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한국의 名家 <현대편>]  (42) 박순천
  • facebook네이버 밴드youtubekakao 플러스친구
  • 검색
  1. 문화/생활
[2181호] 2011.11.14
관련 연재물

[한국의 名家 <현대편>](42) 박순천

한국 첫 여성 야당 대표 여성정치 시대 열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photo 조선일보 DB
해암(海岩) 박순천(朴順天)은 3·1운동에 참여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이자 광복 후 5선 의원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제1야당 당수를 지낸 정치인이다. ‘박할머니’라는 애칭에 걸맞게 거친 정치풍토에서도 ‘여성으로서의 품격’을 지켜온 특이한 카리스마가 곧 박순천이 지닌 인간적 매력이다.
   
   “‘박할머니’는 대학교수의 부인이요, 3남3녀의 어머니다. 그는 앉고 서는 것 하나하나에 여성으로서의 품위가 몸에 배었고 큼직한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가정의 식단이며 영감의 약, 아들 딸의 담임선생 이름까지 적을 만큼 자상한 사람이다. 그가 신익희·조병옥·장면 등과 허물없이 어울렸던 것은 바로 그의 굽힘 없는 정의감과 함께 관용·눈물 등 여성다운 품성을 향수처럼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김진배 정치평론가)
   
   아울러 그의 지도자관 역시 민주주의 정치인으로서의 충분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장점을 갖고 있어요. 그 좋은 점들을 한데 모아서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에요. 특히 최고지도자는 장수 중의 장수라야 해요. 한나라 고조 유방처럼 말이지.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람 누구꼬?”
   
   그는 정치하는 사람은 첫째는 애국심이 남달라야 하고, 둘째는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따르고 믿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가정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았고, 민주당 최고위원과 당수를 지냈지만 50㎡(15평)짜리 국민주택에서 여생을 보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박씨라 해서 ‘누님, 누님’ 하고 부르고, 육영수기념사업회 책임을 맡기도 했지만 그것을 돈이나 권세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고결한 품성을 끝내 지켜낸 정치지도자이다.
   
   박순천의 올곧은 인생과 함께한 그의 남편 일파(一波) 변희용(卞熙瑢) 역시 그와 걸맞은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박순천의 아호는 낭군의 아호와 짜맞춘 ‘커플 아호’이니 천생연분의 한 쌍이었던 셈이다. 일파 역시 도쿄 유학시절 3·1운동의 전초적 역할을 한 2·8선언을 주도하였으며, 4·19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교수시국선언에 앞장섰다. 일파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비롯하여 대중시보 등의 편집인과, 민족주의자의 집결체인 신간회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성균관대학 총장·사학총장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박순천은 1898년 9월 10일(음력)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에서 시골 한학자 박재형(朴在衡)과 김춘열(金春烈)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명련(命連)으로, 손이 귀한 집안의 딸이 명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해암의 부모는 기독교신자로 개화파였다. 해암은 열 살 때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의 부모는 여성교육이 부재하였던 당시에 여자아이를 받지 않는 한문서당에 보내기 위해 박순천에게 남장을 시켰을 만큼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있었다. 박순천은 12살 때 서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담벼락에 붙은 방을 보고 한·일병합 소식을 알게 된다.
   
   “저녁 때에 서당으로부터 귀가 도중 주막집 담에 붙은 네 글자의 벽보를 보았다. 이 벽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심에 싸여 있었고 그중에는 한숨 짓는 어른들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 끼여 덧없이 울기만 하였다. 합병이 무엇인지 명확히 터득하지는 못하였으나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긴다는 뜻만은 알았고…. 그때의 충격은 60평생 잊혀지지 않으며 오늘날까지의 나의 반항적 생애도 그때 받은 충격의 발동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박순천)
   

   귀가한 박순천은 읍내에 나갔다가 상투를 잘리고 돌아온 부친과, 이를 본 모친이 통곡하며 태극기를 항아리에 담아 담장 밑에 파묻어 감추는 것을 보면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체감한다. 이후 부친은 박순천을 집에서 50리 떨어진 부산의 일신여학교에 입학시킨다. 이 학교는 호주인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박순천의 회고담이다.
   
