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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名家 <현대편>]  (44) 홍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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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183호] 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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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名家 <현대편>](44) 홍종인

‘대기자 홍박’ 독도 상륙작전 ‘한국령’ 깃발 꽂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photo 홍순구
홍종인(洪鍾仁)은 한국 언론계에서 ‘대기자 홍박’으로 통해온 언론인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주필, 동화통신 회장을 지낸 그는 일찍이 정부 수립 후 한국산악회장으로 산악대원들을 이끌고 독도에 상륙하여 ‘한국령’ 표지판을 각인한 행동파 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이다. 헌칠한 키에 잘생긴 용모에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발기하고, 박물관협회장을 지냈는가 하면, 논설과 취재, 사회면에서 문화면에 이르기까지 어느 분야에도 출중한 만능기자여서 독립신문 이래 손꼽히는 한국의 대표기자로 추앙받는다.
   
   “훤하게 트인 이마, 드골 코보다 더 멋있는 반듯한 코, 호랑이 눈썹, 용의 눈망울, 복스러운 귀, 두툼한 입술, 부드러운 머리, 당당한 풍채, 어느 것 하나 버릴 데 없는 호연지기(浩然之氣)상에다 청천백일(靑天白日)의 곽호조명의 심정마저 텔레파시를 통한 장부지상(丈夫之像)에서 무한한 기자로서의 자긍심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강승훈 전 대한일보 편집부국장)
   
   홍종인은 정년퇴직 후에도 한국의 어느 신문사건 무상출입하면서 사장에서 일선기자에 이르기까지 혹은 쓴소리로 혹은 격려의 말로 명실상부한 원로 역을 했다. 까탈스러운 개성분자들이 백화제방하는 언론계에서 이처럼 누구나 알아주는 ‘어른’으로 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마도 꾸준한 박학다식을 다져온 독서열과, 상대를 배려하고 아끼는 신사도(紳士道)의 실현과 청렴결백을 솔선수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수립 후 전국의 대학, 고교에서 학교당 10명씩 해양산악훈련단을 조직해 국토를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면서 독도지키기 순찰행을 하셨지요. 저는 당시 보성고교 산악반원으로 운 좋게 따라 가게 되었지요. 그후 우리가 명륜동집에 살 때 명절이면 갈비짝에 사과상자 등 각종 선물들이 마당에 그득히 쌓이곤 했는데, 당시 신문사 간부 시절인데 선친께서는 퇴근해 보시고서는 빨리 돌려주라고 불호령이셨지요. 신문사 운전사들이 밤늦게까지 역배달하느라 고생들 했지요. 아무리 바쁘셔도 후배기자들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면 꼭 서주셨고 사례를 하려 하면 박봉에 무슨 돈이 있느냐고 야단쳐 돌려보내시며 박봉에 글이나 열심히 쓰라고 격려하셨지요.”(3남 순구씨)
   
   홍종인은 1903년 11월 27일 평양시 수옥리에서 홍재문(洪在雯)과 곡산 강(康)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인격 형성과 성장 과정에서는 모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교훈과 가정의 배경, 특히 어머님의 엄하신 채찍 밑에 위태로운 청춘이면서도 줄곧 한 길을 찾고 나갈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인간의 자유와 존엄’, 수도문화사, 1965년)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동맹휴학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 당하자 1920년 가을 정주 오산학교로 전학한다. 당시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3·1운동 민족대표의 주역으로 옥중에 있었으며 교장은 조만식이었다. 홍종인이 오산학교에 다닌 기간은 불과 반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장 조만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분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방학에 돌아올 때면 부산에서 봇짐을 풀어 한복으로 갈아 입고 갓을 쓰고 평양으로 오셨다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한복을 입고 아침마다 조회시간에 훌륭한 강연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곤 했습니다. 그 영향을 우리는 많이 받았습니다.”(KBS ‘인간만세’ 홍종인, 1987년 11월 1일)
   
   함석헌도 같은 때에 오산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홍종인보다 2살 위였다. 홍종인은 1921년에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사립학교에서 잠시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각기병에 걸려 심장이 붓는 증세가 나타나 평양으로 돌아온다. 다시 그는 약 2년간 소학교 교사 일을 하다가 1926년 6월에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 평양지국 기자가 된다. 시대일보는 그 전해 3월 31일에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이었다.
   
