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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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藜堂) 김재원(金載元)은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25년간 재직하면서 국립박물관의 기틀을 잡았다. 그는 6·25전쟁 중에 중요문화재를 고스란히 피란시켜 전란 속에서 국보를 지켜낸 공로자로 칭송받고 있다. 한국 최초로 미국과 유럽에서 국보해외전시회를 열어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린 문화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아호 여당은 “검소한 생활을 뜻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두현 교수는 풀이했다. 김재원은 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도 평생 골동품 수집을 멀리해 후학들에게 솔선수범했다.

김재원은 미술사·고고학 분야에서 인재양성에도 힘써 김원룡 교수를 비롯하여 안휘준·정영화·이난영 등의 제자들을 미국·프랑스 등지로 유학보내 전문가로 키우기도 했다. 자신의 두 딸도 미술사 공부를 시켜 장녀 리나씨는 미국 하버드대 박사에 한국미술사학회 회장과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셋째딸 영나씨는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서양미술사학회 회장·서울대 박물관장을 지내고 2011년 2월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했다. 김영나씨는 척박했던 초창기의 한국 박물관의 기초를 다진 부친의 맥을 이어 21세기형 국립중앙박물관의 위상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외롭고 우울한 어린 시절

김재원은 1909년 2월 22일(음력) 함남 함주군 주지면 흥상리 207번지에서 전주 김씨 김학호(金鶴鎬)와 전주 이씨 이헌준(李獻俊)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경(地境)이라는 곳이다. 함흥에서 남쪽 국도로 30리를 가면 주이천이라는 내(川)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경이며, 그곳을 경계로 함흥군과 정평군이 갈린다. 지경에는 300호가량의 촌락이 있었다. 닷새에 한 번 장이 섰는데 동쪽 약 20여리에 있는 연포라는 어촌에서 생선장사가 왔던 관계로 지경은 농산물이 풍부한 살기 좋은 곳이었다.”(‘박물관과 한평생’ 김재원)

지경은 이 지역에서 제일 처음으로 개화바람이 분 곳이기도 했다. 1905년경에 동네 유지들이 흥남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웠다. 김재원 집안은 지경에서 가장 유력한 유지였으므로 많은 돈을 기부하여 흥남학교를 후원하였다.

“우리 집안은 이 지방에서 ‘보포리집’이라 불리는 제일 큰 부잣집이었다. 그 재산은 주로 해사(海事)에서 연유하였다. 해사라는 것은 명태 어업을 말한다. 함경도 일대의 제일 큰 재원은 어업이고 그중에서도 명태잡이였다. 사업의 방법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어부들에게 장비와 양식을 선불하고 겨울에 명태가 잡히면 그것을 말려서 북어를 만드는 것이다.”(‘박물관과 한평생’)

어린 시절의 김재원은 외롭고 우울했다. 부친이 3살 때 작고한 데다 모친마저 8살에 재가하여, 어린 그는 조모 밑에서 자랐다. 김재원은 8살 때 흥남학교에 입학하며 14살 때 함흥고보에 입학한다. 그러나 장티푸스에 걸려 1년 유급한다.

“나는 다음해인 1926년 4월 함흥고보 5학년에 다시 입학하였다. 4년 동안 함께 공부하던 학우들은 모두 1년 먼저 졸업하였고 그중에는 좋은 상급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다. 어제까지의 하급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대단히 괴로웠다. 그러나 중학교 졸업장은 필요했기 때문에 1년을 더 다녔다. 그때 1년 늦은 괴로움은 상당히 컸던 모양으로 지금도 그때의 꿈을 꾸는 일이 있다.”(‘박물관과 한평생’)

이즈음 김재원은 동네 친척 형이 독일 유학을 다녀온 사실에 자극을 받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독일 부인도 데려왔다. 하지만 김재원은 그를 유학의 성공 모델로 삼기보다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대안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는 일본 유학을 하려던 생각을 독일행으로 바꾸기로 다짐한다.

