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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39) 김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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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77호] 201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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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39) 김준엽

‘마지막 광복군’ 잡지 ‘사상계’ 이끌며 온몸으로 정의 실천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photo 김홍규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한 김준엽(金俊燁)은 사상계 주간,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지켜온 실천적 지성이다. 그는 일제 말에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이범석·지청천 장군 휘하의 핵심 광복군으로 금의환국하며, 자유당 치하에서는 광복군 동료 장준하와 더불어 사상계를 발간해 4·19혁명을 이끄는 매체의 주역 구실을 한다. 1980년대 고려대 총장 시절 신군부에 맞서 총학생회 부활 등 학원의 자유를 쟁취한 용기있는 학자의 표상을 보여줬다. 역대 정권에서 총리, 장관 등 요직을 권유받았으나 의연히 물리쳐 고고한 선비의 기개를 지켰다.
   
   김준엽은 1920년 8월 26일 평북 강계군 시중면 외천리동 254번지에서 김종걸(金宗傑)과 홍종식(洪宗植)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부계 충주 김씨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16세손으로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김남길(金南吉)이다. 김남길의 8세손 김양한(亮漢)은 조선조 성종 때 이조판서로 직간하다가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어 대대로 이곳에 살게 된다. 조부(金鳳九) 때 강계로 이사하며, 이때부터 재산이 늘어난다. 부친은 근검노력하여 강계에서 일등부자라는 소문난 부자가 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교적 선비로서 한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이재에도 밝았던 것 같다. 처음에 아버지는 강계읍에서 직조공장도 경영하고 상업에 종사하시면서 시중(時中) 지역(강계에서 90리, 만주까지 50리)의 땅을 사들였는데, 땅이 늘어가자 공장과 상업을 치우고 시중으로 이사했다.… 이 무렵에는 아버지가 벌써 강계 굴지의 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겨우 35세였을 것이고, 가정적으로는 대단히 행복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서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늘 외로워 하셨다.”(‘장정<長征> 김준엽 현대사’)
   
   모친은 성품이 매우 활달하여 시집온 후 재산도 많이 늘었고, 4대 독자 가문에서 5남매를 낳았으니 긍지를 가지게 된 듯하다. 대단히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말을 자주 퍼주곤 하였다.
   
   “우리집에 낯선 사람들이 자주 들르고, 그 사람들이 집을 떠나면 쉬쉬 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내가 자란 다음에야 알았지만 아버지가 남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셨다고 한다.”(‘장정’)
   
   
   “나의 멘토는 형들”
   

   김준엽은 1935년 시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고보에 입학한다. 그는 형들이 배일사상에 젖어 어려서부터 그를 그 방향으로 옳게 지도해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다.
   
   “나는 신의주고보에 입학하면서부터 민족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잘 키워준 것은 형들이다. 방학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전적으로 일인들의 조선 사람에 대한 횡포와 어떻게 하면 속히 왜놈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화제였다. 특히 둘째 형님은 급진적이어서 표면상으로는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는 만주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의 지하공작을 한 일도 있다. 그러다가 부득불 지병을 얻어 돌아왔는데 왜경의 추궁으로 고생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그들을 매수하여 무사케 한 일도 있다. 게다가 둘째 형은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분가하고는 나누어 받은 재산의 대부분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 일까지 하였다.”(‘장정’)
   
   김준엽은 신의주고보 시절 민족의식을 심어준 교사 중에 공민을 가르치던 한성수(전 대법관·이회창 전 총리 장인)를 기억하고 있다. 일본 수학여행 중 인솔교사였던 한 선생은 나이 어린 학생들의 항일적인 언동에 감복했는지 귀교 후 태도가 180도 달라져,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꼽혔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다는 일본인들의 성역인 이세신궁에서 일본 학생들을 두들겨 팼는가 하면, 귀로에 부산에서는 일본중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말을 쓰는 것에 시비를 거는 등 민족적인 무용담을 남겼다.
   
   김준엽은 1940년 신의주 동중(신의주고보)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입학한다. 이즈음 그는 독립지사를 부모로 모신 학우(김형기)의 단파방송 청취로 충칭(重慶)에 간 우리 임시정부나 김구, 이승만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다. 또 도쿄로 온 여운형을 만나 격려를 받고 중국 망명행을 결심한다.
   
