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한자리에 모인 실극 단원들이 ‘12 배심원’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1월 13일 한자리에 모인 실극 단원들이 ‘12 배심원’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잠깐만요, 다시 한번 갈게요! 지금 그 대사를 조금 더 비아냥거리는 투로 해주세요, 아셨죠?”

지난 11월 13일 늦은 저녁 서울 성북구 삼선동2가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 연습실. 연기지도 강사의 지시가 떨어지자 한 중년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독일계 자동차부품 전문 기업인 콘티넨탈 오토모티브 이사로 일하다가 2년 전 퇴직한 정창옥(60)씨. 정씨는 회사를 그만둔 후 연극과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극단 ‘실극(實劇)’의 멤버들이다. 실극은 서울대 공대 연극회 출신 졸업생들이 1986년 창단했다. 외부 인력 몇 명을 제외하곤 배우와 스태프 모두 서울대 공대 졸업생이다. 기업 대표이사부터 대학 교수, 사업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실극의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이상헌 교수(건축 78). 정창옥씨는 금속공학과 72학번이다.

“그렇죠, 누구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있으니까. 근데 재판이고 뭐고, 이런 애들은 싹수가 보였을 때 단칼에 잘라버려야 해요. 돈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고!”

정씨의 목소리 톤이며 억양은 전문 배우라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배우들 역시 수준급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상헌 교수는 “실극은 직업 배우들이 모인 곳은 아니지만 실력은 프로에 준한다”며 “연기에 대한 열정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극은 현재 연극 ‘12 배심원’을 준비 중이다. ‘12 배심원’은 미국 극작가 레지날드 로즈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16세 소년이 친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두고 배심원 열두 명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며 진실을 밝힌다는 줄거리다. 창단 이래 2년에 한 번씩 공연을 해오고 있으며 이번 공연은 10회째다. 연출을 맡은 안경모 극동대 연극영화과 교수(전자 89)는 “‘12 배심원’은 ‘통합’과 ‘반성’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 “그래서 10회 정기공연 작품으로 선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실극은 상업성이 없는 작품을 주로 골라 공연한다. 2007년 양자역학을 소재로 한 과학연극 ‘코펜하겐’(원작 마이클 프레인)과 2010년 공연한 퓰리처상 극본상 수상작 ‘글렌게리 글렌로스’(원작 데이비드 마메트)의 경우, 실극이 직접 번역하고 국내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이상헌 교수는 “실극은 상업 극단에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하기 힘든 작품들을 골라 공연하고 있다. 여기에 실극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일할 때와 다른 ‘사는 보람’ 느낀다”

캐스트의 한 명인 김인수 삼창빌딩경영 대표(건축 74)는 현재 빌딩 사무실 임대·관리업을 하고 있다.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한 주변의 반응을 묻자 김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내는 제가 연극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었거든요. 그래서 어쩌다 조금씩 생기는 출연료는 모조리 아내에게 갖다 바칩니다.(웃음)”

김 대표는 1994년 실극에 들어왔다. 중년에 누구에게나 한 번씩 찾아오는 삶에 대한 회의가 그를 엄습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돌아보다가 문득 대학 시절 생각이 났죠. 답은 연극이었어요.”

일을 하면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가 일과 후엔 연습실로 달려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공연을 두 달가량 앞두고 매일 저녁 세 시간씩 연습을 하는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서 박수를 받을 때의 환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할 때와는 다른 ‘사는 보람’ 같은 것이 느껴지거든요.” 김 대표는 “연극을 반대하던 부인이 공연이 끝난 뒤 칭찬해 줄 때 가장 기분이 좋다”며 “연극은 내게 취미 그 이상”이라고 했다.

최기창 팬택 고문(전자 81)과 실극과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실극의 모태인 ‘서울공대 연극회’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공대에는 여학생이 거의 없어서 연극을 할 때면 다른 단과대학에서 여학생을 섭외해 오곤 했어요. 간호학과, 가정대, 음대처럼 여학생이 많은 곳이 주 타깃이었죠. 대학교 1학년 때 ‘노비문서’라는 작품을 했는데, 그때 초빙해온 간호학과 여학생이 지금의 제 아내가 됐어요.” 최 고문은 본래 배우는 아니었다. 팸플릿을 제작하고 소품과 의상을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시다시피 낮에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두 달 동안 저녁 시간을 온전히 연극에 바친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2010년 ‘글렌게리 글렌로스’를 준비할 때 응원차 연습실에 왔는데, 이게 웬걸. 연기 욕심이 나는 거예요.” 최 고문은 회사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배우를 대신해 연습에 참여하다가 어느 순간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무대에 섰다. “연극에 온 정신을 쏟으면 업무 스트레스가 날아가요. 작품 하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유대도 느낄 수 있죠.”

“또 연극하면 이혼하겠다”

이호 IP큐브파트너스 부사장(재료 75)은 한때 연출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연극을 사랑하는 연극 애호가다. 평균 한 달에 한 번은 연극을 보고, 해외 출장길에 오를 때면 꼭 뮤지컬을 감상한다. 이 부사장은 미국·일본·유럽 업체로부터 국내 IT업체가 필요로 하는 특허를 매입해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업무 특성상 해외 출장도 잦다. “생활인으로서 연극에 몰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갑자기 해외 출장을 가게 되는 경우, 급한 업무로 야근을 해야 하는 경우,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땐 정말 곤혹스럽죠.” 이 부사장의 가장 큰 고민 역시 업무와 연극의 병행이다. “나 한 사람이 연습에 빠지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잖아요. 공연 전체의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고요.” 그는 실극 활동에 매진하면서도 회사와 가정에 소홀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했다.

연극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연극은 마약 같다”고 대답했다. “때로는 배우들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있기도 하고, 기획 과정에서 비용 문제도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역경들을 헤치고 무사히 공연을 마쳤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말로 다 못하죠. 한 회 공연을 마치고 나면 다들 진이 빠져서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고, 연극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2년을 주기로 또 연극하자고 모여들어요. 마치 2년 약효 마약 같죠.(웃음)”

한화 화약사업본부 김광현 글로벌사업TFT 매니저(공업화학 91)는 지난 9월부터 김밥 두 줄로 저녁을 때우고 있다. 업무를 마치면 연습실로 향하기 바빠 저녁을 먹을 시간이 없다. 김 매니저는 “먹는 것도 부실하고, 잠도 잘 못 자는데 신기하게도 연습실에만 가면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부인·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올해 셋째 아이가 세 살인데 아빠가 곁에 없으니 엄마에게 많이 매달리는 모양이에요. 참다 못한 아내가 ‘다음에 또 연극하면 이혼한다’고 경고하데요. 죄인처럼 밤에 들어갔다 아침에 몰래 나오는 생활이 계속됐죠. 그런데 결국 아내도 제 열정에 두손 두발 다 들었어요. ‘전화를 자주 하라’는 조건으로 연극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실극의 전통은 대를 이어 내려가고 있다. 3년 전 별세한 염창신(공업화학 77)씨의 아들 염인섭(26·인하대 연극영화)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실극을 빛내주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선배들이 ‘인섭이도 연기를 배우니 아버지 대신 실극에서 활동하면 어떨까’ 제안하셨고, 올해부터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염씨는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과만 작업을 하다가 여기에 와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열정이다. “배역에 욕심도 내시고, 대사가 잘릴까봐 열심히 외우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자극을 받습니다. 선배들을 본받아 더 열심히 하려고요.”

실극이 올리는 ‘12 배심원’은 오는 11월 29일부터 4일간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아트센터K 네모극장에서 공연된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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