독일 뮌헨대서 박사학위

1929년 6월 김재원은 시베리아횡단철도에 몸을 싣는다. 자기 몫의 토지 일부를 대부받아 마련한 유학비 500원을 가지고 떠난다. 그는 독일에 먼저 와 있던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의경의 도움을 받아 뮌헨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한다. 그 사이 가세가 기울어 그의 유학생활은 무척 곤궁해진다.

“방값을 제때에 내본 일이 없었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독일의 겨울은 춥고 길다. 그 춥고 기나긴 겨울밤, 나는 공복으로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데 15분마다 한 번씩 치는 종소리를 듣고 있다가 겨우 잠이 든다 해도 배가 고파서 곧 다시 깨어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잠깐씩 자다가 깨면 온몸에 땀까지 났다.”(‘박물관과 한평생’)

김재원은 1934년 철학부 교육학 및 고고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어 그는 벨기에로 가서 켄트국립대학 칼 헨첸 교수의 조수로 6년간 동양미술을 연구한다. 그곳에는 한·중·일의 고고학과 미술에 관한 중요한 책들이 거의 다 구비되어 있었다. 한국에 관한 것은 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도 있었으며 중국 미술에 관한 정리도 잘 되어 있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1940년 4월 독일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노르웨이까지 진격하였다. 김재원은 이즈음 조선일보에 기사를 보내는데 “홍종인씨(전 조선일보 주필·편집국장)가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보낸 기사에 못지않은 내용이라고 말했다”고 떠올리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조선일보에 글을 써 보냈는데 한번은 내 사진까지 실렸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된 데다가 인상도 졸장부같이 보여서 홍종인씨에게 새 사진을 보내면서 먼저 보낸 사진으로는 귀국 후 신붓감을 고르는 데 지장이 있으리라고 써 보냈더니 새 사진을 내어 주었다. 홍종인씨를 알게 된 것은 내가 1937년에 일시 귀국했을 때였다. 지식욕이 왕성했지만 그때까지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었던 그는 내가 서울에 올 때마다 나를 만났고 고국을 떠날 때면 가끔 기사를 써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료는 줄 수 없으나 대신 빠지지 않고 신문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켜주어서 나는 항상 조선 사정을 알고 지낼 수 있었다.”(‘박물관과 한평생’)

36세 때 박물관장 자리에

김재원은 1940년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된다. 당시 장덕수·유진오·손진태가 교수였다. 이듬해 4월 6일 김재원은 북청 출신의 변호사인 이정준(李楨準)의 딸 이채희(李彩熙)와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부근 천향각호텔에서 사모관대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신부는 도쿄여의전을 나온 의사였고 결혼식에는 김성수·유진오·옥경진 등 명사들이 참석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김재원은 일제의 항복방송을 듣고 곧장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찾아간다. 그는 박물관 현황부터 파악한 후 당시 학술원 산하에서 모든 학술기관을 접수 중이던 백남운을 만나 협의한다. 김재원은 백남운에게서 여비를 받아 우선 경주로 가서 일본인 박물관장과 협의한 후 최순봉씨를 후임으로 결정한다. 9월 7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문교 담당자 로키드 대령을 만난다.

“내가 벨기에에서 쓰던 ‘Ph.D. 김재원’이라는 명함을 보였더니 그는 크게 기뻐하고 ‘굿 맨’ ‘베리 굿 맨’이라고 좋은 사람을 발견한 것을 기뻐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명함을 내고 좀더 좋은 자리를 원하였더라면 영달도 속히 되고 수지도 맞는 자리를 차지하였을 것을 고작 박물관장 자리를 얻은 것이 큰 실수였다고 고소하는 일이 많다.”(‘경복궁 야화’ 김재원)

김재원은 1945년 9월 17일 정부수립 전에 미 군정청에 의해 박물관장으로 임명된다. 그때 ‘저명한 고고학자 김재원을 박물관장에 임명하였다’고 라디오에서 여러 차례 방송된다. 그의 나이 36세 때다.