   1944년 1월 20일 김준엽은 평양부대에 학병으로 입대한다. 2월 25일 광복군을 향한 탈출 교두보로 바라던 중국 서주 부근 일본 부대에 배속된다. 틈새를 노리던 그는 3월 29일 점호가 끝난 한밤중에 드디어 탈출을 결행한다. 탈출 순간의 장면이다.
   
   “성을 넘어서 해자로 내려갈 때에는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서는 순간 흙이 무너져 해자 속으로 떨어지면서 쏴아 하는 물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누구냐!’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켰으니 뛸 수밖에 없다. 나는 전속력으로 철조망을 넘고 호수에 뛰어들어갔다. 물의 깊이는 조사했던 대로 과히 깊지가 않아 나의 가슴패기 정도였다. 뒤에서는 ‘누구냐! 누구냐!’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허겁지겁 해자를 건너 맞은편 언덕을 단숨에 기어올라갔다. 동네 개들이 짖어댔다. 총소리가 곧 울려 퍼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동북쪽으로 죽어라고 뛰었다.”(‘장정’)
   
   
   일본 학병 입대 후 목숨 건 탈출
   
   그는 중국 군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30분쯤 달리고 4시간을 걸어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다. 학병 탈출 1호의 영광스러운 인물이 된 것이다. 대단히 운 좋은 학병 탈출 사례에 속하나 우리 임시정부를 향한 고난의 ‘장정(長征)’ 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우선 중국 장쑤성 서북부의 중국 유격대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가하게 된다. 유격대 사령관의 환영 만찬에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뜯어본즉 한치융 유격대 사령관의 초청장인데, ‘환영, 한국혁명지사 김준엽 동지’라고 써 있었다.… 한 사령관은 정식으로 나를 주빈 자리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재화한인(在華韓人) 등에 대한 선전공작을 담당하여 많은 한인들이 일군이나 일본점령구를 이탈하여 중국군이나 한국독립군에 참가하도록 힘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탈출 동기를 설명할 적에 우리 임시정부나 독립군에 참가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라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한 사령관은 ‘하오(好)! 하오(好)!’를 연발하며 내가 위대하다고 칭찬해 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장정’)
   
   김준엽은 약 4개월 동안 이들과 함께 유격대 생활을 한다. 사령관의 배려로 기마훈련을 받는가 하면 중국어도 익힌다. 많은 항일 전단도 작성한다. 문안을 간단명료하게 만들고, 전단은 대소로 갈라서, 가끔 색지도 사용하였다. 7월 9일 김준엽은 이곳으로 탈출해온 장준하, 윤경빈(광복회장 역임) 등 4명의 학도병과 극적으로 만난다.
   
   “‘한국분들이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이제 한국인의 동지가 생긴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씩씩한 동지들을 얻은 것이다. 나는 우리 몇몇이라도 백만의 독립군이 조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장정’)
   
   이날 밤 김준엽은 한 사령관과 함께 바로 그가 탈출해온 일본 부대장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이 자리에서 일본 부대장은 중국군 포로 30명과 이들 4명을 맞교환하자고 교활한 제의를 하나 한 사령관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는 감동 어린 신뢰를 보인다.
   
   
   이범석 장군 부관으로 특수훈련
   
   1944년 7월 28일 김준엽 일행 5명은 장정 길에 오른다. 이들은 중국 유격대의 안내를 받아 장사꾼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벙어리 시늉까지 해가며 온갖 기지와 곡예술을 동원하여 일본군 점령지를 여러 곳 돌파한 후에 9월 10일 광복군 훈련반이 있는 린취안(臨泉)에 도달한다. 이곳에서는 김학규 장군 휘하에 있는 70여명의 광복군이 중국군관학교에 속해 교련 중이었으며, 김준엽 일행도 여기에 자동적으로 편입된다. 이들은 김학규 주임 등의 교련 강의코스가 끝나자 각자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린 교양강좌를 개설하여 부대 내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특히 김준엽·장준하·윤재현 등은 이 내용들을 담은 ‘등불’이란 잡지를 만들어, 나중에 귀국 후 창간한 ‘사상계’의 모태가 된다. 이들은 종이와 붓과 벼루를 얻어 지질이 형편없는 마분지 종이 위에 일일이 붓으로 쓴 원고를 묶어 헝겁 표지로 제본했다. 표지 헝겁은 김준엽이 입고 있던 무명 팬티를 빨아 마련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준엽은 한동안 팬티 없이 지내야 했다. 그러나 2호까지 나온 잡지는 너덜너덜한 넝마가 될 정도로 부대원들 사이에 널리 읽히는 인기물이었다.
   
