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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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운(洌雲) 장지영은 일제식민통치하 물산장려운동과 3·1만세운동을 선도한 애국지사이다. 그는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문자보급운동에 앞장섰고, 국어학자로 일제말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2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열운이란 아호는 ‘열수=한강(漢江) 위에 뜬 구름’이란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

장지영은 1887년 4월 22일 서울 서대문구 교남동 132번지에서 장은상과 영해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집에서 한문을 배운다. “나는 매우 완고하고 한학을 숭상하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교육을 받은 것은 순전히 유교사상과 한문학뿐이었다. 이것이 내 생각이나 성격과도 맞아서 어려서부터 남에게 고루하다는 평을 들었다.”(‘내가 걸어온 길’ 월간중앙 1973년 3월호)

장지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당시 민충정공의 유서까지 직접 확인해 그 내용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자기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우리나라로서 지금 역신들이 있어 왜족에게 국권을 넘겼으니 우리 국민은 앞으로 모든 종족이 환난 속에서 있게 될 것이다. 내 힘으로 뒤집어 회복할 수 없어 먼저 가니 국민을 자강자립하여 국권을 회복하라.”

민충정공이 자결하자 조정과 백성이 발칵 뒤집혀서 야단이었다. 장례는 시민장이나 다름없이 모든 시민들에 의하여 치러졌다. 장지영도 그들 속에 있었다. “상여를 청진동에서 모셔나가는데 상행을 보호하기 위하여 앞뒤로 무명줄을 매어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붙잡고 갔다. 종로로부터 서소문으로 나가는데 나도 집불(執拂)하는 사람 중에 끼었다.… 상여를 모시고 가던 사람 모두가 통곡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전엔 완고하고 중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두터웠는데, 그것이 변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역사적으로 남의 종노릇밖에 못하느냐?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냐? 오늘날 이 지경을 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도 자주독립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팽배하여졌다.”(‘나라사랑’ 제29집 1978년)

주시경 문하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 재학생이던 장지영은 자주독립의식을 다져간다. 이듬해(1906년) 졸업한 장지영은 그 학교의 부교관으로 있다가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이는 상동예배당을 드나들며 독립의지를 다져간다. 상동예배당은 지금의 서울 남대문시장 새로나백화점 자리에 있었으며, ‘상동(尙洞)’이란 상정승이 살았다는 유래가 있는 동네이다. 감리교회인 상동예배당은 전덕기 목사가 주관하던 곳으로, 이회영·이상재·이갑·이준·안창호·김구 등 애국지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장지영은 상동예배당 사랑방에서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주시경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국어를 전공한다.

“내가 주시경 선생을 뵈었을 때는 그가 문법체계를 완성하고 여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강습소를 차리고 국어학도를 양성하였는데, 내가 중학과정을 다시 거칠 수도 없어 1911년 8월까지 그의 사제에서 3년 동안 다니면서 국어를 전공하였다.”(‘나라사랑’)

주시경 문하에서 국어학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장지영은 근대 신학문인 과학에의 지적 향상을 위하여, 이일씨(도쿄 물리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귀국)가 설립한 창동 정리사(精理舍) 전문학교에 입학(1908년)하여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1911년)한다.

상동 청년학원의 하기국어강습소는 1907년에 제1회 졸업생 25명을, 이듬해 제2회 졸업생을 낸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준이 상동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왕래하였다 하여 상동교회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 1907년 7월 15일에는 청년학원 강습소를 박동 보성학교로 옮겼다. 이때 주시경은 소장이 되고, 장지영은 강사가 된다. 이즈음 장지영은 이상재·현준·유일선·이동녕 등 선배 어른들의 청에 따라서,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선생으로 간다. 당시 오산은 민족정신 교육이 투철한 학교인지라, 왜경은 불온한 학교라 하여 폐쇄시킬 목적으로 이승훈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따라서 주인 없는 오산이 문을 닫아야 할 때(1911년 7월) 장지영이 오게 된 것이다.

