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철웅
ⓒphoto 이철웅

이휘소(李輝昭)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천재 물리학자이다. 그는 새로 전개되는 소립자 물리학 이론의 선두에 선 물리학자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올랐던 과학자였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1977년 42세로 요절했으나 그가 제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와인버그-살람(1979년)과 트후프트, 벨트만(1999년), 그로스·웰첵·폴리처(2004년) 등이 노벨상을 받게 했다. 1974년 이휘소는 참 쿼크(Charm quark)와 관련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참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장들의 성질을 규명했고, 그해 11월 제이·프사이 입자를 발견한 리히터와 팅이 역시 1976년 노벨상을 받게 했다.

이휘소가 별세한 뒤 게이지 이론은 표준이론이 되어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 설명하는 맥스웰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휘소는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리학자로 꼽힌다. 또 그는 이론 물리학자이지만 실험물리학에도 비범함을 나타내 ‘참 입자의 탐색’과 같은 그의 현상론적 논문은 실험물리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된다.

그는 한때 한국의 핵개발을 추진한 베스트셀러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이휘소 열풍’을 몰고 와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그를 소재로 다룬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400만부 이상 팔린 수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미국에 유학하여 핵물리학으로 입지하여 세계적 물리학자가 된 주인공이 박정희 대통령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한국에 핵무기를 개발하려다가, 미국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뜻밖의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영화화될 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나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 필자가 친족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형님은 그분의 학문적 업적이나 철학과는 무관하게, 우리나라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알려져 있어요.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마치 형님께서 이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부각되고,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암살했을 가능성이 사고 당시 언론에 제기되기도 했지요. 그후 1989년에 ‘핵 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이 출판되어 이를 기정사실화 하였으며…. 1993년에는 형님을 소재로 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형님의 이미지는 더욱 더 왜곡되었지요. 비록 픽션이라고 하지만 뼈대는 사실이라면서, 주인공으로 가명을 썼지만 이휘소의 작품명이라는 등 그럴 듯하게 꾸며댄 것이지요.”(동생 이철웅씨)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핵무기 개발은 이휘소가 전공한 소립자 물리 이론과는 사실상 전혀 무관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 초기단계에서는 과학적 데이터가 중요하였으므로 핵물리학자들이 참여했으나 이들은 이미 공개된 과학정보이고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핵연료 농축 등 제작공정과 관련된 기술이므로 그와는 더욱 무관한 것이다.

이휘소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1935년 1월 1일 부부의사인 이봉춘(李逢春)과 박순희(朴順姬)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성격이 모두 온화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뤘으며 부친이 한때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제지간으로 모친을 만나 나이 차는 9살이나 되었으나 낭만적인 결혼을 이룬 셈이다. 이런 부부 사이여서 부친은 늘 근엄한 편이었고 모친은 매우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생활 면에서는 오히려 반대였다. 부친은 말수가 적으면서 자신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선비형인 데 비해 모친은 차분한 성격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부친은 원래 물리학 지망생이었으나 결혼 후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환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개업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휘소의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그의 부친을 조용히 독서에 몰입하는 ‘왠지 어려워 보이는 아버지’로 떠올린다. 이휘소의 경기중학 동창인 허용이 기억하는 이봉춘의 모습이다.

“우리 고모부가 춘원 이광수인데, 휘소 아버님을 보면 꼭 고모부를 보는 것 같았어요. 길게 말하는 법이 없는 데다 항상 책에 파묻혀 있어 얼굴조차 자세히 보기 힘들었지요. 그리고 늘 집에만 계셔서 나는 무슨 글 쓰는 분인 줄 알았지 의사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이휘소 평전’ 강주상)

반면 모친은 수시로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곡을 불러주기도 하는 등 집안에 낙천적인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휘소가 태어날 당시 모친은 원효로의 자혜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병원 뒤에 딸린 한옥 사택에서 살았다.

이휘소는 1941년에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그는 급우들과 서로 놀리고 장난치면서도 독서에 몰두했다. 동네 친구 집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 보았다. 그 집에는 전집류를 포함한 온갖 어린이 책들, 특히 과학책들이 많았다. 이휘소가 가장 심취한 책은 월간잡지 ‘어린이 과학’이었다. 화성에 인간이 산다는 공상과학소설부터 독일 전투기가 급강하·급상승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군사과학 정보까지, 잡지를 모두 샅샅이 읽었다.

“문학류로는 일본 아동문고, 소학생 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과 ‘괴도 루팡’ ‘셜록 홈스’ 같은 탐정소설을 즐겼다. 아직 어린 나이기에 만화책도 물론 좋아했다. 하지만 어른스럽게 논어, 노자, 불경 등 동양서를 읽기도 했다.”(‘이휘소 평전’)

운동 쪽으로는 별 관심도 소질도 없는 듯했다. 동생 철웅은 운동신경이 둔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탁구를 치다 보면 공이 탁구대 아래로 굴러 들어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면 대개는 공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에 잽싸게 들어가 꺼내오거나 손만 뻗어서 탁구채로 밀어버리거나 하는데, 형은 그런 동작 하나도 얼마나 굼떴는지 몰라요. 무조건 밑으로 들어가서는 엉금엉금 기다가 한참 만에야 공을 주워 올라오곤 했지요.”