   “그때의 학교는 합병 직후라 일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였으며 따라서 선생님들도 학문보다 사상을 지도하는 동지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며, 학생들은 부단히 일본어 과목의 수업을 거부하며 일본말을 사용하는 동배를 배척하는 등으로 배일사상이 강렬했던 것이다.”(‘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박순천은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여선생을 골탕 먹이기 위해 교실 문 앞에 초를 칠해 놓거나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 울상을 만들어 놓는 등의 위험한 장난으로 반일감정을 표출한다.
   
   1917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박순천은 마산의 의신여학교에 부임하여 성경과 생물을 가르친다. 막 졸업하고 부임한, 학생보다 불과 몇 살 위의 여선생이 학생들을 지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순천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체벌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여 이들을 감동시킨다.
   
   “여학생들이 하도 말을 안 듣길래 하루는 회초리를 해오라고 일렀다. 학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회초리를 해왔다. 나는 내 옷소매를 걷고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내 팔을 힘껏 내리쳤다. 학생들은 ‘와’ 하며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내리치고 매가 부러지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더니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부터는 학생들이 내 말을 잘 듣게 되었고 또 서로 마음이 트이기 시작했다.”(‘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또 한국인 교사의 봉급이 일인 교사의 절반밖에 안되는 사실에 대해 학생들이 차별철폐운동에 나서 집단으로 등교를 거부했다. 이것이 일주일을 넘기자 박순천은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등교를 설득한다. 1919년 박순천은 거족적인 3·1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마침내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그러니까 2월 어느날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에게 남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어요. 그분은 나에게 동경유학생들이 앞서 일으켰던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거사계획을 설명해주고 협조를 당부한 후 ‘며칠 후 독립선언문을 내려보내 줄 테니 프린트해서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어요. 그분이 지정해준 날 저녁 7시, 옛 마산역에 나가 서 있으려니까 그가 말한 대로 키가 큰 의전학생이 개찰구로 걸어나오면서 모자에 손을 얹는 것이 보였습니다. 학교 뒷산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 뒤에 숨어가지고 그 학생이 등 뒤에서 꺼내준 독립선언문을 받았지요. 종이가 땀으로 젖어 있더군요.”(‘여류정치의 미 박순천’ 백성남)
   
   박순천을 찾아왔던 사람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청년대표로 참여한 이갑성이었다. 박순천은 중앙에서 밀파된 배동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달받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3·1운동에 직접 관여하며 마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박순천은 시위 도중 체포되나 한석진 목사, 이승규 장로 등의 신원보증으로 일주일 만에 풀려난다. 그러나 하숙방 천장에 숨겨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이 발각되어 지명수배되고, 도피 중에 열린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된다. 이는 여성이었던 박순천에게는 무거운 처벌이었다.
   
   박순천은 만세 거사에 참가했던 심정을 “그때 나는 잔다르크를 본뜨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일본 헌병들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저 칼에 내 목이 떨어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었다”(‘나의 이력서’)고 회고했다.
   
   일주일 만에 풀려난 박순천은 남장을 하고 칠원에 사는 최용구(의신학교 제자 최봉선의 오빠)의 집으로 몸을 숨기는데 동네에 ‘만세꾼’이 숨어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말에 당황한 최용구의 부인은 박순천을 가리켜 “전라도 순천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소박을 맞고 돌아온 동생”이라고 둘러댄다. 이때부터 ‘순천댁’이 명련(박순천의 본명)을 대신하는 ‘순천’이 이름이 되어버렸으며 호적상으로도 민주당 때 아예 정정한다.
   