   린취안에서 70여일을 머문 후 김준엽 일행은 본래의 목적지인 충칭으로 향한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유비와 제갈량이 촉한 땅으로 헤쳐나가던 바로 그 험산준로를 따라 장정 중에 호랑이와 마주치기도 한다.
   
   “내가 앞에 서고 장형이 뒤에 서서 걸어가는데 무엇인가 난데없이 오른쪽 언덕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랬더니 내 앞 약 5미터에 커다란 호랑이가 소리도 없이 사뿐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 순간 아무 말 못하고 그 자리에 서니 장형도 발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큰 놀라움으로 나의 가슴 안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 못하였다.”(‘장정’)
   
   1945년 1월 31일 김준엽은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 만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김구 주석의 감격 어린 환영사에 이어, 김 주석은 곧 임정 각료들을 한 사람씩 소개해 주었다. 충칭에 머물던 약 3개월 동안 김준엽은 임정이나 광복군을 비롯한 중국 여러 단체의 열렬한 환영회에 연일 참석하며, 찾아오는 중국이나 연합국의 기자와 정보기관원들을 만난다. 또 김구·김규식·조소앙 등 임정 원로들의 ‘교양강좌’를 듣는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인 민필호를 찾아가 ‘등불’ 잡지를 속간할 등사판과 지류 일체를 지원받게 된다.
   
   1945년 4월 김준엽은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의 부름을 받아 서안으로 가 그의 부관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전략정보기관(OSS)과 합작하여 벌이는 국내진공작전 제1기 정예공작원(50명)으로 선정되어 특수진공훈련을 받는다. 이 사이 이범석 장군 부관실에 함께 근무하던 민필호의 딸 영주씨와 장준하 주례로 약혼식을 올리고, 6월 29일 아침 이범석 장군이 조회 때 “오늘부터 김준엽 동지와 민영주 동지는 부부가 된다”고 선포하여 극적인 결혼식을 올린다.
   
   
   사상계 편집위원 거쳐 주간으로 활동
   
▲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남 홍규씨.
민영주의 외조부 신규식은 중국 망명 시절 손문과 함께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이끌어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임정의 법무총장·외무총장·국무총리서리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손문 정부가 우리 임정을 승인하도록 한 공로자로, 이범석·김홍일 등 많은 독립투사를 키우기도 했다. 민영주의 부친 민필호는 신규식의 딸 신명호와 결혼하여 비서 일을 보다가 신규식이 별세한 후에는 임정 재무부장인 이시영의 비서로 활동하는 한편 상해교민단의 학무위원으로 교민들의 교육사업에 힘쓴다. 이어 일본의 기밀통신을 탐지하라는 임정의 명을 받고 중국 교통부의 통정사(通政司)가 되었다. 이시영·윤기섭 등이 그의 식객이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이 되어서는 충칭의 임정청사를 마련하며, 이범석과 함께 광복군을 창설한다.
   
   1945년 8월 18일 김준엽은 이범석·장준하와 함께 광복군 선발대로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나 일본군의 방해로 다시 기수를 중국으로 돌린다. 그는 11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부관이 되나, 귀국을 미룬 채 중국국립대학 대학원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난징(南京)의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당시 그로부터 배운 양퉁팡(楊通方) 전 베이징 교수, 허유한 교수(베이징어언문화대학 한국교육문화연구소장) 등 제자들은 중국 내 한국학의 주류로 성장했으며, 1992년 한·중수교 때도 기여했다.
   
   김준엽은 1949년 귀국하여 고려대 조교수가 되며, 이어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1955년), 1959년에 주간직을 맡는 등 자유민권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당시 그의 회고담이다.
   
