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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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강(海崗) 김수근(金壽根)은 광복 후 연탄을 대량 보급하여 연료혁명에 앞장선 에너지 전문 기업인이다. 장작 대신 연탄을 땔감으로 쓰게 하여, 헐벗은 민둥산에 겨워하던 전국의 산야를 짙푸른 녹지로 변모시킨 산림녹화의 기수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연탄사업으로 출발해 석유, 도시가스, 산업가스, 해외유전개발, 열병합발전 등 에너지 사업을 일념으로 입지한 에너지맨이다. 정경유착의 유혹을 물리치고 한 우물만 판 그를 전경련은 ‘한국 기업인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신 분’이라고 기리고 있다. 그의 아호는 ‘바닷속에 잠겨있는 산등성(崗)’이란 뜻이다.

우리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게 짧은 기간 동안 이처럼 녹화사업에 성공한 것은 정부의 산림보호정책과 맞물려 연탄산업이 주도한 에너지혁명 덕택이었다. 광복 전에 주로 국내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연탄은 광복 후 잠시 사용이 중단됐다가 이승만 정부가 산림보호정책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하면서 6·25전쟁을 전후해 점차 소비가 늘어난다. 광복 후 해강은 최초로 민족자본에 의한 연탄공장을 세운다. 그는 1947년 5월 ‘연료대책이 시급하고 더 이상 산림이 황폐화하는 것을 두고볼 수 없다’는 결단으로 연탄 판매 및 제조업체인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한다. 그를 포함한 직원 2명에 작업인부 10명의 작은 업소였다. 대구 칠성동 한 모퉁이 제재소 땅 165㎡(약 50평)를 얻어 수동식 기계를 설치하고 하루 수백 장의 연탄을 찍어 판매했다. 가루석탄을 구멍 뚫린 형틀에 넣어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해강은 1916년 8월 28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320번지에서 김두윤(金斗潤)과 기묘임(奇妙任)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남 의근(義根)씨와 삼남 문근(文根)씨는 대성에너지그룹을 떠받치는 3형제 버팀목 역할을 한다.

10세 때 소년가장 신세

해강의 수안(遂安) 김씨 집안은 신라 경순왕의 4남인 대안군(大安君)의 차남 김숙승이 시조이다. 고려 때 명재상이며 맹장이었던 김방경(여·원 연합함대를 이끌고 일본정벌에 나섰음)이 중시조이다. 조선조 말 해강의 증조부 상훈(尙塤)은 열심히 일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들에 나가 쇠똥을 주워 모아 거름을 만들었다. 수중에 들어온 것은 쓰지 않고 모으니 재산이 불어났다. 조부대에 이르러서는 만석꾼이라는 부자 소리를 듣게 됐다. 해강의 외가는 유명한 유학자 집안이다. 퇴계 이황과 이기(理氣) 논쟁으로 유명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숙부 가운데 기준(奇遵)이란 분이 있었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영남학파의 거두 정암 조광조와 정치적 노선을 함께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한다. 행주 기(奇)씨 중 고봉과 일부는 그 통에 전라도로 피신한다. 뒷날 정유재란 때 전라도에 있던 고봉의 차남이 고령에 와서 정착한다. 해강의 모친이 바로 그곳 소생이다.

어린 시절 해강은 조부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던 해강의 행복은 10세 전에 끝난다. 6세 때 조부를 잃은 데 이어 부친마저 10세 때 작고한다. 대구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가족은 모친과 누나, 3년 터울의 남동생 둘뿐. 그는 졸지에 다섯 식구를 책임지는 소년가장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없는 집안 형편은 급속히 어려워 갔다. 월사금조차 거르게 됐다. 담임 선생님이 50원을 쥐어 주며 격려를 했고, 해강은 마음의 평정을 찾아 이를 악물고 밤새워 열심히 공부한다. 학교 성적은 줄곧 수석이어서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한다.

1929년 해강은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한다. 바로 전해에 첫 졸업생(52명)을 낸 이 학교는 금융기관, 철도, 전매청 등 당시로서는 일류 직장에 졸업생을 전원 취업시켜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구상업에 입학한 해강은 당장 학비 조달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는 삯바느질하는 모친 몰래 신문배달에 나선다. 하루 세 차례씩 20~30리길을 달려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당시에는 신문이 조·석간으로 나오는 데다 학교수업 또한 엄격히 진행되어서 아르바이트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새벽 4시30분 조간 배달, 오후 석간 배달, 밤 11시 내일 아침 신문 수령’이란 꽉 짜여진 일정표가 너무 과중했다. 연속되는 잠 부족과 중노동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전박대 일본인 회사 매일 찾아가

용하게도 3년을 버텨왔으나 그의 초췌한 몰골과 떨어지는 성적을 보고 모친은 휴학을 시킨다. 1년쯤 지나 건강을 회복한 해강은 17세 때 삼국석탄공사 대구지사에 외판사원으로 입사한다. 처음에 그는 이 회사를 찾았으나 문전박대를 당한다.