이휘소는 1947년 경기중학에 2등으로 입학한다. 그와 중학동창인 허용은 ‘국가대표 공부선수’라고 평했다. 중학교 때 화학반이었던 이휘소의 신화가 전해진다.

“당시 화학반에는 화학 선생을 능가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4년 선배 한 사람이 있었다. 자부심 강하고 엄격하기 그지없던 그 선배도 휘소만큼은 인정할 정도였다. 실험 실습시간에 화학 선생이 그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면 선배는 다시 이휘소를 불러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선생보다 더 어려운 선배였지만, 이휘소는 그 선배와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주장을 펼치며 토론을 벌이곤 했다.”(‘이휘소 평전’)

그의 집 2층 공부방 한쪽에는 화학실험을 위한 조그만 기구와 유리그릇들이 가득 진열된 작은 실험실이 있었다. 예체능만 빼고는 모든 과목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 상급반으로 올라가면서 그의 학구열은 더욱 높아졌다. 집에서나 전차 안에서나 늘 책을 놓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항상 책을 들고 계셨지만 평소 별로 어렵게 공부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이면서도 성적이 뛰어났지요. 타고난 재질이셨던 것 같아요. 밖에서 책을 읽을 때도 양지 바른 곳에 쪼그려 앉아 무엇인가 끄적거리며 책을 읽곤 하셨지요. 중학생 때 이미 주위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지요.”(철웅씨)

6·25전쟁 후 1·4후퇴 때 이휘소 가족은 부친의 고향인 공주를 거쳐 마산으로 피란간다. 모친은 이곳에서도 며칠 만에 바로 병원을 열었다. 부친도 인근의 창원보건소장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취업 1년쯤 지난 1951년 12월 어느날 밤 귀가 중에 개울 둑에서 실족하여 사망했다. 이즈음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내려와 이휘소는 이곳으로 통학하기 시작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세 시간 넘게 기차통학해 컴컴한 밤에야 귀가해서 혼자 늦은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고등학교 2년 과정을 마친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52년에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수석 입학한다.

이휘소는 공대 3학년 때 물리·화학을 가르치는 전완영 교수와 함께 화공과 교과목에도 없는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의 물리학자가 쓴 양자역학 원서를 읽다가 계산이 이상한 문제를 발견한다. 몇 번이나 계산하고 논리 관계를 따져본 결과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한다. 전 교수에게 책을 보여주며 자기 생각을 말하자 그도 동감이라고 했다. 이휘소는 독후감과 함께 자신이 발견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적어 저자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편지를 보낸다. 얼마 후 저자로부터 답장이 왔다.

“당신의 지적이 맞습니다. 내 책에 관심을 가져주고 오류까지 찾아주어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기 바랍니다.”(‘이휘소 평전’)

이휘소는 너무 기뻐 그 답장을 학우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한다. 그는 아예 물리학과로 전과하려 하나 물리학과는 문리과대학에 속해 있어 전과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얼마 후 좋은 기회가 찾아 온다.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가 후원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유학생 선발에 응시할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문교부의 공문이 온 것이다. 최우수학생인 그는 당연히 시험에 합격했다. 유학갈 학교는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이었다. 1956년에 입학할 당시 이 학교의 한국 유학생은 10명 정도로 그중에는 서울대 화공과 동기인 정의명과 나중에 현대자동차 사장을 지낸 정세영도 있었다.

차를 타고 통학할 필요가 없는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이휘소의 유학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7시10분에 식사를 하면 8시에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과목마다 숙제가 엄청나게 많아서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에서 숙제를 마치고 기숙사로 오면 자정을 넘기 일쑤였다.

형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생 철웅씨.
형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생 철웅씨.

이휘소는 미식축구를 구경하고 흠뻑 매료되기도 한다. 응원단 규모가 퍽 화려하면서도 엄격한 규칙에 따라 열정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미국의 투혼을 보는 듯했다. 그 느낌이 어찌나 강했던지 꿈에 나타날 정도였다.

마이애미대학에서 마지막 학기에 이휘소는 물리학 외에 현대대수학 강의를 들었다. 수학에 능한 그도 이 강의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한 달도 안 되어 20여명이었던 학생이 절반으로 줄었다. 두 달쯤 지나자 이휘소 혼자만 남았다. 학기 시험에서 현대대수학을 포함한 세 과목 모두 A를 받았다. 드디어 모든 교수들이 이휘소의 실력을 알게 되었다. 유학온 지 1년 반 만에 최고 우등으로 졸업한다.

