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을 만난 것은 15년 전인 1997년 8월, 뉴욕 맨해튼 소호(Soho)의 이탈리안식당 ‘카베하즈’에서였다. 그가 매일 점심을 먹는다는 단골식당이었다. 한 해 전인 1996년 4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바깥 출입을 돕는 조수와 함께였다.

백남준은 왼쪽 손과 다리를 전혀 못 썼고, 말씨도 어눌했다. 점심식사로 주문한 스파게티도 구보타 여사가 떠먹여줬다. 이따끔 면이 턱 아래로 흘러내려 윗옷에 떨어졌다. 하지만 끼와 유머감각은 여전했다. 뉴욕 링컨센터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명성황후’ 개막공연을 본 소감을 묻자, “기마민족 후예라서 그런지 잘 뛰는 것 같다. 우리 민족은 엉뚱한 ‘짓’을 잘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민족혼을 뒤흔들어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는 말도 했다.

‘명성황후’보다 30년 먼저 단기필마로 뉴욕에 뛰어든 그는 투병 중이었으면서도 여전히 패기가 넘쳤다.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온갖 상상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펼쳤던 그에게 손짓 하나, 걸음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와중에도 자작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며 노래까지 부르는 ‘비디오 오페라’를 올리겠다며 재기의 의욕을 불태웠다. 김소월 시(詩)에 곡을 붙였다고 했다. 솔직히 그냥 해보는 이야기겠거니 했다. 3개월 뒤, 백남준은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앤솔러지 필름 아카이브스(Anthology film archives)’에서 정말 공연을 올렸다.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그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한국 기자가 반가웠던지 어린애처럼 자기 자랑에 바빴다. ‘뉴욕타임스’ 한 면 전체에 자기 기사가 실린 것을 보여주며, “‘명성황후’가 아무리 대단해도, 나처럼 이렇게 한 면씩 뉴욕타임스에 나기는 힘들 걸” 하고 말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예술가의 얼굴에 아이의 천진함이 물씬 넘쳤다.

인터뷰 도중, 백남준은 느닷없이 취재수첩을 달라고 했다. 서툰 손짓으로 뭔가를 그렸다. 다시 넘겨받은 수첩엔 그가 평소 작품재료로 즐겨 사용한 TV브라운관처럼 생긴 기자 얼굴과 녹음테이프가 그려져 있었다. 식사 도중에도 소형 녹음기를 들이밀고 인터뷰하던 기자가 흥미롭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쉽게도 그 수첩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백남준과의 만남을 추억할 소중한 인연의 끈인데…. 레스토랑 앞 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백남준은 격의 없이 웃었다.

이후 재기에 나선 병상의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에 싫증났다면서 ‘레이저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원과 삼각형, 사각형 모양의 투명한 조형물에 레이저빔을 쏘아 빛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첫 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첫 작품을 보여줬다. 이렇게 오뚝이처럼 부활한 백남준은 2006년,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예술은 사기야!”라고 인터뷰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연한데, 말이다.

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