비밀결사대 ‘흰얼모’ 조직

그러나 장지영이 온 얼마 후, 이승훈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를 꾸몄다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학교 문을 닫게 되니, 장지영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오산을 떠난다. 장지영은 다시 상동교회 청년학원의 국어와 수학 교사가 된다. 하지만 왜경의 탄압이 날로 심하여 선배 동지들이 만주·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하게 됨에 따라 장지영은 남궁억을 원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학감이 된다. 장지영은 김윤경·윤복영 등과 함께 근무하다가, 1914년 8월 학원이 폐쇄되면서 이곳을 떠나게 된다. 이보다 한 달 앞서 주시경이 갑자기 별세한다. 그는 바쁜 몸을 쪼개어 여러 학교에서 국어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장지영은 다음과 같이 스승을 추억하였다.

“주 선생 혼자서 도맡아 가르치던 국어교육을… 제자인 우리들이 나눠 맡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의 교장(휘문학교 임경재, 중앙학교 최두선, 보성학교 이규방, 배재학당 신흥우, 경신학교 미국 선교사 쿤즈)을 찾아 상의하니, 이를 반겨 쾌락하였다. 그리하여 김두봉은 휘문, 권덕규는 중앙, 신명균은 보성, 그리고 나는 경신에 나가게 되어, 국어교육은 정상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내가 걸어온 길’)

한편 장지영은 청년학원 교사 시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자활운동에 자극을 받아, 유진태·임경재·김덕창 등 동지와 함께 경제 자립과 문화 독립을 위하여 1912년에 물산장려회를 만든다. 그리고 간디를 본받아 직접 무명옷을 짜입기로 하고, 고양·통진·김포 등지로 다니며 목화를 모아서 시골 부인들에게 목화실을 뽑게 하고, 이를 덕창직물공장에 가져가 옷감을 짜게 한다. 장지영은 물산장려운동에 더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한다. 이듬해 장지영은 이수삼·백남일·조규수·김정섭·정범진·노대규·이원행·오의선·홍덕규·김용철 등과 혈서동맹을 하여 비밀결사대인 ‘흰얼모’를 조직한다. 그 활동을 상하이 임정과 연계하기 위해 ‘흰얼모’ 이름을 백영사(白英社)라 하여, 해외 독립운동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한다.

독립선언 불 지펴

흰얼모 동지들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전 민족의 운동이 되도록 하자는 결의를 다지고, 고종 황제가 왜인의 책동과 매국노의 손에 피살되었음을 백일하에 폭로함으로써 온 국민의 의분을 격동시키기로 하였다. 장지영은 조규수·김정섭·신경우·노대규 등과 장지영의 자택인 중림동 132번지에 모여,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이던 조규수로 하여금 포고문을 짓도록 합의한다. 다음은 그 포고문의 내용이다.

“우리가 문화라든가 역사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데, 웬 억지손에 의하여 간악한 일국에 눌려 국권을 잃어버리니 이럴 수가 있느냐? 세계의 대의에서도 그냥 볼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데, 거기에 특사를 보내려고 하니까 먼저 고종 황제를 없앨 양으로 독약을 바쳤는데, 거기 앞장선 놈이 윤덕영이고, 그 독약 심부름을 한 놈이 한창수로, 식혜에다 독약을 타서 드렸다.”(‘내가 걸어온 길’)

고종 승하 경위에 대하여 장지영은 일본 총독 하세가와의 사주를 받은 윤덕영 일당이 저지른 것으로 확신한다. 당시 내시이던 이병정이 눈물을 흘리며 장지영에게 전한 이야기다.

장지영 일행이 만든 포고문은 ‘대한국민회’의 포고문이라 하고, 2000장을 등사하여 그날 밤중에 남대문~을지로~동대문 방면, 서소문~종로~동대문 방면, 서대문 일대에 붙이고 여관에도 투입한다. 이들은 이튿날, 민족대표 33인이 주동한 독립선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온 민족이 봉기하도록 불을 질렀고 또한 각 지방으로 빠르게 파급하도록 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셈이다.

3·1운동 이후 경신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던 장지영은 1921년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한다. 발기인은 장지영과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최두선(중앙학교 교장), 이규방(보성학교 교두), 이승규(보성학교 교사), 신명균(보성학교 교사) 등 7명이었다. 초대 간사장은 임경재가 맡고, 장지영은 최두선과 함께 간사를 맡는다. 장지영은 1926년에 제2대 간사장이 된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에 조선어학회로 바뀌고, 1949년 9월 5일에 한글학회로 바뀐다.