“조센징은 안돼! 여긴 일본인 회사란 말이다.”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첫날은 쫓겨나다시피 했다. 날이 밝자 그는 다시 갔다. 또 쫓겨났다. 이런 일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회사에서도 그는 이미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요시(좋아)! 이리와 앉게! 공끼(근기·根氣)가 있는 친구로군!”

냉랭하기만 하던 지사장이 드디어 해강을 임시직원으로 채용해 외판업무를 담당하도록 허락한다. 그를 돌려보내면서 지사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놈은 가죽고리(쇠심줄)다. 우리 회사를 위해서도 필요한 아이다.”

그가 뒷날 회사를 창업하고 국내 기업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벌일 때에도 ‘가죽고리’로 불리는 그의 끈기는 상대방을 물리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해강이 자전거로 실어나르는 석탄은 일본·중국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각 가정에서 난방용이나 목욕물을 데우는 연료로 쓰였다. 전량 스토브에 사용되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자전거로 달렸던지 자기 집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 회사간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얼마 안돼 서무·경리 등 사무까지 맡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지사장은 소학교 6학년이 된 아들을 불러내 해강에게 배우게 하고, 해강을 가정교사로 채용한다.

그는 낮에는 외판 업무에 나서 거래선을 구축하고 밤에는 경리가 해야 할 서류정리까지 맡아 끝내곤 했다. 어떤 때는 밤을 새우기도 하고 사무실 한 귀퉁이에 꼬부라져 새우잠을 자는 모습이 출근자들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지독한 친구다” “가죽고리 같은 친구다”. 지사장은 혀를 차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에 대한 신임도는 더 높아졌다. 입사 1년 미만의 햇병아리가 어느덧 경리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밤잠을 자는 일도 잦았다. 아침 출근길에 그 모습을 본 지사장은 “쉿” 하며 다른 직원들이 수근의 잠을 깨우지 못하도록 조심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사장은 상여금이 든 봉투를 해금에게 주었다. 봉투가 너무 얇아 액수가 얼마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와서 그대로 어머니께 드렸다. 그런데 그것은 1000원짜리 수표 두 장이었다. 당시 봉급이 500원 정도이던 때라 그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이튿날 지사장에게 그 돈을 다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돈은 틀림없는 그의 상여금이었다. 다만 그 액수가 다른 사람보다 3배쯤 많은 특별 능력급이었다.

입시·입사시험 수석 도맡아

그의 성실성이나 능력은 이미 대구 시내 업계에서도 소문이 나고 있었다. 특히 경쟁업체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회유책까지 쓰고 있던 터라 상여금을 최고로 높여준 것이다. 거액의 보너스를 받은 해강의 얘기는 대구 시내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마침내 모친이 다니던 교회 교인의 딸 여귀옥과 1941년에 결혼한다. 장인 여용섭은 ‘하루 백 석을 한다’는 부자였다. 농토가 많았던 데다 정미소가 두 개 있었고, 집도 여덟 채나 되었다. 함양 여(呂)씨 경파(京派)로, 조선왕조 선조 때 성세(盛勢)를 누렸고, 건국 전후 독립운동가·정치가로 이름난 여운형이 일가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집안으로 훗날 아들과 조카들은 전자음악, 성악, 작곡 등에 이름을 남겼다.

1939년 해강은 일본대 법학과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 전국대학생 법률토론대회에 나가 3등을 차지한다. 조선 학생의 신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1등을 한 셈이었다. 이듬해 그는 도쿄니치니치신문(현 마이니치신문) 기자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경성지국으로 발령을 낸다고 해서 불응하고 곧이어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실시한 금융조합이사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한다. 194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주 금융조합 부이사로 근무한다.