   이후 박순천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여 이미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는 황신덕·한소제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요시오카(吉岡)의전에 입학한다. 그러나 첫 번째 유학은 부모가 송금한 봉투의 주소지 추적으로 탄로나게 되면서 마산으로 압송되어 1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형기를 마친 박순천은 1921년 다시 유학길에 오른다. 광복군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니카이도(二階堂)체육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중도 포기한다. 다시 일본여자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칠 무렵인 1925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태인관에서 항일운동의 동지이자 유학생인 변희용과 혼담이 있은 지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부부는 암울한 시대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시가가 있는 경북 고령으로 귀향해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박순천은 야학을 개설해 규모 있는 살림을 위해 가계부를 적어야 한다고 타이르고 글과 산술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13년을 지내다가 자녀 교육문제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1938년 서울로 이사한다. 박순천은 경성방직·금강전구 등의 여자직공감을 맡았다. 한편 황신덕·박승호 등과 학교설립을 추진, 1940년 10월에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고)을 개교하고 부교장의 직책을 맡는다. 당시 제자였던 박이순(86)씨의 회고이다.
   
▲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차남 변영호씨.
“저는 4기 졸업생으로 서대문 부근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배웠지요. 선생님은 다정다감하시면서도 리더십이 강해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지요. 평생을 자식처럼 위해 주셔서 저는 그분이 해주셨던 상복을 입고 임종도 지켜보았습니다.”
   
   일제 말 폐교의 위기를 면하기 위해 박순천은 ‘국방가정’ ‘전황뉴스를 듣고’라는 제목의 강연도 하여 광복 후 ‘일제협력’이란 빌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박순천은 정부수립 후 항일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인보가 지휘하는 감찰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다.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서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1948년에는 부인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5년간 언론활동을 한다. 소설가 임옥인·최태웅·이무영, 시인 모윤숙·구상 등 쟁쟁한 필진이 참여했다. 박순천이 신문사 사장으로 맛본 성취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상이 있는 애기’라는 소아과 상담란을 두고 육아문제도 다루었다. 오늘날의 신문들이 가정이나 여성, 또는 자녀문제를 많이 다루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부인신문의 편집이 한발 앞서가고 있었던 면도 엿보인다.… 그러나 처음부터 충분한 자본도 없이 시작한 신문사는 심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봉급을 제때 못 주는 것이 예삿일로 벌어지고, 두루마리의 신문용지를 가득 싣고 가는 다른 신문사의 트럭을 보면 훔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박순천은 절박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박순천은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갑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박순천은 6·25전쟁 때 서울에 남아 ‘대한의용군결사대’를 조직하나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부역자 명단에 오른다. 서울에 남았던 21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특히 선무방송에 동원되었던 3명에 대한 징계가 집중 논의됐다. 분개한 그는 발언을 신청해 이렇게 주장했다.
   
   “국민과 국가의 재산을 하룻밤 사이에 공산도당에게 넘겨주고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온 사람들이 시민들과 더불어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에게 용서할 사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구분하겠다 하니 차라리 방송한 3명뿐 아니라 21명을 모두 한꺼번에 징계하라.”(‘나의 이력서’)
   
   1951년 1·4후퇴로 부산에 내려온 자유당정권은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거리에서는 연일 ‘백골단’ ‘땃벌레’ 등의 테러단이 동원되는 등 살벌한 시위행렬이 이어졌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국회의원을 강제 동원하듯 몰아 넣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박순천은 이에 결연히 반대한다. 이어 발표된 ‘대한부인회 회원은 모두 자유당에 입당하라’는 대통령의 담화에 반기를 들고 이승만 노선을 떠난다.
   
   박순천은 야당의원들의 모임인 호국동지회에 합류하여 1955년 9월의 민주당 창당대회에서 당고문과 중앙위 부의장으로 선임되며 이듬해 조병옥·장면 등과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한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 장면 총리는 박순천에게 문교장관으로 입각하라고 요청하나 끝내 사양한다. 그는 민주당 신파에 속했지만 신파나 구파가 아니라 민주당파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한다.
   