“아버님은 1935년부터 6년간 벨기에에서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독일인 헨첸 교수의 연구조수로 생활하며 중국 고고학, 동양 미술사를 공부하셨습니다. 유학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떠나고 미국인들이 오니까 사람들이 겁을 냈지만, 아버님은 독일어도 유창하고, 영어도 잘하시니 겁을 안 내셨습니다. 별명이 불독이라고 들었는데, 그만큼 소신껏 밀어붙이는 것을 잘하셨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으로부터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박물관에 살다’ 장녀 리나씨)

개성박물관 문화재 서울로 옮겨와

김재원은 ‘박물관 초도순시’에 나선다. 부여에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인 관장 대신 홍사준을 관장으로 앉힌다. 공주에서는 공주고적현창회의 진열실을 관리하던 유시종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진열실을 박물관 분관으로 승격하여 분관장직을 맡긴다. 이어 일제 말 경주에 소개되었던 대형 금동반가사유상, 금관, 금제요대 등 가장 중요한 국보와 문양벽돌 등을 가지고 풍기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다.

“풍기에서 밤을 지내게 된 이유는 이곳에 나의 가까운 친척의 한 사람이 있었던 까닭도 있다. 피곤한 우리는 금관, 반가사유상 같은 우리나라의 최고 국보를 실은 우리 차를 지서에 가져다가 밤새 잘 보관하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의 각자의 애국심은 대단하여 이것이 우리나라의 국보라는 말 한마디로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차에 손을 댄 사람이 없었다.”(‘경복궁 야화’)

김재원은 1946년 봄, 미 군정과 교섭하여 경주 호우총을 발굴한다. 호우총은 신라시대 무덤으로 광복 후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유적 발굴이다. 발굴이 시작되자 이병도·송석하·조윤제·이숭녕 등 진단학회 회원들이 대거 경주로 몰려왔다. 당시 학계로서는 유례 드문 관심거리였던 때문이다.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니 박물관 업무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박물관에 근무하던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의 귀국을 지연시켜 박물관 업무를 인수인계하게 했고, 경주 호우총 발굴에도 같이 참가하게 했지요. 호우총을 발굴할 때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고고학자, 미술사학자가 거의 없을 때여서 아리미쓰 선생의 경험을 살려 광개토대왕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시대의 청동그릇인 ‘을묘년명청동호우’를 발굴했습니다.”(장녀 리나씨)

김재원은 이어 개성에 가서 새 분관장에 진홍섭씨를 임명한다. 이때 개성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그들의 간이병사를 만월대에 만들기 시작하자 시민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만월대를 파헤치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만월대는 옛 고려 궁전이 있던 자리로 개성 시민들이 큰 애착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김재원은 곧 미군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별 반응이 없자 때마침 내한한 하버드대학의 유명한 위너 교수와 볼스 박사를 움직인다. 동양문화와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곧 지프를 몰아 만월대에 가서 상호간의 몰이해에서 자칫 불행한 사태로 번질 뻔한 일을 선처해 준다. 김재원은 이듬해 38선 접경 부근에 있는 개성박물관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여 진홍섭 관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자기 등 귀중 진열품을 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온다. 그뒤 개성이 북한으로 넘어갔으니 김재원의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지연작전으로 위기 넘겨

6·25전쟁 중에도 김재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28 서울탈환 때 문화재를 수호한다.

“성북동에서는 전형필씨 댁에서 북한요원들의 감시하에 전씨의 수집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빨리 마칠수록 그들이 전씨의 물건까지 합쳐서 두 박물관의 수장품까지 북으로 가지고 갈 확률이 큰 것이다. 우리 측에서는 지연작전을 폈다. 고려자기를 포장하였다. 크기를 재지 않고 하였다고 하여 다시 풀었다가 쌌다. 또 고려자기를 싸는 데는 아무리 하여도 많은 종이를 써야 하고, 회화는 습기가 안 들도록 싸야 하고, 불상은 머리 부분이 약하다는 등등의 이유를 들어 3일간에 겨우 5개의 포장을 마쳤다.”(‘경복궁 야화’)

이렇게 지연작전을 하는 사이에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모두 팽개치고 북으로 도망쳤다. 국보 수호작전의 하이라이트는 38선을 넘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때였다. 김재원은 백낙준 문교부 장관에게 두 번 세 번 찾아가 박물관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피란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백 장관은 김재원에게 영문지침서를 써 준다. 비밀리에 작전수행을 위한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이듬해 김재원은 최순우를 다시 서울로 보내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서역유물도 가져온다.