광복 후 1946년 해강은 금융조합을 그만두고 대동석탄공사 이사로 취임한다. 소년 시절 근무한 삼국석탄의 경험을 살려 ‘대동’을 살리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이듬해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하며 1949년에는 연탄공장 한편에 흑판공장도 차린다. 그런데 이듬해 6·25전쟁이 나면서 바로 이 흑판공장이 효자 노릇을 했다. ‘대성’은 대기만성(大器晩成)에서 따온 것으로 항상 초심으로 완성을 향해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는 해강의 굳은 의지를 담고 있다.

“마침 학교들은 불타거나 군에 징발당한 판이라 흑판의 수요는 급증했다. 현찰을 받고 파는 장사였는데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대성산업공사의 초기 정착단계에서 흑판이 차지한 자금의 비중은 이처럼 대단했던 것이다.”(‘가보니 길이 있더라’ 해강 김수근 일대기)

해강은 1952년 조선연료공업을 인수하여 연탄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회사는 당시 최신 장비인 전동식 장비를 갖추고 있어 하루 수천 장씩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했다. 바로 이 시기부터 연탄의 대량생산-유통-소비시대가 펼쳐진다.

폭력배들과 술잔 나누며 탄광 개발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장남 영대씨.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장남 영대씨.

1950년대 우리나라 산림의 임목 축적률은 정보당 10㎡ 안팎으로 40% 가까이가 헐벗은 민둥산이었다. 전쟁의 포화에 산이 깎이고 집집마다 땔감으로 벌목하고, 낙엽과 잔가지까지 박박 긁어가는 바람에 온산이 벌겋거나 군데군데 볼썽사납게 패어나간 꼴이었다. 바로 이런 시절 정부는 치산계획을 세우면서 연탄 생산 및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1951년 정부는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을 공포하고 처음으로 산림녹화 의지를 표명했다. 1958년에는 전국 20개 도시의 장작아궁이 폐쇄령을 내리고 임산연료의 도시 반입을 아예 금지시켰다. 주요 산들에 대해 입산금지령을 내리는 한편 낙엽 채취마저 엄금했다. 여기에 연탄생산 및 보급을 가속화한다는 방침도 포함됐다.

대구에서 자리를 잡은 해강은 서울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1956년 서울에 올라온 그는 동대문구 마장동 제재소 터였던 3300㎡(1000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공장을 건설하고 서울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 이어 고교 시절 그가 첫 직장으로 몸담았던 삼국석탄공사의 제1공장으로 전쟁 중 폐허가 된 왕십리 연탄공장을 인수한다.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공장을 재건하고 연탄생산을 정상궤도에 진입시킨다.

1960년에는 문경탄광을 인수해 탄광개발에 직접 나선다. 그러나 문경탄광은 적자에 허덕이는 문제투성이였다. 당장 채탄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여서 실의에 빠진 광부들이 음주, 도박, 싸움을 하느라 말썽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현지에 머무르며 현장 근로자, 폭력배들과 술잔을 나누고 조직을 추스르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숙제였다.

국토 600분의 1 임야 소유

“사장님은 술이 굉장히 센 분이었습니다. 직원들을 그룹별로 데리고 나가 술을 사시는데… 당신 스스로도 정종 한 되는 거뜬히 잡수셨지요. 주석이 있을 때마다 그랬습니다. 장군풍의 체격과 인상에다 구변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사장님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모두들 쉽게 한 덩어리가 되었지요.”(윤한욱 전 대성광업 사장)

그후 문경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월 연탄 2000만개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분량으로 대구·부산·서울·광주 등 전국으로 운반되었다. 그 대신 안동·영양·봉화 등지에서 채취된 나무가 하루 2만5000재씩 갱도의 버팀목으로 사용됐다.

“92만개의 갱목 무더기는 완전한 산 높이였는데 30년간 사용한 갱목의 양은 천문학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요. 그분은 갱목을 위해 조림을 계획했고… 그 결과 산들을 구입하게 된 겁니다. 당시 국가의 정책이 조림을 전제로 벌채를 허가한 것도 있었고요.”(윤한욱)

나무를 베어내고는 그 자리에 어린 나무를 심는 일이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기간에 해강은 우리 국토의 600분의 1에 해당하는 임야를 소유하게 된다. 유명한 문경의 주흘산도 조림 용지 확보 차원에서 이때 구입한 것이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가 강력한 산림녹화 정책을 펴 장작의 연료사용을 금지하면서 서울의 경우 전체 가구의 90%가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게 된다. 이런 추세 속에 노란 상표의 대성연탄은 곧 전국적으로 퍼져 연탄의 상징으로 연상될 정도였다.