   “참신한 지면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경영난으로 최남선이 손을 떼고 1925년 4월 초부터는 소설가이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홍명희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편집국장 한기악을 기용하는 등 새로운 진용을 구성하였다. 홍종인이 시대일보 평양지국 기자가 된 것은 시대일보가 새로운 진용을 갖추고 출발하던 무렵이었다.”(정진석 ‘대기자 홍박’)
   
   신문기자 생활은 홍종인의 적성에 잘 맞았다. 기자가 된 후에 쓴 기사가 시대일보에 크게 실린 것을 보고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평양 근교에 살던 미국인 의사가 동네 아이의 얼굴에 초산으로 ‘도적’이라는 글자를 쓴 사건을 취재했을 때였다.
   
   “거기서 어떤 여자가 나와서 통역을 해요. ‘사람을, 인종을 모욕하는 것 아니냐, 어째서 사람의 얼굴에다 도적이라고 쓸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는데, 그 기사를 자세히 문답 형식으로 해서 그 사람 하는 말대로 논박하는 기사를 써서 보냈더니 그것이 커다랗게 시대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아, 내 손으로 쓴 그 기사를 보니까… 내게는 어떻게 그렇게 장하게 보였는지. 그 기사를 보고 여러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잘했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미국 사람들 신세를 지는데 너무 욕하게 되면 일본 사람들 편을 드는 꼴이 되니 그러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하는 말들도 들어봤습니다.”(KBS ‘인간만세’)
   
   시대일보는 홍종인이 입사 후 경영난으로 인해 이듬해 11월 이상협에게 인수되었고, 제호가 중외일보(中外日報)로 바뀐다. 그는 이즈음 평양에서 ‘백치(白雉)’라는 동인지를 발행한다. 홍종인은 한수철 등과 만든 이 동인지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으며 제2집까지 냈다.
   
   중외일보 본사로 올라온 홍종인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1930년 1월에는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2000여명이 벌인 조선 최대의 파업 현장을 취재한다. 3월에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서울로 호송된 여운형의 예심 종결에 관한 호외를 밤새워 만들어 발행하는 기민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여운형의 재판에는 방청권을 얻기 위해 그 전날 저녁부터 수백 명이 법원 문전에 몰려와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의 3파전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는데, 중외일보의 사세가 가장 약했으므로 홍종인은 특종을 빼내기 위해 쓰레기더미를 뒤져서 법원에서 작성한 예심결정서 프린트 등사 원지를 찾아내는 극성까지 부렸다. 그러나 중외일보는 재정이 파탄 상태였다. 급료를 받지 못한 공무국 직원들이 태업을 벌여 신문발행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홍종인은 일찍부터 계획하고 있던 호외를 시기를 놓치지 않고 발행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재정 상태가 가장 열악한 중외일보에 근무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런 상황인데도 홍종인이 호외발행을 강행한 것은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비중도 컸지만 공개하지 못했던 중대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겠다는 사명감에 불탔기 때문이었다.”(‘대기자 홍박’)
   
   그러나 홍종인이 심혈을 기울인 이 호외는 검열에 걸려 압수당하고 만다. 중외일보는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여 폐간되고 홍종인은 약 2개월 후인 1930년 12월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재홍 주필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사회부 기자로 발탁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일보도 경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1932년 6월부터 임경래와 안재홍 간에 경영권을 둘러싼 판권경쟁이 표면화되어 사원회가 조직되는데 홍종인은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그 실행위원 9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된다.
   
   조선일보는 1933년 3월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재정 상태가 안정되었고, 홍종인은 1935년에 사회부 차장으로 승진하여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전하는 호외발행을 진두지휘한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제작과정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주관해 예술적 소양을 발휘한다.
   
   이해에 홍종인은 일본 무사시노 음대 피아노과 출신의 유수만과 결혼한다. 유수만의 제자로는 신재덕씨(오재경 전 문공부 장관 부인) 등이 있다.
   
