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단구동 자택에서 집필 중인 모습. ⓒphoto 김영주
강원도 원주 단구동 자택에서 집필 중인 모습. ⓒphoto 김영주

경리(景利) 박금이(朴今伊)는 26년간에 걸친 생애를 건 치열한 집필로 민족의 대서사시 ‘토지’를 완성한 휴머니스트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서 1994년에 완성한 ‘토지’는 개인적 비극의 묘사로부터 출발한 박경리문학이 그 이전의 장편소설(‘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에서 개인과 사회와 민족비극의 형상화로 확대하였다가 그 모두를 수렴·종합해 이룩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작가가 40대에 쓰기 시작하여 60대 후반에 완성을 보게 된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 ‘필생의 역작’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작품이다.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5부 16권의 대작을 완성한 작가의 집념은 우리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치열한 작가정신의 표현이고, 전권이 독자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것은 우리의 독서풍토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으며, 무엇보다도 집필기간이나 작품의 길이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인물유형의 창조와 새로운 긴장의 유지는 우리 소설의 문학적 승리로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김치수,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별책)

박경리의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만 800여명, 원고지 3만1200매라는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71년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붕대로 수술 자리를 동여매고도 박경리는 집필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오래전 어느 연말 송년의 어수선함 속에서 고적했던 밤의 통곡이다. 마음 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마치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이 터져버릴 듯 통곡하시던 그 음산한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작가로서 별처럼 반짝이며 떠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질시의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한 말을 들으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처, 아픔들이 어머니의 스승이었다. 마치 부서져버릴 듯 통곡하시고 난 다음 어머니는 단정하게 앉아 모질게 원고지 앞에서 펜을 들고 계시곤 했다.”(딸 김영주씨 ‘곁에서 본 토지’)

‘토지’는 우리 문학에 대하소설의 물꼬를 튼다. 홍성원의 ‘남과 북’,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김원일의 ‘불의 제전’, 박완서의 ‘미망’ 등이 꼬리를 잇는다.

“‘토지’야말로 우리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소설(total roman)’로서 농민과 중인을 중심으로 양반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급을 망라한 우리 인구 전체의 삶의 모습을 재구성했으며, 별의별 갖가지 인물들과 성격들을 재현하고 창조함으로써 인간사의 모든 것을 모아들여 또 하나의 거대한 실존적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 언어가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세계의 실재를 파노라마적으로 전시했다는 소설의 거대성을 나는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김병익 ‘현대문학’ 2008년 6월)

통영의 딸

박경리는 1926년 10월 28일(음력) 경남 통영시 문화동 328번지에서 박수영(朴壽永)과 김용수(金龍守) 사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두 눈이 눈깔사탕같이 파아랗고/ 몸이 하얀 용이 나타난 꿈/ 그것이 태몽이었다는 것이다/ 하여 어머니도 주위 사람도/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었다고 했다’.( 시 ‘나의 출생’)

박경리의 부친은 낭만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을 지녔으며, 모친은 실질 검박하고 생활력이 강했던 듯하다.

‘남의 것 탐내거나 부러워한 적 없었고/ 쉬어서 못 먹는 밥도 씻어서 끓여 먹고/ 가을에는 일년치의 땔감 양식을 장만하지 않고는 잠이 안 오는 성미/ 하여 태평양전쟁 말기, 육이오전쟁 때도/ 우리는 죽 아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돈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를 들었지만/ 평소에는 쓸 만큼 손수건에 돈을 싸서/ 어머니는 그것을 꽉 쥐고 다녔다’.(시 ‘어머니의 사는 법’)

박경리는 1941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하여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었다. 소박 맞은 모친이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원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경리는 1941년 진주고등여학교에 입학한다. 이즈음 일본소설과 시, 일본어로 된 서양소설 등을 책방에서 쫓겨날 때까지 읽는다.

박경리는 진주고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6년 경남 통영군 지석리에서 김행도(金幸道)와 결혼하였다. 1948년에 남편이 인천 전매국에 취직하여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한다. 박경리는 이때 책방을 운영하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인천으로 이사한 뒤 조그마한 책방을 냈어요. 그때 책을 헐값에 많이 사들였지요. 책을 근으로 달아서 사는 것이 당시에는 즐거움의 하나였는데, 온갖 종류의 책이 묻어 들어왔지요. 나는 여고시절 공부도 신통치 않았던 터라 눈에 뜨이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사학만큼은 잘했어요. 인천 시절의 책읽기에서 차츰 역사의식을 깨치게 되었지요.”(인터뷰 ‘삶에의 연민, 한의 미학’)

김동리 추천으로 등단

박경리는 1949년 서울 흑석동으로 이주하며, 1950년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가 되었다가 6개월 만에 전쟁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은 부역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며, 6·25전쟁 중 남편과 사별하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가 수예점을 하면서 생활한다.

박경리는 195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서울 용산지점에 근무하면서 습작을 한다. 1954년 6월 한국상업은행 사보인 ‘천일’ 9호에 박금이라는 본명으로 16연159행의 장시 ‘바다와 하늘’을 발표한다. 퇴사 후인 1955년 10월에 발간된 ‘천일’ 11호에도 소설 ‘전생록’을 게재한다.