   5·16군사정변을 맞아 허탈해진 박순천은 정치규제가 풀리자 민주당 재건에 앞장선다. 1963년 초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박순천은 서울 무교동 네거리에 있던 한 사무실에서 구 민주당 간부이던 홍익표와 나란히 서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이 무너진 뒤 2년 반이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처음 맞는 기자회견이었다. 기자들은 “국민이 준 정권도 유지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와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렸다. 박순천이 답한다.
   
   “그렇습니다. 민주당은 죄인이요, 저는 상주올시다. 우리가 잘못해서 국민들이 피로써 세워준 정권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다른 야당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름을 갈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3년 전에 도둑맞은 그 간판을 걸고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것입니다. 우리 민주당이 정말 잘못했으면 매를 때릴 것이요,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한번 싸워보라 한다면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싸워나갈 것입니다.”(‘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부록)
   
   1964년 박순천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된다. 그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최고위원이 되는데 여성이 제1야당의 당수가 되기는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때는 당소속의원들의 사퇴서를 의장에게 제출하면서 반대의사를 관철시키려 힘쓴다. 항상 정곡을 찌르는 말로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나 결코 남성화되지 않은 단정하고 다감한 여성이었다.
   박순천은 1983년 1월 9일 서울 화곡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부군 일파와 함께 서울 수유리 4·19혁명 유공자 묘역에 합장돼 있다.
   
   박순천은 일파와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광호(작고·전 삼신기공업 대표)씨는 최미성(작고)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광호씨의 장남 선업(58·사업)씨는 전진영(56)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선민(55·포철연구소 근무)씨는 이문수(54)씨와 결혼했다. 광호씨의 장녀는 선희(56)씨이고, 차녀 선주(52)씨는 박우상(54·건축업)씨와 결혼했다.
   
   박순천의 차남 영호(74·재미사업가)씨는 이화영(72)씨와 결혼하여 장남 선국(41)씨와 장녀 선아(46), 차녀 선영씨를 두었다. 박순천의 3남 준호(작고·전 서울전자 사장)씨는 이길연(70)씨와 결혼하여 장남 선욱(47·한라위니아 감독), 차남 선용(47·전주 증산초교 아이스하키 감독), 3남 선흥(44·사업), 4남 선진(42·재미사업가)씨를 두었다. 박순천의 장녀 금호(작고·전 근명여고 재단이사장)씨는 손창익(작고·주택공사 근무)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손승재(66·현대건설 근무)씨는 사공명옥(66·전 근명여중 교장)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손인재(63·재미사업)씨는 지영숙(57)씨와, 장녀 숙재(60)씨는 송영직(61)씨와 결혼했다. 박순천의 차녀 은호씨는 이광직(작고·외과의사)씨와 결혼하였으며, 3녀 인호(재미)씨는 장태진(작고·전 UCSD대학 교수)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해암 박순천
   
   최종순 웅진홀딩스 전무·인재개발원장
   
   고교시절(김해여고)에 선생님으로부터 ‘너희들은 커서 박순천 여사 같은 인물이 돼라’는 가르침을 받을 때부터 줄곧 그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2007년 ‘박순천 연구’로 박사학위(국민대 대학원)를 받았다. 해암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의 투쟁성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덕성, 특히 공평무사한 공정성이 주는 카리스마와 적극적인 당내활동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다. 당내의 신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본인은 당파를 부인하고, 당파의 이해보다는 대의의 실현을 위해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해소에 앞장섰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당파의 이익보다도 민주적인 당과 국가를 중시하는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해암 선생은 목적가치로서의 민주주의와 행동양식가치로서의 민주주의를 동시에 구현하는, 절차민주주의에도 투철한 의회민주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