   “어머니는 대학 시절 밤 1~2시까지 불 꺼진 강당에서 피아노 연습에 열중하시느라 수위들이 소리를 질러도 대답이 없으니 귀신이 아니냐고 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외조부는 만석꾼 거부여서 성북동 지금의 간송박물관 옆에 99칸짜리 집이 있었지요.”(3남 순구씨)
   
   1937년 9월 19일에는 중일전쟁의 전선에 특파되어 10월 26일에 돌아오는데 함께 갔던 매일신보 유광렬 기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홍종인은 아주 활동적이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다. 트럭을 타고 일선을 향할 때도 그가 나서서 교섭하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좁은 틈이나마 한 자리 얻어 타려고 눈치만 보곤 하는데 그는 일본 군인들에게 호통도 잘 쳤다. 이 때문에 나도 덕을 많이 보았다.”(‘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 시절 홍종인은 ‘홍박’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린다. “그때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어 삼남 일대의 수해가 전국적인 대사건으로 보도되며 일기예보가 매일같이 특별기사로 보도되었다. 데스크도 보고 밖으로도 드나들면서 이따금 일기예보 기사를 읽어보면 엉망인 것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무어냐’고 모두 뜯어고치다 보니 어느 누구도 일기예보 기사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놀려대느라고 천기박사라고 했던 것 같다. 그후 사회부 한구석에서 붙여진 박사호의 별명이 버젓이 사내에서 통하며 사회에서도 통하는가 하면 나중엔 ‘홍박사’라기가 귀찮다고 ‘홍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애칭 ‘홍박’을 즐기는 심경, 월간중앙 1971년 9월)
   
   홍종인은 이 별명을 좋아했다. ‘명예박사’라는 것도 사방으로 운동하고 간청해서 받는다는데, 자신은 대학의 심사도, 정부의 인가 절차도 없이 친구들이 좋아서 불러주는 박사이니 별호로서는 이 이상 자연스럽고 명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홍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음악·미술·문학·등산·테니스 등 다방면에 걸쳐 취미를 가지고 글도 썼다.
   1938년에는 사회부장으로 승진한다. 조선일보가 1940년 폐간된 후 홍종인은 매일신보에 들어간다. 신문기자를 천직으로 알았던 그가 활동할 수 있는 무대는 그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그것이 씁쓸한 흔적이었다.
   
▲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3남 순구씨.
“내 기자 생활 중 매신(매일신보)만 빼면…. 그땐 세 신문사(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를 합치니 뭐니 말이 있어서 옮겼지만…. 다 망해가는 놈의 나라, 망국의 마지막 꼴을 신문사에서 지켜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조선일보 사람들’)
   
   1945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홍종인은 사회부장으로 복귀한다. 이듬해 8월부터 1947년 5월까지는 정경부장을 맡으며 편집국장을 겸한다.
   
   1946년 8월 3일 사회민주당 결당식이 열렸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이끈 좌익 성향의 군소정당이었다. 조선일보 편집국에서는 이 기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아예 묵살하자는 주장도 강했으나 홍종인이 말한다.
   
   “저 사람들은 제 의사가 표시되지 않으면 다음에 할 일은 폭력밖에 없다. 정치에도 타협과 조화가 있을 것 아니냐. 저들에게 숨 쉴 곳을 터주어야 한다.”
   
   이 기사는 다음날 조선일보 1면에 실렸다. 언론이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때였다. 우익적 주장을 하면 좌익에서 공격하고, 좌익 성향을 보이면 우익에서 비난했다. 중도적 입장을 취하면 회색분자로 몰아세웠다. 홍종인은 공산당은 용납할 수 없다며 민족적 입장을 지켰으나 지면에서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홍종인은 1946년 9월 편집국장이 된다. 좌익노조의 총파업으로 서울에서 단 한 장의 신문도 발행되지 않았던 ‘암흑의 날’(9월 26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날 이건혁의 후임으로 편집국장이 된다.
   