교사에서 조선일보 기자로

장지영은 1926년 4월 12년간 근무하던 경신학교를 그만두고, 거기에 실직한 권덕규를 가게 한다. 장지영은 중앙학교로 가나 경신에서 권덕규를 받지 아니하여 장지영은 친구 의리를 생각하여 중앙을 그만두고 1926년 10월에 조선일보 기자가 된다.

“중앙의 최두선 교장의 권유로 다시 중앙으로 갔으나 교직생활이 너무 평범하고 갑갑하여서 그만두고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조선일보사의 사장은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고, 부사장은 나와 가까운 신석우씨였다. 처음에는 견습기자로 교정부에 있었는데 하루는 신석우씨가 말하였다. ‘교정부에 있는 것이 창피하지 않아?’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얼마 후 나를 지방부장으로 올려놓고는 신문 제호 밑에 신석우로, 편집인은 나로 바꾸어 놓았다.(1928년 9월~1929년 11월) 그런데 때가 때인 만큼 편집인 행세가 도무지 수월치가 않았다. 당시 왜놈들에게 붙어 날뛰던 각 지방의 도평의원이니 시협의원이니 하는 사람들의 행패가 심하여서 그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면 곧 경찰서에서 잡아갔다.”(‘나라사랑’ 제29집)

장지영은 편집인으로 재직하는 동안 종로경찰서 사찰계와 검찰국을 제 집 드나들 듯하다가 ‘전과 4범’이 된다. 장지영은 입사 직후인 1927년 2월 발족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에 이상재·신석우·한기악 등과 함께 발기인 27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그는 문자보급운동을 펼치면서도 지방부장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해, 지면에 ‘신간회 고정란’을 두고 본부와 지부 사이의 활동상황을 자세히 보도한다.

1929년 7월 조선일보가 시작한 문자보급운동은 장지영이 편집인으로서 직접 주도한 운동이었다. 그는 이해 신년호에 ‘새해에는 우리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는 글을 실어 문자보급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 아래 3년간 이 운동의 총책으로 지면과 강연을 통해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1931년에는 문자보급운동을 주도하는, 신설된 문화부 부장이 된다.

“직접 가르치는 일은 학생들이 맡고, 나는 그들을 동원하여 파견하는 일, 현지에 나가 그 학생들을 지도하고 독려하는 일, 시·도 등에는 강습소를 설치하는 일 등을 맡아 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에 우리나라 전국에 안 간 곳이 없이 다니게 되었으며, 글을 깨쳐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된 사람이 30여만 명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내가 걸어온 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갖은 고초

1930년에는 ‘한글 철자법 강좌’를 55회에 걸쳐 장기 연재하기도 한다. 문자보급운동은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남녀 학생들이 농촌의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자는 운동으로 일제시대 최대의 민중계몽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2000만 인구 중 1700만이 문맹이었다.

“1929년부터 3년간 실시된 문자보급운동은 임경래에게 판권이 넘어간 1932년과 1933년 두 해 중단됐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후인 1934년 재개됐으나 이듬해 총독부의 압력으로 다시 중단됐다. 동아일보는 1931년 ‘브 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란 이름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문자보급운동에 학생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934년 6월 29일 서울 공회당에서 열린 ‘동원식’에는 92개 중학교와 32개 전문학교 및 일본 유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5078명이 참가했다. 이때 준비한 문자보급 교재는 100만부였다. 당시 조선일보 부수가 3만8000부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1932년 평양숭실중학 학생이던 14세의 장준하(사상계사 사장 역임)는 이 운동을 펼치던 조선·동아 양대 민간지에 대해 ‘온 겨레를 지도하고 있는 존재’ ‘캄캄한 우리 조국을 비춰 주던 유일한 등불’(‘민족의 자유와 언론’)이라고 표현했다.