이즈음 박경리는 고향 친구가 세들어 살던 김동리 집에 찾아가 글솜씨를 인정받는다. 학생시절에 썼던 단편 ‘불안시대’를 김동리의 지도로 몇 차례 고쳐 쓴다. 이 작품은 박경리도 모르는 사이 박경리라는 필명과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게재된다. 김동리의 추천이었다. 이후 박경리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이듬해 8월에는 단편소설 ‘흑흑백백(黑黑白白)’이 2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여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한국상업은행을 그만두고 돈암동에 조그만 식료품점을 열고 창작에 몰입한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시보다 소설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셨다. 학교시절 잡지에 응모하려고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일도 있고 해서 ‘불안시대’라는 제목의 단편을 써서 선생님께 갖다 드렸다. 원고를 보신 선생님은 평소와는 완연히 다른 태도로,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소설을 쓰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열심히 몇 작품을 계속해 썼고 돌려받은 원고에는 철자법 고친 곳이 많았다. 차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수필 ‘선생님에 대한 추억’)

1956년 아들 김철수가 사고로 병원치료 중 숨진다. 이 일을 소재로 한 자전적 단편소설 ‘불신시대’로 1957년에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는다.

아들 사고로 잃은 후 장편소설 몰입

이듬해 첫 장편소설 ‘애가’를 민주신보에 연재하는 것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창작에 몰입한다. 1959년 장편 ‘표류도’를 발표해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하며, 1960년에는 장편 ‘성녀와 마녀’를 ‘여원’에 연재한다. 1962년에는 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하며, 1964년에는 장편 ‘파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현암사에서 간행한다. 이듬해 전쟁 시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시장과 전장’을 발표하며, 이 작품으로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받는다. 1966년에는 그동안 틈틈이 발표해왔던 글들을 모아 수필집 ‘Q씨에게’ ‘기다리는 불안’을 간행한다.

“‘김약국의 딸들’은 솔직히 말해가지고 통영의 떠도는 얘기를 모아서 재편집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작가의 입장에서는 나를 거기에다 투영했다기보다는 철저하게 객관성을 유지한 것이 ‘김약국의 딸들’이라고 저는 보고 있는데, 그런데 앞의 단편들이 모두 다 ‘김약국의 딸들’에도 들어가고 ‘시장과 전장’에도 들어가고… 이런 것처럼, ‘시장과 전장’과 ‘김약국의 딸들’ 이것을 종합한 것이 ‘토지’예요. 토속적인 거, 근대적인 거… 이런 게,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내 자신이 겪었던 일은 초기의 단편 몇 편 그거지.”(인터뷰 ‘사회학자 송호근의 작가 박경리론’)

박경리는 1968년 중편소설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을 월간문학 창간호(11월호)에 발표한다. 이 소설은 강청댁과 용이, 월선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것으로 뒷날 ‘토지’에 나올 사건들의 편영을 보여준다. 이듬해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다.(1969년 9월~1972년 9월) 그러나 1971년 8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1부의 연재를 마친다.

‘분홍빛 내리닫이 입고/ 딸에게 친구들에게/ 손 흔들어 작별하고/ 수술실에 들어갔었던 그해 여름/ 눈을 떴을 때/ 하루 사이/ 세계지도같이 기미가 쓴/ 딸의 얼굴이 보였다/ 글쓰는 굴레 벗어 버리고/ 고뇌와 분노의 굴레 벗어 버리고/ 미움과 절망도 다 벗어 버리고/ 그해 여름은 불행하지 않았다’.(‘그해 여름 3’)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부터 ‘토지’ 2부를 연재하기 시작한다.(1972년 10월~ 1975년 10월) 이해에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받는다. 이듬해 딸 김영주가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며 ‘토지’ 1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다.

“당시 유신체제하에서 긴급조치가 내려 정릉집으로 김국태씨 등 문인들이 김 시인을 데려왔어요. 잡히면 고문당해 죽을 것이라면서 숨겨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미망인과 처녀 단둘이 사는 집에 어떻게 외간 남자를 들일 수 있었겠어요. 그래 언덕 밑까지 바래다 줬는데… 택시를 타는 모습이 외등 밑에 보이는 것이에요. 순간 쫓기는 몸이 참 불쌍해서 숨겨 주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청혼도 결국 받아들이게 된 것인데 인간적 연민에서라고 할까. 제 팔자이자 운명이지요. 제가 태어날 때 조부께서 복덩이라고 하셨다는데 제 복의 절반만 나눠 주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분은 참 똑똑하고 제 할 일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김영주씨)

“문학이 인생보다 거룩하지 않다”

1973년 여름 박경리는 ‘토지’의 서평 취재를 위해 정릉집으로 찾아온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와의 면담을 두 차례나 사절하는 ‘무례’를 범한다. 당사자였던 김병익 기자가 박경리에의 헌사에서 사연을 밝히고 있다.