   홍종인은 1947년 곽복산이 개원한 신문학원의 연습주임도 맡아 오소백 등 유수한 언론 후진을 키운다. 이 학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문기자를 양성한 유일한 언론인 교육기관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1959년 9월까지 10여년간 주필로 있으면서, 같은 기간 1952년 4월부터 1958년 11월까지는 부사장을 겸하며, 1959년 9월부터 1963년 5월까지 취체역(取締役·주식회사 이사를 이르던 옛말) 회장을 맡는다.
   
   홍종인은 주필 시절 한글로만 사설을 썼다. 광복 후 ‘마음 놓고 우리말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감격이었다. 서재필 박사가 독립신문을 만들 때의 한글 쓰기 정신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에다 취미도 등산·테니스·미술·사진·음악 등 다양했다. 특히 음악평론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홍종인은 “나는 중학교(오산학교)까지밖에 못 다녔다. 신문사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해 왔을 뿐…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더욱 분발했다.
   
   1951년 제1차 한·일회담 취재차 일본 도쿄를 방문한 홍종인은 신문사 특파원들에게 “손색없는 한국특파원으로서 활동하는 데 보태쓰라”고 격려금을 주기도 했다. 비행기 대신 기차와 배를 타면서 아낀 돈이었다.
   
   1954년 광복 후 첫 수습기자가 들어왔을 때 홍종인은 그들에게 영어학원비를 지원해 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회사 사정이 월급 주기도 어려운 때였다.
   
   홍종인은 기자의 품위와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편집국에 나타나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기자들은 화장실, 복도 등으로 피신했다. 머리가 덥수룩한 기자를 보면 돈을 주어 이발소로 보냈다.
   
   1960년대 출입처 기자실에는 종종 포커판이 벌어졌다. 어느날 현장을 덮친 홍종인이 “손들어!”라고 외쳤다. 양손을 번쩍 든 사람, 손을 든 채 카드를 뒤로 던지는 사람, 판돈을 움켜쥔 사람 등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촌지를 받아 노름판을 벌여서는 사회를 계도하는 언론인이 될 수 없다는 뼈저린 부끄러움을 깨우친 것이다. 홍종인은 1963년 회장을 끝으로 조선일보를 떠난다.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 때 홍종인은 개인 이름으로 10만원을 내고 자신의 주장을 담은 ‘언론 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의견광고를 실었다. 언론계 어른으로서 유신정권의 서슬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후배들에게 보인 것이었다. 그때부터 동아일보에 개인 이름의 광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유신정권이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려 하자 그는 언론탄압책이라며 명함 크기의 반대 전단을 만들어 일일이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조선일보 사람들’)
   
   홍종인은 1998년 6월 10일 서울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하며 한국신문편집인협회장으로 경기도 용인 공원묘원에 안장된다. 유수만과의 사이에 3남3녀를 남겼다.
   
   “맏형님(순경)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음식점을 운영하시면서 우리 이민가족을 돕는 코리아센터를 운영해 오시고 둘째 형님(순국)도 미국에서 사업을 하시고 순명, 순조, 순정 3자매가 있습니다.”(3남 순구씨)


   
내가 본 홍종인
   
   홍순일 전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
   
   내가 홍종인 선생을 찾게 된 것은 신문기자로서라기보다 산악회 일 때문이었다. 1954년 한국산악회장이 된 홍박은 자신의 조선일보 주필실을 산악회 본부로 삼고 있어 나는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후일 그의 취미가 도자기 굽기로 번졌고, 그림 솜씨가 뛰어나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연하장은 당신이 그린 스케치를 인쇄하여 돌렸었다. 홍박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바닥에서 유화를 그리는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한 나로서는 지금도 몹시 부럽다. 1956년 여름,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했던 학생 해양산악훈련단에는 나도 보도요원으로 참여했다. 동해의 고도인 울릉도와 더구나 독도에 1947년부터 여러 번에 걸쳐 민속·방언·생물·지세·측량 등 각 분야의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단장으로 활약한 홍박은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막연하게 또 감상적으로 ‘독도는 우리땅’만을 외치는 오늘날 풍토를 그는 50년 앞서 ‘우리 땅’으로 굳히기 위한 기초작업을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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