에서는 사람과 새와 들꽃이 평등하다. 수선화가 집보다 크고 물고기가 사람보다 크다. 도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여유 있는 서귀포의 삶의 속도는 이 화백에게 평범하고 작은 것을 돌아보게 했다. 한곳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삶, 바로 이 화백이 모든 작품에 담고 싶어하는 ‘생활의 중도(中道)’이다. 이 화백의 ‘쉬운’ 작품은 예술의 엄숙함에 질린 관객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골프·자동차가 등장하는 화려하고 경쾌한 작품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화의 공식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제주의 화가’가 되다
   
    작업실은 그림처럼 소탈했다. 네 개로 나눠진 공간엔 그림 외에 최근 몰두하고 있는 향로·도자기 작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서재처럼 쓰고 있는 방에도 이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속엔 작업실을 닮은 집이 있고 그 안에 남녀가 앉아 있다. 찻잔을 기울이거나 TV를 보고 있는 남녀는 이 화백의 그림에 자주 캐스팅된다. “그림 속 모델이 부인이냐”고 묻자 이 화백이 “그럼 이곳에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
   
   그림 속 모델인 부인 김예순(58)씨가 곱게 화장을 하고 현실로 걸어 나왔다. “인터뷰하자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한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는 김씨는 인터뷰를 부담스러워했다. 김씨는 조용히 움직이고 말을 아꼈다. “그저 뒤에서 심부름하고 아이들 키운 것이 전부다”라고 말하는 김씨는 행여 자신이 밖으로 나서는 것이 이 화백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듯했다. 대부분 화가 부인들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지만 김씨는 특히나 그랬다. 이 화백의 부인을 취재하겠다고 나서자 미술계를 꽤 오랫동안 출입했던 후배 기자조차 “이 화백에게 부인이 있었느냐”며 반문할 정도였다. 이 화백이 서귀포로 올 때도 혼자였고, 한동안 외로움과 싸우며 ‘제주 사람’이 되기까지도 혼자였으니 그런 오해를 받을 만도 했다. 이 화백이 “버리고 나니 얻어지더라”고 말한 것처럼 서귀포는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줬고 많은 것을 이루게 해줬지만 당시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탈출을 꿈꾸지만 꿈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결국 ‘가족’ 때문이다. 김씨가 반대했다면 이 화백의 ‘서울 탈출’은 힘들었을 것이고 오늘의 ‘이왈종’이 없었을 수도 있다.
   
   
   딱 5년만…
   
   김씨가 이 화백과 결혼을 한 것은 1979년. 김씨가 스물여섯 살, 이 화백이 서른네 살 때였다. 김씨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이 화백은 서라벌예대 동양학과(현 중앙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학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을 엮어준 사람은 이 화백의 단골 필방 주인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최고의 신붓감 후보와 “깡통 찰 것이 뻔하다”며 부모들이 딸 내주기 싫어하는 노총각 화가였다.
   
   이 화백은 내세울 것은 없었지만 당당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화가는 거지들이었어. 화가들하고는 결혼도 안 하려고 했어. 그렇다고 자존심은 있으니 아무하고나 하기는 싫고, 차라리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지. 대충 만나서 적당하게 산다는 것이 나는 용납이 안됐어. 내조 잘할 사람을 찾았지. 내조도 못할 것 같은 사람하고 뭣하러 결혼하겠어. 난 적당히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
   
   까다로운 노총각을 사로잡은 김씨 눈에 이 화백은 어땠을까? “남자다웠죠. ‘내가 먹여살릴 테니 걱정말라’고 큰소리치더라고요. 30년 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나지만. 하하.”
   
   이 화백이 큰소리를 친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학원이 잘돼 한 달에 150만원은 거뜬하게 벌었다. 전임교수 월급이 27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김씨는 이 화백의 큰소리를 믿고 전업주부가 됐다. 아이를 낳고 다시 학교에 복귀하려고 하니 이 화백이 “나가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라”고 또 큰소리치더란다. 이 화백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추계예술대학에서 전임교수 제의를 받았다. 돈 잘 버는 학원 대신 대학을 택했다. 그리고 10년 후 제주로 내려왔다. 김씨의 반대는 없었을까?
   
   “대학에 부임할 때부터 딱 5년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5년 만에 삼청동에 집도 사고 작업실도 마련했어요. 상황이 안돼서 ‘1년만 더 하자’ 한 것이 10년이 됐기 때문에 때가 왔나보다 했죠. 사실 그때도 작품이 심심찮게 팔렸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했어요. 워낙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니까.”
   
