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세요. 오늘 캐스팅이 바뀐다는 안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합니다.”

지난 10월 7일 낮 미국 LA 다운타운의 도로시챈들러극장. 베르디 오페라 ‘포스카리가(家)의 두 사람(The Two Foscari)’ 공연을 앞두고 플라시도 도밍고(71)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웅성거리던 관객들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도밍고가 “올해는 제가 LA오페라 무대에 선 지 26년째 되는 해”라고 말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도밍고는 1986년 LA오페라 창단 개막작인 베르디 오페라 ‘오셀로’의 주역을 맡았다.

2003년부터 LA오페라 총감독을 맡고 있는 도밍고는 이날 주역인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역을 맡아 2시간40분 동안 관록의 목소리를 선보였다.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은 베르디가 15세기 베네치아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도밍고는 베네치아의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정적(政敵) 로레다노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죄를 뒤집어쓴 아들 야코포를 구할 수 없는 아비의 처지를 절절히 노래했다. 프란체스코는 원래 바리톤이 맡는 배역. 테너 도밍고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와 고음을 오가며 고뇌하는 권력자의 속내를 풀어냈다.

노래하면서 지휘하는 오페라 총감독, 도밍고

지난 10월 7일 LA오페라에서 열린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에서 주역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를 맡은 도밍고(아래쪽). ⓒphoto LA오페라
지난 10월 7일 LA오페라에서 열린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에서 주역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를 맡은 도밍고(아래쪽). ⓒphoto LA오페라

도밍고와 함께 이날 공연에 긴장감을 안겨준 주역은 야코포의 아내 루크레치아를 맡은 러시아 출신 소프라노 마리나 포플라브스카야(35). 남편을 구해달라고 시아버지에게 호소하는 루크레치아의 비통한 심정을 어두우면서도 힘있는 음색에 담아냈다. 포플라브스카야는 지난 2월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 비올레타로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무대에 처음 섰고, 3월엔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 ‘시몬 보카네그라’에 나서는 등 세계 유명 오페라 극장에 잇따라 출연하고 있다. LA오페라 매니아들은 시종 어두운 분위기에서 절망과 분노, 회한을 쏟아내는 이 작품을 진지하게 지켜봤다. 이날 관객들로부터 가장 뜨거운 환호를 받은 이는 물론 도밍고였다. LA오페라단 홈페이지는 도밍고가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으로 140번째 배역을 맡게 됐다고 선전하고 있다. 역사상 어떤 테너도 도전하지 못한 기록이다.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은 LA오페라의 2012/2013시즌 개막작. 이번 시즌에는 모차르트 ‘돈 지오반니’, 푸치니 ‘나비부인’ ‘토스카’, 로시니 ‘신데렐라’,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이사벨 아옌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세계 초연작 ‘둘체 로사’ 등 일곱 작품을 선보인다. 9월 15일부터 10월 9일까지 여섯 차례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 무대에 선 도밍고는 그 다음날인 10일과 14일엔 모차르트 오페라 ‘돈 지오반니’에도 나섰다. 이번엔 오페라 가수가 아니라 지휘자로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에 섰다. 도밍고가 지휘하는 ‘돈 지오반니’는 보지 못했지만, 200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휘대에 선 도밍고를 만난 적이 있다. 러시아 출신 미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줄리엣으로 출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마에스트로’ 도밍고는 노련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갔다. 도밍고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빈 국립오페라·LA오페라는 물론, 빈필·베를린필 같은 유수 오케스트라를 450회 넘게 지휘한 베테랑이다.

LA의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두다멜. photo LA필하모닉오케스트라
LA의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두다멜. photo LA필하모닉오케스트라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으로 멕시코에서 성장한 도밍고와 함께 LA의 클래식 문화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같은 히스패닉인 베네수엘라 출신 젊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31)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LA 시민 가운데 히스패닉(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은 이미 절반 이상을 넘어섰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을 공연장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을 법하다.

명(名)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도밍고와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세계적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베토벤 교향곡 등 음반을 잇따라 성공시킨 두다멜이야말로 LA의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갈 가장 적임자다. ‘할리우드의 도시’ LA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도밍고와 두다멜이 급부상하는 이유다.

2009년 하반기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취임한 두다멜은 네 번째 시즌을 맞아 성공적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0월 4일부터 나흘간 연속으로 올린 ‘두다멜, 베토벤을 지휘하다’ 공연은 개막 2주 전부터 일찌감치 매진됐다. 10월 5일 오전 11시 도로시챈들러홀 맞은편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예상대로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자리를 확인하니, 마침 오케스트라 무대 옆쪽 좌석이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지휘대에 오른 두다멜은 얼굴이 약간 부은 듯했다. 노르웨이 명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면서 두다멜은 고갯짓만으로, 때론 손가락만 까딱거리면서 오케스트라를 리드했다. 베토벤 3번 교향곡 ‘영웅’을 지휘할 때는 입을 벌리고 양손을 한껏 벌리며 예의 격정적인 표정을 연출했다.