1958년 피츠버그대학원에 입학한다. 입학허가와 함께 교육조교 장학금 통지를 받는다. 수업료가 모두 면제되고 생활비까지 지급되는 장학금이었다. 이 무렵 여름방학 중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요사이는 밤에 자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과거 수년과 똑같은지,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꿋꿋이 싸워오신 그리고 아직도 싸우시는 어머님의 거룩한 모습은 저로서는 자랑이요, 힘의 근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하던, 그리고 알려고 해본 일이 없던 사실 하나를 안 것 같습니다. 즉 여성의 힘, 심리 그리고 도덕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어머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재건이야말로,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시기이다’라고 이 책에는 씌어 있습니다.”

이휘소는 고도의 직관력이 필요한 복잡한 수리해석과, 그것을 명쾌하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해내는 능력을 지녔다. 그런 정밀한 서술력이 돋보여 석사논문으로는 드물게 물리학과에서 외부 계약연구로 발행하는 연구 보고 논문집에 게재해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정된다. 이 논문은 현재의 수준에서도 훌륭한 석사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휘소의 전공인 소립자(素粒子) 물리학이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알갱이인 소립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들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것이다.

이휘소는 1960년에 펜실베이니아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61년에는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원 연구회원으로 활동한다. 고등연구원은 순수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해와 타계할 때까지 몸담았던 연구소로 유명하다. 괴델, 오펜하이머, 파노프스키, 폰 노이만, 바일 등 거장의 학자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이휘소는 한국인으로는 고등연구원 자연과학부의 첫 번째 연구위원이 된 것이다. 연구원들 사이에서 이휘소는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통했다.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앉아 생긴 별명이었다. 오펜하이머도 이휘소를 좋아했다. 늘 한발 앞서가며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하는 그와의 대화는 오펜하이머에게도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휘소는 이듬해 말레이시아 출신의 동갑내기 중국인 심만청(沈蔓菁)과 결혼한다. 그녀는 머크사연구소의 세균학자로 여자의과대학 입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교수로 근무하면서 이휘소는 ‘물리평론’ ‘물리평론 속보’ 등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거의 매달 새로운 글을 발표한다. 발표하는 글마다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휘소는 1년에 절반 이상은 학교를 떠나 지냈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물리학회를 비롯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 초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학자들이 대거 모이는 학회 등에서도 이휘소는 늘 토론의 중심에 있었다. 물리학계의 중요한 현안 과제 대부분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꿰고 있던 그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연구의 영감을 얻으려 했다.”(‘이휘소 평전’)

이후 구겐하임재단 연구회원, 브룩헤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물리자문위원,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 부장 등 요직을 역임한다. 이휘소는 1969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고에너지 물리학회에서 처음으로 분과장을 맡는다. 분과장은 세미나 과정 전반을 주도하며 학회에서 발표되는 이론들을 통합하여 정리해 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여서 세계 정상급 학자들만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교수를 겸임했던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페르미연구소 연구심의회 참석을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별세하며 미국 글렌엘런 자택 부근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영결식에서 윌슨 페리미 연구소장은 “이휘소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매우 창의적인 이론물리학자로서, 근대의 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한다면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인물입니다. 현재 펼쳐지는 물리학의 황금기는 이휘소가 큰 공헌을 하였고, 우리는 이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라고 애도했다.

이휘소는 심만청과 사이에 천(泉)과 연(蓮) 남매를 두었다. 이휘소의 동생 철웅(71·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씨가 인산산업 대표이며, 누이동생 영자(74)씨는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형수님과 조카들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요. 형수님이 외국 분이니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자주 내왕하지는 못하지요. 조카 천(제프리)은 고고학이 전공이고, 우리집 막내동생 무언(작고)이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지요.”(철웅씨)

내가 본 이휘소

이훈택 전 한국엔지니어링클럽 사무총장

나는 이휘소 박사와 중·고교와 대학생활을 함께한 동문이다. 이 박사는 재학 중 학년당 5명에 불과하던 우등생으로 수석을 다투었고, 서울대 공대에는 수석으로 입학했다.

이 박사의 영문 이름 벤자민은 미국 독립 초기에 활약한 ‘양키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대 공대 재학 당시 학생들 사이에 프랭클린 자서전이 큰 인기였다.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05년 이 박사를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다. 장영실을 포함한 역대 한국 과학자 19명이 선정되었던 영광스러운 반열이다.

이 박사는 도미 후 20년 만인 1974년 9월 일시 귀국한 일이 있다. 그때 대학시절의 친구 몇 명과 북창동에서 저녁을 함께한 일이 있는데 학창시절과 다름없던 명랑활달한 모습은 아직껏 잊혀지지 않는다.

이 박사는 당시 서울대 과학교육 증진을 위한 AID차관사업을 적극 추진하였고 1978년 일본 도쿄에서의 고에너지 국제학술회의 직후 세계 석학들을 한국에 초청하는 중요한 학술회의를 추진 중에 비운의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국보급의 세계적 과학자를 순식간에 잃었으니 국가적 손실이요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