   틀에 박힌 조직생활이 맞지 않았던 이 화백은 교수생활이 늘 지루했다. “무슨 회의는 그렇게 많은지. 주문받은 작품을 구상해야 하는데 만날 회의야. 시간이 아까워서 담배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벌거벗은 남녀 그림도 그리고, 한시도 적고, 나무도장에 조각을 하기도 하고. 그때 훈련한 것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지.” 이 화백의 춘화는 유명하다. 이 화백은 이때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신문 삽화도 그리고, 골프공에 노골적인 체위를 그려 넣기도 하고, 남녀가 부둥켜 안은 모양을 넣은 에로틱한 향로도 만들었다. “자식도 있는 사람이 그런 그림을 그리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는 하지마, 내가 다 할 테니”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화백에게 제주행은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딱 5년만 아무 생각 없이 그림만 그리고 싶었어. 삼청동 집을 팔면 돈 안 벌어도 5년은 먹고살겠더라고. 미술시장이 죽었을 때였으니 주위에서 다들 ‘미쳤다고’ 말렸지만 스스로 고립시켜 승부를 걸고 싶었어. 뭐든지 몰입하지 않으면 안돼. 치열해야 해. 그때 판단이 옳았던 거지.”
   
   그렇다면 왜 제주였을까? 이 화백의 말이다. “제자들 전시회 가봐야지, 애경사 참석해야지. 서울 시내 살면서 안 갈 수 없는데 제주도에 있으면 덜 미안하잖아. 따뜻해서 사시사철 꽃도 피고, 사람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니 주관적으로 살 수 있고. 여기서는 몇 시간이고 작업할 수 있지만 서울에서는 어디 그러나. 기자들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잖아.”
   
   아이들과 집안일은 김씨에게 모두 미루고 홀로 시작한 제주 생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으니 오히려 서울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부터 부조작업을 시작했다. 몸을 혹사시켜 잡생각을 막았다. 한국화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부조작품은 반응이 좋았다. 덕분에 서울 삼청동 집은 아직도 남아있다.
   
   
   부인이 본 작가 이왈종
   
▲ 이왈종 作 ‘제주 생활의 중도’
김씨는 아이들 키우는 일이며 집안 대소사며 이 화백의 인사치레까지 도맡았다. 두 아이가 미술대를 가서 뒷바라지도 만만치 않았다. 큰딸(이오성·32)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화를 전공했고, 아들(이규성·31)은 텍스타일을 선택했다. 딸은 화단의 거물인 ‘아버지의 그늘’이 큰 부담이고, 아버지의 욕심은 딸이 “죽기살기로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그런 부녀를 지켜보는 김씨는 안타깝다. “아빠는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에요. 단 5분도 허투루 쓰지 않아요.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노력을 많이 해요. 그런 아빠 눈으로 보면 요즘 아이들 하는 것이 마음에 들겠어요? 자신에게 철저한 만큼 아이들한테도 엄격해요.”
   
   자신의 이야기를 내내 아끼던 김씨는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말이 많아졌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타고나는 것 같아요. 남보기는 그냥 스타가 되는 것 같지만 인내심이 남달라요. 법문도 많이 읽고 책을 많이 봐요. 그래서인지 감정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아요. 그림도 감정의 전달이잖아요. 새벽 2~3시면 일어나서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요. 평면작업부터 목각, 조각, 도자기에다 작년부터는 미디어아트도 시도하고 있어요. 시대가 변하면 예술작품의 표현방법도 달라져야 하잖아요. 이젠 모든 것이 영상으로 가고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또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거죠.”
   
   김씨의 설명이 등 뒤에서 넘어다본 수준이 아니다 싶었는데 10년 전 대학원에서 ‘불교미술’을 공부했단다. “큰 딸이 고3일 때 옆에서 같이 공부했어요. 우리나라 문화유산 95%가 불교미술이잖아요. 현대미술 보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아빠도 해보라고 해서 아이들이 대학 다닐 때 대학원을 다녔어요. 아빠가 세 명 등록금 대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어렵게 한 공부를 써먹을 데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김씨에게 남편의 작품에 대해 물었다. “주관도 세고 내 말 들을 성격도 아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해요. 마음에 드는 것은 ‘이건 참 좋다’ 하고,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아무 말 안해요. 안 좋다는 이야기는 작가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간섭 안하는 것이 도와주는 거죠.”
   
