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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9호]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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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조선 후기 노비 어떻게 안동 김씨 양반 되었나

서효정  인턴기자·고려대 3년 

▲ 유교적 신분질서가 무너지던 17~18세기, 노비가 양반으로 신분을 바꿨던 과정을 고려대 권내현 교수가 추적했다. 사진은 전통 양반 가옥. photo 조선일보 DB
조선 신분사회가 붕괴되던 17~18세기, 노비들의 신분 세탁을 다룬 논문이 나왔다. 권내현 고려대 교수(역사교육)는 2012년 역사비평 봄호에 실은 논문 ‘양반을 향한 긴 여정-조선 후기 어느 하천민 가계의 성장’에서 150여년에 걸친 노비 수봉과 그 후손의 신분 변천을 추적했다. 권 교수는 논문에서 “1678년에서 1717년 사이 노비 수봉이 평민이 된 후, 그의 후손들은 약 100년에 걸친 신분 세탁을 통해 중간층이 됐고,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유학’의 칭호를 얻었다”며 “노비 수봉의 집안은 1849년 본관을 안동으로 바꾼 후 안동 김씨 신분을 얻어, 그 지역을 대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비 수봉, 평민으로 신분 상승
   
   1717년 경상도 단성현 도산면(지금의 경남 산청군)에 김흥발이라는 평민이 살고 있었다. 본관은 김해이고 군역을 부담했다. 권 교수는 그의 호적을 보고 원래부터 그가 평민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흥발의 아버지 수봉의 직역(職役)은 납속통정대부로서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정3품의 관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봉을 제외한 흥발의 다른 조상들은 평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군역이 호적에 기재돼 있지 않았어요. 또 흥발의 부인은 변 소사(召史)인데 변 소사의 외조부는 사노비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기 때문에 변 소사도 노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권 교수는 흥발 조상의 기록이 누락된 점, 흥발이 노비 출신 여성과 결혼한 점을 의심했다.
   
   권 교수는 흥발과 수봉의 출신을 알기 위해 조선시대 관청이 기록한 호적을 살펴봤다. “노비 가계를 장기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자료로는 호적만 한 것이 없습니다.” 1678년의 호적에 본관이 김해인 사노비 수봉이 있었다. 권 교수는 “이를 단서로 추적한 결과 과거의 노비 수봉과 훗날의 수봉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를 찾았다”고 했다. “1678년 호적에 노비 수봉의 장인은 성이 기재돼 있지 않은 채 ‘금금이(金金伊)’라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아버지가 이생(李生)이었기 때문에 금금이의 성은 ‘이씨’가 되겠지요. 1717년의 호적을 보면 평민 수봉의 장인이 이금금(李今金)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1678년 노비 수봉에게는 금학(金鶴)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금학이 김씨 성을 사용할 때 반복되는 김(金)을 떼어내 김학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1717년 호적에는 수봉의 아들로 김학(金鶴)이라는 사람이 기재돼 있습니다.” 권 교수는 “따라서 그는 노비 수봉이 1678년에서 1717년 사이 어느 시점에 평민이 됐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노비가 어떻게 평민이 될 수 있었을까. 권 교수는 ‘17세기에 있어서의 노비 종량’(평목실 저)이라는 논문을 통해 노비에서 평민이 되는 방법을 설명한 바 있다. “노비들은 다른 지방으로 불법 도주를 하거나 주인이나 국가에 곡식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주인과 같이 살지 않는 외거(外居) 노비들은 평민과 유사한 처지에 있어 토지 경작이나 상행위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부를 쌓아 신분 해방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권 교수는 “노비들은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당시 평민들은 성과 본관, 이름을 모두 갖고 있었다”며 “노비들이 평민이 될 때 성관(성과 본관)을 획득한다”고 했다. 논문에 따르면 성관을 모두 가진 노비들의 비중은 1678년 5.4%에서 1717년 18.2%로 늘었다. 수봉도 1678년에는 김해라는 본관만 갖고 있다가 천민에서 벗어나면서 김이라는 성을 쓰게 됐다.
   
   
   상류층이 되기 위한 노력
   
   권 교수는 조사 과정에서 유독 진주(19.6%)와 김해(12%) 본관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진주는 도산면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김해는 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은 지역”이라며 “노비들이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인구가 많은 지명을 본관으로 선호했다”고 했다. 본관이 김해인 주호(住戶)의 비중은 1717년 25%로 늘어 주호 46명 중 37명이 평민, 나머지는 노비였다고 한다.
   
   권 교수는 “수봉의 다른 아들 홍창도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정3품의 명예직이 됐다”고 했다. 논문에 따르면 홍창은 아들 세우를 서원의 원생(院生)으로 등록시켰다. 뒤이어 수봉의 증손자 광오가 최초로 중간층의 업유(業儒)가 됐다. 수봉의 자손들은 중간층에 머물다가 수십 년이 지난 1831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상층의 유학이 됐다.
   
   “19세기 중엽 그들은 알맞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 있는 본관에 의탁하기 위해 본관을 변경했습니다. 1825년 호적을 보면 수봉의 고손자 성종은 신등면(현 경상남도 산청군 일부)으로 이주하면서 안동으로 본관 이동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고 본관은 환원됐습니다.”
   
   
   안동 김씨로의 본관 이동
   
   수봉의 자손들은 본관 이동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김성종이 본관 이동에 실패한 이후, 그의 6촌 동생 김종원이 본관 이동을 다시 시도해 결국 1849년 호적에 있는 친족 구성원 모두의 본관을 안동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어 나중엔 수봉과 혈연적 연관이 없는 안동 김씨가 한 호밖에 없게 됐다. 권 교수는 “결과적으로 수봉의 후손들이 이 지역의 안동 김씨를 대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들의 본관 이동이 비교적 쉬웠던 것은 안동 김씨들이 18세기 이후에 도산면을 벗어나 대거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1831년 도산면 안동 김씨는 단 1호에 불과했다. 이것을 기회로 수봉의 후손들은 본관을 바꿨다. 본관 이동에 드는 비용에 관련해 묻자, 그는 “가짜 족보를 만들거나 향리와 결탁해 호적을 만들면 물론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비용 없이 몰래 본관을 바꿨다”고 말했다.
   
   
   양반의 입양 문화 모방
   
   수봉의 후손들이 완전한 양반이 되기 위해 행한 것이 또 있었다. 입양이었다. 권 교수는 “당시 입양은 상류층의 문화였다”고 했다. 그는 “단성 지역(지금의 산청 일대)의 경우,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이 17세기 유력 가문에 처음 정착돼 18세기 양반층으로 확대됐고, 19세기가 되면서 비양반층으로 전파됐다”고 덧붙였다.
   
   수봉의 후손 중 최초로 입양된 인물은 1831년 양자로 기재된 김종원이다. 종원은 큰아버지 김정대의 양자 역할을 했고, 종원의 아들 재곤은 할아버지 이름을 김정대로 기록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부계 친족을 통해 가계를 잇는 것은 조선 후기 양반층의 정서였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양반이 되고자 한 상당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위를 상승시켜 온 하천민의 후손”이라며 “수봉의 후손처럼 경제력을 갖춘 하천민들이 오랜 기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완벽히 양반이 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근대 이후에 지배층의 특권을 향유하기 위한 다른 계층의 노력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논문의 의의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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