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환상의 그대’의 한 장면
영화 ‘환상의 그대’의 한 장면

우디 앨런의 새 영화 ‘환상의 그대’는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맥베스’는 욕망이라는 정체불명의 적에 굴복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라는 적은 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호색을 가진 파충류처럼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다. 이 적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우리는 이 적을 일컬어 ‘욕망’이라고 통칭한다.
   
   욕망이라 부르면 그럴 듯하지만 때로 이 욕망은 타인의 삶을 파괴한다. ‘맥베스’의 욕망도 그렇다. 총애받는충신이었던 맥베스는 어느 날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다.” 그는 이 예언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욕망과 마주친다. 사실, 이 예언이야말로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정체불명의 욕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왕이 된다는 것은 왕의 살해를 전제로 한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왕을 죽여야 한다.
   
   마음속 깊이 똬리 틀고 있는 욕망이야 문제 없지만 예언을 만나 실현이 될 때에는 범법과 패륜이 따라온다.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누구도 욕망을 함부로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사람들이 구태여 ‘법’이라는 이름의 강제를 수용하는 까닭은 욕망의 유혹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맥베스 역시 갈등하지만 마침내 욕망의 편에 무너진다. 맥베스뿐일까? 우리도 다르지 않다.
   
   맥베스는 “눈앞의 공포보다 끔찍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상상하지마, 사람은 상상하기 때문에 비겁해지는 거래”라는 말로 변주된다. 조금 비약하자면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등장하는 전공투 세대들의 프로파간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짐작하다시피 맥베스의 상상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짜릿한 엑스터시를 향하고 있다. 출산의 희열이 죽음의 공포와 닮은 것처럼 권력을 얻는 상상은 그 어떤 승리보다 공포스럽다. 그것은 강렬히 원하는 만큼 공포스럽다.
   
   ‘맥베스’ 전체를 감도는 것 중 하나는 예언의 힘이다.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토정비결이나 한 해 운수를 점친다. 예언을 기다리는 순수한 행위이기도 하고 예언에 기대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허약한 의지처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언이, 꼭 필요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듣고 싶지 않은 경고를 해 줄 때도 있고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건을 예고할 때도 있다.
   
   막연한 기대가 확실한 예언이 될 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예언의 확인뿐이다. ‘환상의 그대’는 이 예언의 힘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맥베스처럼 인생을 가름할 어마어마한 예언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두 소소한 예언과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라고 말이다. 이혼한 채 어느새 노년을 맞은 두 남녀는 각각 다르게 미래를 견딘다. 남자는 비아그라를 복용하며 자신의 과거를 되찾고자 하고 아내는 점성술에 빠져 좋은 예언만을 채집한다.
   
   인생에 대해서 기대를 가져라, 희망을 버리지 말라, 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위안들은 싸구려 사기로 오인되는 경우도 많다. 신문 하단에서 읽을 수 있는 오늘의 운세나 잡지 뒷면의 점성술이, 그렇고 그런 낙관론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건 진짜 예언이 아니라 낙관적 희망을 구매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비관론이야말로 더 성숙한 대답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우디 앨런의 말마따나 약간의 희망을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나쁜 예언만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태도 말이다.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의 예언에서 욕망의 그늘을 보았다면 우디 앨런은 예언에서 값싼 희망의 가치를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환상의 그대’는 ‘맥베스’의 네거티브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만큼 영화가 사랑한 문학도 드물 것이다. 고스란히 영화화된 작품들도 많지만 예민한 감독들에게 필연적 소재를 제공한 작품도 많다. ‘맥베스’가 욕망에 관한 드라마였다면 ‘오셀로’는 질투에 공략당한 한 남자를 보여준다. 질투는 대개 여자들의 것이라 여기지만 오셀로를 읽다 보면 남자의 질투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오셀로가 고통스러워 하는 질투 역시 외부의 자극에서부터 비롯된다. 맥베스에게 그것이 예언이었다면 오셀로는 가까운 지인의 계략으로 실행된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아고의 계략 역시도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이아고는 흑인인 주제에 아름다운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고 명장으로 칭송받는 오셀로를 인정할 수 없다. 질투란 그런 감정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내 논리 안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 바로 그 불편한 감정 말이다.
   
   이아고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오셀로의 인품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칭송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화약고, 질투를 자극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격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에게 질투는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아고의 추측이 옳았다. 질투는 의심과 짝을 이룬다. 의심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할 때 더 치명적이다. 의심이란 함께 있지 않았던 시간에 대한 궁금증의 그늘이다.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연인들의 장애물이 의심과 질투를 부추긴다. 사랑에 빠진 자를 의심의 굴에 빠뜨려 질투에 허덕이게 하는 것은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보다 쉬워 보인다.
   
   4대 비극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다만 허명이 아닌 까닭은 아마도 셰익스피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비루한 내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위대하다기보다는 남루하다. 하지만 그 남루한 욕망들 때문에 삶에는 드라마틱한 질곡이 생겨난다. 의심하고 질투하고, 남의 자리를 뺏고 싶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 훼방놓고 망쳐놓고 싶은 마음들이 셰익스피어 안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다.
   
   10대들의 필독서라 하지만 정작 셰익스피어를 읽고 공명하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그녀를 사랑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심하는 오셀로의 질투도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편협함의 증거로만 보였다. 야망을 실현하고자 자기 자신을 속이는 맥베스도 비겁한 욕심꾸러기로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삶의 속살 아닐까? 아직은 잘 이해되지 않는 리어왕의 얇은 귀도, 그 변덕스러운 노인의 주책도 언젠가 속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다시 읽을 때마다 변해버린 나를 발견하게 하는 마력,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야말로 오래전에 쓰여진 예언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2005년 조선·경향·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어국문과 박사 졸업,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고려대에서 강의 중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