장지영은 1931년 조선일보를 그만둔 뒤 양정중학에서 국어와 중국어를 가르친다.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국어학 운동을 주도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다. 함남 홍원경찰서에서 함께 고초를 겪은 일석 이희승의 증언이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열운도 이런 악형을 몇 번이고 당하였다. 그러나 나는 열운만이 당하는 기막힌 꼴을 보았다. 때는 1943년 양력 1월, 엄동설한으로 가장 추운 때였다.… 우리 동지 일행을 문초하는 무덕전이란 넓은 방에서 다른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운데, 열운은 실오리 하나 걸친 것이 없이 발가벗겨서 팔 다리 네 공상으로 엎드리게 하고, 주전자에 담은 얼음 같은 냉수를 머리에서부터 등허리를 통하여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물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몇 번 거듭하면 사람은 별 수 없이 동태 모양으로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까지 곁들이는 실로 야만적인 폭행이었다.”(‘나라사랑’ 제29집)

4남이 아버지 유고 보완 ‘이두사전’ 펴내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4남 세경씨.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4남 세경씨.

장지영은 광복 후에 연희대 이화여대 교수를 지내며 국어연구에 헌신하다가 1976년 3월 15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 가족묘지에 안장된다. 4남 세경(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씨가 부친의 뒤를 이어 국어학을 연구하면서, 부친의 유고를 보완해 1976년 부친과 공저인 ‘이두사전’을 냈다. 손자 경현(서울대 교수)씨도 국어학을 전공해 3대째 국어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장지영은 지명희(작고·배화여고 졸업)와 사이에 4남2녀를 두었다. 장남 세헌(88·경성대 졸업, 미국 유타대 이학박사, 서울대 교수 역임)씨는 정현식(작고·경성여의전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세헌씨의 장남 직현(61·서울대 수학과 졸업, 미네소타대 박사)씨는 서강대 교수로 이행우(60·이화여대 가정과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태현(58·서울대 화학과 졸업, 위스콘신대 박사)씨는 포항공대 교수로 김신조(59·서울대 국사학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세헌씨의 장녀 백경(64·서울대 가정교육과 졸업, 서울대 박사)씨는 윤승렬(작고·서울대 공대 졸업, 유타대 공학박사, 한양대 교수 역임)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숙경(55·연세대 도서관학과 졸업)씨는 김원곤(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장지영의 차남 세희(작고·서울대 화학과 졸업, 텍사스대 이학박사, 서울대 교수 역임)씨는 김옥(81·서울대 화학교육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아들 택현(54·서울대 화학과 졸업)씨와 화경(56·성심여대 졸업), 진경(47·숙명여대 졸업)씨 자매를 두었다. 장지영의 3남 세원(작고·연세대 상경대 졸업)씨는 송정자(74)씨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장남 재현(50·한양대 공대 졸업)씨는 이용희(48·연세대 아동교육과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방현(47·고려대 전기과 졸업)씨는 이재희(47·성신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장지영의 4남 세경(79·연세대 국문과 졸업, 동국대 박사, 한양대 명예교수)씨는 이숙영(73·이화여대 가정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상현(47·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 박사)씨는 건국대 교수로 임성실(42·고려대 법대 졸업, 서울동부지법판사)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경현(43·서울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 박사)씨는 서울대 교수로 이경희(38·한국교원대 졸업, 초등학교 교사)씨와 결혼했고, 장녀 효경(48·서울대 미대 졸업)씨는 화가로 활동 중이다. 장지영의 장녀 영록(작고)씨는 이석주(작고)씨와 결혼하여 우상·우형·우중·우강·선경씨 등 4남1녀를 두었다. 장지영의 차녀 영호(73·이화여대 가정과 졸업)씨는 정주영(79·서울대 기계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상진·사원씨 자매를 두었다.

내가 본 열운 장지영

문제안 전 수도여사대 교수

나는 1932년 손기정 선수와 한 반으로 양정고보에 다닐 무렵 열운 선생에게 국어를 배웠다. 광채가 나는 눈매며, 꼭 다무신 입매며, 다부지면서도 다재다능하신 분이었다. 언제나 조용히 조리있게 말씀하시는 것이 선생님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규모있게 해라’ ‘질서있게 해라’를 입버릇처럼 되새기셔서 우리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옷매무새부터 단정하셨고, 머리 한 올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다. 이처럼 단정하고 근엄하시면서도 정말 시대에 앞장서 가시는 탁 트이신 지적인 멋쟁이셨다. 뿐더러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당시 폐병으로 고생하는 제자 여러 명에게 손수 약방문을 써 주셔서 구제하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실로 신(新)과 구(舊)를 겸하신 분이었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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