   “이게 상업주의가 아니고 그때는 일종의 문화운동이었거든요. 문화운동 가운데서도 집약을 하면, 내가 보기엔 자유민권운동이에요.… 편집위원들도 대폭 늘리기로 하였죠. 그래서 아마 제일 많았을 때가 근 20명까지 된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 한청빌딩(서울 종로 사상계사가 있던 건물-필자 주) 그 넓은 방에서 국무회의 하듯이 모여가지고 국사를 논의하곤 하였죠.”(‘광복50년과 장준하’)
   
   1957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발기하여 부소장·소장을 맡으며, 이어 중국학회 등을 조직하여 중국학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반을 다진다. “그가 펴낸 ‘중국공산당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은 일관되게 ‘세계 속 한국의 진로’라는 목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조선일보 2011년 6월 8일) 그는 스칼라피노, 라이샤워, 글렌 페이지 등 세계적 석학들과 교유한다.
   
   
   노태우 정권 국무총리직 거절
   
   19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김준엽은 학원 내에 상주해 오던 기관원을 축출하며, 명예박사학위 수여의 남발을 금지시킨다. 그는 해직교수 구제에도 앞장서 모두 복직시킨다. 어용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직선제 총학생회 부활도 관철시킨다. 이처럼 학원의 자유와 자율권의 수호를 위해 단호히 맞서다가 그는 전두환 정권의 압박으로 2년8개월 만에 강제 사퇴한다. 김준엽 총장의 장렬한 퇴임에 고려대 학생들은 한 달 동안 ‘총장사퇴 결사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는 “평생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그때 학생들의 시위를 최고의 훈장으로 여긴다”고 회고했다.
   
   그는 역대 정권에서 여러 차례 요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물리친 사실을 자서전(‘장정’)에서 밝히고 있다. 1948년에 이범석 장군이 영입 제의를 하였으며, 1960년에는 장면 내각에서 주일대사 제의를 해 왔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실세 김종필이 공화당 사무총장직 제의를 해 왔고,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원 장관 제의를 해 왔다.
   
   1988년 1월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국무총리직을 제안하지만 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고사한다. “첫째, 노 당선자를 그동안 두 번 만났으나 잘 모르고 둘째,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셋째,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넷째,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면서 노 당선자의 이해를 구한다.
   
   김준엽은 1989년부터 중국을 찾아가 베이징대, 푸단대, 저장대 등에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지원한다. 상하이와 충칭의 임정청사, 상하이 윤봉길 의사 기념비, 항저우의 고려사(高麗寺) 등의 복원과 설립을 주도한다.
   
   김준엽은 2011년 6월 7일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별세하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부인 민영주(88)씨와 사이에 아들 홍규(65·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민설계 부회장)씨가 있다.


   
내가 본 김준엽
   
   서진영 사회과학원 원장
   
   나는 1969년 고려대 대학원 시절 아세아문제연구소 부소장이셨던 김준엽 선생을 처음 뵈었다. 그분은 당시 워싱턴주립대 장학금을 섭외해 오셔서 미국 유학생 선발대회를 개최했는데, 덕분에 서울대와 연세대 출신 장학생들과 함께 유학을 다녀왔다. 그후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중국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그분께서 고려대 총장이 되셔서는 고대신문 주간, 학생처장으로 보필해 왔다. 총장시절에는 정부와 정면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어용단체였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고려대가 가장 먼저 직선제 총학생회를 부활시켜, 교내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분은 “광복군 때 이미 죽었을 내가 고려대 총장을 했으면 됐지 더 연연할 것이 없다”면서 학원의 자유와 자율을 지키는 데 과감히 앞장섰다. 학원 폐쇄령 경고장까지 받으면서 2년8개월 만에 총장직을 강제 퇴직당했다. 뿐더러 그분은 중국에 한국학을 심고, 한국에서 중국학을 발전시킨 공로자이며 사회과학원을 창설했다. 우리 후진들이 그분의 큰 뜻을 잘 이어가야 할 것이다.

바로잡습니다
   
   한국의 명가 ‘이중섭 편’에서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이 ‘음향’에 실린 시와 표지화에서…’ 중 ‘음향’은 ‘응향’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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