“여러 달 후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박 선생은 내 면전이어서 그랬겠지만, ‘토지’에 대한 여러 글들 중에 내 서평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때 김 선생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사에서 오신 때문이었지요. 내가 여기서 약해지면, 그래서 여기서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고, 그러니 절대 안된다고, 모진 각오로 인정이며 예의를 버려가며 자신을 매섭게 달구었던 거지요.’ 한쪽 가슴을 암으로 잘라내면서까지 집필을 계속하며 혼신을 다해 창작의 의지를 달구어온 그에게서 한 치라도 매스컴의 환호에 오염되지 않으려는 완강하면서도 고결한 정신을 그때 나는 또렷이 보았다.”(‘현대문학’ 2008년 6월)

‘토지’ 2부를 연재하는 중에 1974년 2월부터 12월까지 장편 ‘단층’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단층’은 자제의 소산은 아니다. 몽중이 아니면 누가 불러주어 쓴 글인지 모른다. 소설은 엉망진창이었고 독자와 동아일보사에 오직 면목이 없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펜을 놓지 않고서 끝을 맺었을까. 그것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수필 ‘비리가 진실되는 이치’)

1977년 ‘토지’ 3부는 순문예지를 떠나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잡지 ‘주부생활’과 ‘독서생활’에 동시에 연재되다가 다시 ‘한국문학’으로 옮겨 연재된다.(1977년 1월~1979년 12월) 1979년에는 박경리문학전집(전16권)이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된다. 이해 11월부터 1980년 8월까지 ‘토지’ 1, 2, 3부가 KBS에 처음으로 드라마로 방영된다.

1980년 서울 정릉집을 떠나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로 이사한다. 남편이 옥에 갇히고 혼자 마음고생하고 있는 딸에게 의지가 될까 싶어 짐을 싼 것이다.

“딸아이와 손자가 남편도 없이 애비도 없이 시가에 살고 있었기에 울타리가 되어주자고 서울 살림을 걷고 원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글쓰기 위해 원주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게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문학이 인생만큼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문집 ‘가설을 위한 망상’)

박경리문학상 제정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맏딸 김영주씨.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맏딸 김영주씨.

1981년 ‘토지’ 4부는 ‘마당’에 연재되다가 중단하였고(1981년 9월~1982년 7월), 다시 1983년 7월에 월간지 ‘정경문화’로 옮겨 연재하다 다시 중단된다.(1983년 7~12월) 이해에 ‘토지’1부가 일본어판으로 번역, 출간된다. 1984년 3월부터 9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한 ‘박경리시평’을 묶어 이듬해 ‘박경리의 원주통신-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지식산업사)를 간행한다. 1987년에는 충무시 문화상을 받는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밭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로서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삶의 궤적은 한 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수필 ‘천지에 충만한 생명의 소리’)

1987년 8월 연재가 중단되었던 ‘토지’ 4부를 ‘월간 경향’에 다시 연재하나 중단된다. 이듬해 ‘토지’ 1~4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다. 1992년 9월 1일 문화일보에 ‘토지’ 5부가 연재된다. 1994년 8월 15일 집필 26년 만에 ‘토지’를 탈고하고 8월 30일, 만 2년 만에 문화일보 연재가 끝난다. 이어 전 5부 16권으로 첫 완간본 ‘토지’가 솔출판에서 출간된다. 그 사이 ‘토지’ 1부가 영·프·독어판으로 출간되며, 2002년에는 21권으로 된 완간본 ‘토지’(나남출판)가 나온다.

1996년에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박경리가 이사장에 취임한다. 그후 토지문화관을 개관하고, 문화예술인의 창작을 지원하기 위한 창작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외동딸 김영주씨가 관장직을 맡아, 금년에 세계문학인을 대상으로 한 박경리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모친의 유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경리는 2008년 5월 5일 서울 풍납동 아산중앙병원에서 별세하며,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기슭에 안장된다. 박경리의 외동딸 김영주(65·연세대 사학과 졸업, 불교미술사 전공 사학석사)씨는 시인 김지하(70·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다. 맏아들 김원보(37·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씨는 SF판타지 소설 작가이며, 차남 김세희(30)씨는 영국 윔블던대학에서 조각을 전공 중이다.

내가 본 박경리

오정희 소설가

선생님을 뵈어온 지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내게 대한 호칭이 오정희씨에서 정희야로, 너로 바뀌었다. 선생님께서는 종종 내게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나무라시고, 장편소설을 쓰라고 다그치시다가도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언젠가 춘천에 다녀가실 때 터미널에서 원주행 시외버스에 태워 드리고 승강장에 그대로 서있는 나를 향해 들어가라는 손짓을 두어 번 해 보이시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셨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5분 정도의 시간에 선생님이 신경 쓰실까봐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비켜섰다. 버스가 홈을 빠져나가려고 차체를 돌리는 찰나 내 편을 바라보시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뒷날, 부담을 줄까봐 서로 모른 척하던 그날의 일을 말씀하시며 선생님께서 한바탕 웃으셨다. “너는 내가 신경 쓸까봐 숨어버렸고, 난 눈을 감았잖니? 너는 참 촌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