스물여덟 살에 90년 전통의 오케스트라 맡은 두다멜

LA타임스는 두다멜이 지난 9월 말 시즌 개막작으로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해 “포르쉐를 모는 두다멜이 요즘 차 안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모양이다. 오케스트라를 너무 빨리 몰고 간다”고 비꼬았는데, 베토벤은 달랐다. 두다멜은 서두르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지키면서, 때론 지나치게 느리다 싶을 만큼 여유있게 오케스트라를 요리했다. 3악장에선 손을 내린 채, 몸만 까딱거리다 오케스트라 쪽으로 갑자기 몸을 던지며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장악했다. 부모 나이뻘 되는 단원들도 곳곳에서 보였지만, 두다멜은 몸에 익은 자기 악기를 연주하듯 오케스트라를 마음대로 요리했다. ‘영웅’의 마지막 선율이 마무리되자 두다멜과 오케스트라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지휘대에서 내려온 두다멜은 오케스트라 속으로 걸어들어가 단원들 속에 파묻혀 환호에 답했다.

두다멜이 취임한 이후, LA필은 콘서트 실황을 남미와 유럽의 영화관까지 생중계하는 등 새로운 청중 개발에 힘쓰고 있다. 두다멜은 LA필을 이끌고 뉴욕 링컨센터, 런던 바비칸센터, 스위스 루체른페스티벌 같은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한다. 그가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역점을 두는 사업 중에 하나가 LA청소년오케스트라(YOLA)다. 빈민층 청소년에게 오케스트라 악기 교육을 통해 자존감과 삶의 목표를 심어주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운동의 미국판. LA의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오케스트라 교육을 시키는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후원자들의 기부를 받아 수백 명의 청소년들에게 악기와 레슨을 무료로 제공한다. 마약과 폭력에 빠져 거리를 헤매는 갱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은 대부분 히스패닉 청소년들이다. 두다멜의 LA청소년오케스트라는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가 크게 다룰 만큼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사사건건 맞서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운동이 LA의 뒷골목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두다멜과 도밍고는 지난 8월 19일 LA필하모닉의 여름 프로그램인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 야외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함께 무대에 섰다. 두다멜이 2009년 LA필 음악감독으로 오면서 함께 호흡을 맞추기로 약속한 지 3년 만에 이뤄진 연주였다. 연주회는 매진됐고, 1만8000명의 관객이 들었다. 두다멜의 지휘에 맞춰, 도밍고는 ‘베사메무초’ 같은 라틴음악과 ‘리골레토’ 같은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두다멜은 LA필하모닉 창단 100주년을 맞는 2018년까지 음악감독을 맡기로 이미 계약을 연장했다.

우연찮게 도밍고와 두다멜의 공연 모두 평일과 일요일 낮 시간에 봤는데, 관객 90% 이상은 미국의 주류 백인들로 은퇴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히스패닉이나 젊은 관객들을 공연장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아직 충분히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LA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른 두다멜과 도밍고가 이 도시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는 여전히 관심거리다.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걸작…

구겐하임과 닮은꼴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83)의 작품이다. 2003년 완공된 디즈니홀은 게리의 걸작으로 꼽히는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떠올리게 한다. 장미꽃이 피는 꽃봉오리를 본뜬 콘서트홀은 은빛으로 빛나는 외관이나 물결치는 듯한 외관이 구겐하임과 닮았다.

게리는 관객들에게 친숙한 콘서트홀을 만든다는 목표 아래 기능성과 디자인을 모두 만족시키는 역작을 만들어냈다. 휴식 시간에 로비 출입구를 나섰더니, 몇 걸음 만에 야외정원으로 이어졌다. 관객들은 정원수와 조각을 바라보며 잠시 긴장을 풀고 다시 연주에 몰입할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디즈니홀의 음향은 훌륭했지만, 시각적으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정면에는 역시 게리가 디자인한 파이프오르간이 오렌지빛 조명 아래 빛났고, 천장 네 귀퉁이는 바닷속처럼 푸른빛을 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객석 뒤쪽 천장 유리를 통해서는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콘서트홀 안팎 모두 관객 친화적으로 설계된 걸작이라는 느낌이다. 프랭크 게리는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상(賞)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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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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