“부친께서 전쟁 때 서역 벽화를 안전하게 부산으로 옮겼고, 나중에는 경주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하여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만주 지역의 철도 이권을 따기 위해 총독부에 준 것입니다. 그 일부는 일본에, 중국 다롄에도 있다고 합니다. 베를린 박물관에 있던 서역 벽화의 일부는 전시관 벽에 붙여 놓았는데 전쟁 중에 파괴되어, 우리가 가진 서역 벽화가 세계적인 유물이라는 것을 부친께서는 잘 알고 계셨지요.”(삼녀 영나씨)

김재원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국보 전시회를 열어 전쟁으로 찌든 한국의 이미지를 문화국가로 돋보이는 국위선양에 앞장선다.

“1957년 12월 15일부터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우리 국보의 해외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한국이 전쟁으로 피폐한 것만 떠올리는데 문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해서 전시 기획을 시작했어요. 그때 우리나라는 돈이 없으니까 미국이 부담하라고 해서 미국 해군함정으로 유물을 운반하고, 보험은 미국 8개 도시의 박물관이 조금씩 내고, 우리는 포장할 때 필요한 인력을 동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전시가 열렸습니다. 1957년부터 1958년까지 한 미국 전시가 첫 해외 전시였습니다. 1962년에는 유럽 몇 나라를 순회 전시했지요.”(장녀 리나씨)

한국고고학회 창립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셋째딸 영나씨.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셋째딸 영나씨.

김재원은 1968년에 하버드·옌칭학사 서울지부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취임하며 한국고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한다. 광복 후 진단학회 재건에 힘쓴 그는 ‘단군조선의 신연구’를 내 “단군신화가 삼국유사의 저자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란 주장을 근본적으로 깨뜨려버린 것”(이기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재원은 1990년 4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광주시 한남공원묘원에 안장된다. 김재원은 이채원과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아들 한집(61·텍사스대 A&M박사)씨는 아주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이정순(이태호 전 수출입은행장 딸)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한집씨의 아들 현창씨는 뉴욕 주립 의과대학원 시큐리스 캠퍼스에, 장녀 미겸씨는 드렉셀대학에, 차녀 현옥씨는 고교생이다. 김재원의 장녀 리나(69)씨는 이량(70·전 쿠웨이트 대사)씨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리나씨의 아들 이권씨는 부인 이언희씨와 부부 영화감독이다. 딸 이수진씨는 이준문씨(사업)와 결혼했다. 김재원의 차녀 신나(68·전 서울시립동부병원 소아과 과장)씨는 이호 전 법무부·내무부 장관의 아들인 이동(서울시 부시장, 서울시립대 총장 역임)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신나씨의 장남 이승씨는 미국 구글사 연구원이고 차남 이창씨는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이며 딸 이향씨는 건축가이다. 김재원의 3녀 영나(60)씨는 미국 뮬렌버그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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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여당 김재원

안휘준 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여당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대학 재학 중 군대를 다녀와 복학했던 1964년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국립박물관의 초대관장으로 계시면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출강하셨다. 수강학생들로 하여금 읽고 번역하게 하신 후에 보충설명을 해 주시곤 하였다. 강의 중에 화창한 날씨의 창밖을 자주 내다보시며 구수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학 고학년 때 어느날 선생님은 나를 덕수궁 박물관장실로 부르시더니 미술사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내 전공으로 잡아주셨다. 선생님 덕분으로 나는 우리나라 미술사 첫 유학생으로 하버드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 준비 중에는 영작 공부도 손수 시키고, 입학원서 작성 및 출국수속까지 적극 도와 주셨다. 선생님의 너그럽고 자상하신 배려가 없었다면 가난하고 능력 없는 필자가 무슨 재주로 등록금 비싸고 세계 제일이라는 명문대학에 유학하며 고급 학문인 미술사를 공부할 수 있었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학계를 넓게 조망하시고 고고학, 미술사, 국사 등 국학의 발전과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셨던 것으로 믿어진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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