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스완’의 한 장면
영화 ‘블랙 스완’의 한 장면

지난 2월 27일(현지 시각) 미국 LA에서 열린 83회 아카데미 시상식 관전 포인트는 작품상과 감독상이었다. ‘소셜 네트워크’ ‘더 브레이브’ ‘킹스 스피치’ 등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변의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부문도 있었다. 바로 여우주연상이었다. ‘블랙 스완’의 내털리 포트먼은 이 영화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싶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 자신이 캐릭터가 되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니나 세이어라는 인물이 창출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스카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2011년은 그의 연기에 알맞은 대가가 주어지는 해인 듯싶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은 섹시하고 파괴적이면서도 무척 매혹적인 작품이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재미있다 혹은 없다, 볼 만하다, 그렇지 않다 정도의 형용사로 반응이 정리된다면 ‘블랙 스완’은 이 단순한 서술어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단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영화는 감독과 배우의 시너지, 발레의 매혹, 카메라의 앵글, 편집의 시간 예술과 합쳐져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오랜만에, 말 그대로 숨죽이고 볼 만한 영화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수석 무용수 자리가 비게 되자 새로운 프리마돈나가 필요해진다. 모두가 노리는 주인공 자리, 깐깐하기로 소문난 감독은 백조와 흑조를 모두 함께 연기할 수 있는 무용수를 수배한다. 테크닉과 표현력 모두에 강점을 지닌 무용수만이 새로운 프리마돈나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니나는 뉴욕 발레 시어터의 자타공인 최고 무용수이다. 문제는 그녀의 흑조 연기가 백조 연기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감독도 그 문제를 계속 짚는다. 좀 더 자유분방하게, 좀 더 섹시하게, 좀 더 유혹적으로, 라는 말들을 요구하지만 니나에게는 난수표처럼 어렵다.

“흑조가 돼라”라는 명령은 “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악한 욕망을 풀어놓아라”라는 명령과도 같다. 하지만 니나의 삶은 온통 억압과 절제로 채워져 있다. 영화 ‘블랙 스완’은 니나라는 한 인물이 그려내는 욕망의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니나 개인뿐만 아니라 발레리나 모두의 삶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탄탄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루에 먹는 것을 일지로 적고, 연습 시간을 강박적으로 지켜내는 무용수들의 삶은 절제 위에 놓여 있다. 500g 정도 살이 찌는 것도, 연습 시간을 임의로 줄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조금의 나태가 곧 한 번뿐인 무대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아름다운 일회적 예술의 뒷모습을 쫓아간다. 무대 아래에서 단 한 번의 무대를 준비하는 무용수들의 일상은 노이로제의 연속이다. 그는 이 신경증적 공간을 기괴한 풍경으로 묘사해 낸다. 매일 토슈즈를 꿰매고, 발톱을 직각으로 세워 턴을 하는 그녀들의 몸은 거의 기계에 가깝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안쓰럽기도 하다.

극단적 신체 조작과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이 만났을 때 마음속 깊이 잠재워두었던 ‘광기’가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니나는 흑조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억압해두었던 다른 욕망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자위행위를 하고, 마약에 손을 대며,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흑조의 매력을 한껏 가진 동료와 동성애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욕망이 ‘나’의 통제권을 벗어나면 욕망은 나를 집어삼키고 만다. 니나의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욕망은 이제 니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을 긁고, 사적인 공간에서 낯선 사람을 목격한다. 어느 순간쯤 되면 상상인지 환상인지 허구인지 진짜인지도 모를 혼란 가운데 그가 서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쇼를 멈출 수 없다. 흑조가 되기 위해서는 진짜 ‘흑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가 영화에 긴장감을 선사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처럼 돼라”는 요구를 받곤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처럼’이다. 무엇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범생 니나는 ‘처럼’이라는 부사어를 연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흡수한다. 이제 그녀의 작은 내면 안에 흑조와 백조가 나란히 자리 잡는다. 게다가 흑조의 나쁜 욕망은 무시무시하리만큼 힘이 세다. 영화 속에서 거듭 출현하는 거울 이미지도 이 연기의 광기를 증폭시키는 데 한몫한다. 무용수의 사방을 둘러싼 거울은 나를 감시하는 또 다른 나의 눈이기도 하다.

내털리 포트먼은 흑조에 사로잡혀 가는 연약한 백조의 연기를 한 사람이 다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입체적으로 표현해 낸다.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 전 1년 동안, 하루 다섯 시간씩 수영을 하고 발레를 하면서 만들어 낸 몸은 전문 발레리나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발레리나처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그녀는 발레리나이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그는 연기에 몰입한다고 해서 생활 전체가 그 역할에 빠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내털리 포트먼은 연기는 연기, 삶은 삶이라 아무리 배역이 강렬하다 해도 카메라가 멈추는 순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블랙 스완’을 보게 되면 이 일상으로의 복귀력이 얼마나 대단한 내공인지 알 수 있다. 진짜 고수들은 ‘처럼’의 의미를 알고 있다.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신체 조작의 극단에서 결국 괴물이 되는 인물들을 여러 명 발견할 수 있다. 미키루크를 다시 스크린에 불러들인 ‘레슬러’도 이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레슬러’에서 가장 끔찍하고도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레슬러들이 서로의 몸에 스테이플러를 찍어대면서 동선을 짜는 장면이다. 그들은 서로 논의하면서 과격한 무대를 연출한다. 몸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선정성의 끝에서 그들은 그렇게 괴물이 되어 간다.

발레는 프로레슬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술의 극단에 놓여 있다. 하지만 신체 조작의 기괴함 면에서는 두 가지 행위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물론 한쪽은 선정적 시선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지에 대한 찬탄을 불러오긴 하지만 말이다.

낭만주의 화가 드가의 그림에는 기괴하게 왜곡된 발레리나들이 자주 등장한다. 한 발로 몸을 지탱하는 그녀들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마치 다리 한쪽이 없는 인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그려진 창백한 살빛도 이 기괴함을 배가시킨다. 아마도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시선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객석에 앉아 연기를 펼치는 무용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자기절제와 경쟁을 거쳤을 그녀들, 무용수들의 뒷모습에 카메라를 비춘 것이다. 예술을 보며 소비하는 일반 관객들이 무대를 본다면 예술가들은 다른 곳에서 연기를 바라본다. 예술은 이 다른 시선에서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도의 그로테스크함이 때로는 지극한 미를 만들기도 한다.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2005년 조선·경향·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 국어국문과 박사 졸업,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고려대에서 강의 중

강유정 영화·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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