   
   이왈종의 부인으로 사는 법
   
   김씨는 “아빠가 워낙 알아서 잘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작가가 아닌 남편으로 보자면 주관 강하고 철두철미하고 ‘대충’ 하는 것 싫어하는 ‘기센 남자’ 옆에서 목소리 죽이고 사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만날 야단 맞고 살아요. 입맛이 까다로워 세 끼 반찬 안 바꾸면 싫어해요. 정성이 안 들어갔다면서. 그럴 땐 ‘그림이 잘 안 풀리나 보다’ 하고 그냥 넘겨요. 그렇게 스트레스 풀겠거니 하는 거죠. 내 잔소리 들을 성격도 아니지만 굳이 큰소리 내면서 이기고 싶지 않아요. 기가 있어야 그림도 그리는데 굳이 기 꺾을 필요 없잖아요. 자신감이 없으면 자신 없는 그림이 나와요.” 김씨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팎의 생활이 분명한 부부가 요즘 함께 하는 일은 골프다. 이 화백은 김씨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나보다 더 골프에 미쳤다”고 말했지만 평균 80타를 자랑하는 이 화백의 골프실력은 소문나 있다. 이 화백은 “골프 덕분에 먹고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10여년 전 제주의 한 골프장에서 이 화백에게 골프장에 걸어놓을 그림을 부탁했다. 골프채를 잡아본 적도 없었으니 막막했다.
   
   “골프를 모르는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잖아. 잡지책 보고 겉 폼만 그리는 것하고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은 다르거든. 포장되고 위장된 것은 들통이 나게 돼있어. 치열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보는 사람도 금방 알거든. 그래서 골프를 치기 시작했지. 초보 주제에 겁 없이 내기 골프를 했다가 된통 당했어. 화도 나고, 그림 그리고 있는 줄만 알고 있을 가족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기도 하고. 그때의 가슴 아픈 경험들을 그림에 담았어. 전국 골프장에서 내 그림을 서로 달라고 그래. 이젠 골프가 날 먹여살려.”
   
   가뜩이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내기에서 ‘박살’이 났으니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을까. 내기골프로 시작한 탓에 ‘필드가 전쟁터’ 같았던 이 화백의 골프 그림에는 생뚱맞은 탱크가 종종 등장한다. 전시에서 화랑의 예측과는 달리 ‘솔드아웃’된 골프 그림은 치열한 ‘전투’의 결과였던 셈이다.
   
   
   “안주하면 죽는다”
   
   “인기는 아침이슬과 같다”고 말하는 이 화백의 전투는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장 잘 팔리는 작가이지만 이 화백은 “안주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요즘 신진작가들 아이디어가 얼마나 발랄해. 적당히 인기 있다고 소홀하면 안돼.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해야 해.”
   
   김씨는 ‘변화에 대한 고민’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는 이 화백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밤 9시에 잠이 들어 새벽 2~3시면 일어난다. 잠자는 시간을 넘기면 잠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자제한다. 서울에서 살 때만큼 연락 없이 들이닥치는 경우는 없지만 연락 오는 사람 모두 만나다 보면 작업에 몰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술자리도 가릴 만큼 시간을 아끼는 이 화백이지만 매주 빠지지 않고 챙기는 것이 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왈종 그림교실’을 10년 넘게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5개월 과정인데 새로 접수하는 날엔 부모들이 밤새워 줄을 선다고 한다.
   
   김씨는 두 자녀가 독립하고부터 제주도로 내려왔다. 작업실과 바로 옆에 있는 살림집을 관리하면서 이 화백의 곁을 지키고 있다. 부부 모두 주민등록상으로도 제주도민이다. 이 화백은 인터뷰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사진 빨리 찍어줘. 이제 다 됐지?” 연방 확인하며 취재진을 빨리 쫓아내고 싶어했다. 불청객이 사라지고 나면 동백꽃·매화꽃·수선화·검둥개가 또 다시 이 화백의 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생활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생활이 되는, 이 화백이 꿈꾸는 ‘단순한 삶’이 부부의 시간을 채울 것이다. 장끼(수꿩)까지 날아든다는 정원을 지나 이 화백의 그림 속을 빠져나왔다.
   
   “처자식 벌어먹일 자신 있으니 큰소리치고 산다”고 말하는 ‘기 센 남자’ 이 화백.
   
   “기 살려 그림 잘 그리게 해야지 쓸데없이 이기면 뭐하느냐”고 말하는 ‘조용한 내조’의 김씨.
   
   “서울의 수선화는 이런 향기가 안 난다”면서 김씨가 정원에서 꺾어준 하얗고 노란 수선화의 진한 향기가 공항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조용한 내조’의 힘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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