한편 해강은 연탄가스 사망사고가 빈번하자 전국 최초로 회사 내에 전담 연구소를 설립하고 가스발견탄을 개발하여 보급하기도 한다. 그는 에너지산업이 곧 경제개발을 일구는 젖줄임을 깨닫고 호남정유와 제휴한 대성산업(석유 판매), 서울도시가스, 대구도시가스와 대성산소 등을 설립하여 명실상부한 한국 굴지의 에너지 전문 그룹으로 키워 재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한번 인연은 평생 간다

해강은 2001년 2월 20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영락동산에 안장된다. 해강은 여귀옥과 사이에 3남3녀를 남겼다. 장남 영대(69·서울대 법대, 서울대경영대학원 석사)씨는 대성 회장으로, 2011년 10월에 서울 영등포구 신림동에 디큐브시티를 완공했다. 대지 33만여㎡(약 10만평)의 옛 대성연탄 공장 부지에 건립된 종합매머드건축물로 디큐브백화점을 비롯하여 디큐브아트센터, 쉐라톤호텔, 뽀로로파크, 테마식당가, 디큐브오피스, 디큐브파크 등이 함께 어우러진 야심작이다.

“연탄 저탄장으로 찌들었던 곳에 최첨단 뮤직홀이 들어서고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도 생겨났으니 선친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선친께서는 한번 인연을 맺으시면 끝까지 가셔, 지금 저와 함께 근무하는 전성희 비서실장은 이사대우를 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최장수 비서(30년 근속)라는 기록도 갖고 있지요. 한국비서협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 참으로 유능하고 성실한 분이지요.”(김영대 회장)

영대씨는 차정현(62·서울대 음대 졸업, 피아노 전공, 한옥지킴이 회원)씨와 결혼하여 3남을 두었다. 장남 정한(39·런던대 MBA)씨는 대성산업 부사장으로 전성은(38·예일대 음대 석사, 동덕여대 교수)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인한(38·고려대 정치외교과 졸업, 버지니아주립대 정치학 박사)씨는 이내리(34·고려대 정치외교과 졸업)씨와 결혼했고, 삼남 신한(36·미시간대 컴퓨터공학 석사)씨는 대성산업 전무로 한조희(30·경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해강의 차남 영민(66·서울대 사학과 졸업)씨는 서울도시가스 회장으로 민영옥(56·서울대 성악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은혜(31)·요한(29)·종한(22) 3자녀를 두었다. 해강의 3남 영훈(59·서울대 법대 졸업,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석사)씨는 대성그룹 회장으로 김정윤(43)씨와 결혼하여 의한(17)·은진(14)·의진(11)·은정 4자녀를 두었다.

해강의 장녀 영주(63·서울대 회화과 졸업, 미 클랜부르크대 대 석사)씨는 모나코왕실 주최 국제현대미술전에 입선한 화가로 신현정(66·알파/베타/감마서비스 사장)씨와 결혼하였으며, 신정희(36·연세대 법과 대학원 재학)·신명철(34·인디애나주립대 졸업) 남매를 두었다. 해강의 차녀 정주(62·이화여대 졸업)씨는 대성홀딩스 사장이며, 해강의 3녀 성주(55·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런던대 대학원 국제협력관계 전공, 미 앰허스트대 명예인문학 박사)씨는 성주그룹 회장으로 디자인사업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내가 본 해강 김수근

김성수 한국에너지법연구소장

나는 1995년에 해강 김수근 회장님께서 에너지 기술 도입선인 쉬럼버저 독일기업과 국제협상을 돕는 과정에서 그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대성그룹의 창업자이신 해강 선생님의 장남인 김영대 현 회장과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이기도 해서 부자분과 함께 법률문제를 협의하게 된 것이다. 해강 선생님은 헌칠한 체격에 온화한 표정으로 마치 아들에게 이야기하듯이 대성그룹을 일궈오신 과정을 자상하게 들려주셨다. 일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금융조합에 근무하면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해왔으나 광복 후 경제정책에 관여했던 가까운 선배가 “한국에 에너지산업이 시급하니 그 부분에 힘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해서, 사업 방향을 굳혔다고 하셨다. 해강 선생은 그후 연탄사업으로 산림녹화에 힘썼으며, 주유종탄(主油從炭)을 내세운 에너지정책에 따라 해외유전개발사업에 나섰으며, 도시가스사업, 그리고 전력사업으로 확장해 오신 한국 에너지업계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선친의 사업을 계승한 김영대 회장 역시 풍력사업 등 대체에너지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에너지산업계의 기린아로 떠오르고 있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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