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어휴, 내각명령권은 총리에게 있다고 헌법에 나와 있어요. 여자 총리에게도 (이 조항은) 유효해요.”

2005년 11월 독일 총선거에서 승리해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른 앙겔라 메르켈이 자신이 속한 기독교민주당(CDU)과 연합했던 기사당(CSU)의 당수이자 총리 후보였던 슈토이버에게 쏘아붙인 말이다. 당시 슈토이버와 기민당 내 간부들은 총선 승리 뒤 사민당(SPD)과의 대연정에 매달리는 메르켈에게 불만이 가득했다. 메르켈은 대연정 성사를 위해 원자력발전소 폐기와 빈곤층에 대한 연금확대 등 사민당의 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정부의 핵심 자리도 사민당에 많이 양보했을 뿐 아니라 프란츠 뮌터페링 부총리, 슈타인브릭 재무장관, 슈타인마이어 외교장관 등 사민당 출신 각료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당내 중진들의 이에 대한 불만과 반발이 있었다. 메르켈은 조용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이를 제압해갔다.

총선에서 1당이 된 메르켈이 사민당과의 대연정 협상에 매달린 것은 자신의 개혁 프로젝트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이 몰고온 높은 실업률과 경기 침체 등으로 ‘유럽병 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그리고 슈뢰더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메르켈 입장에선 국가 운영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보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독일은 재도약과 쇠퇴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독일을 수술하기 위해서는 앞서 7년간 집권을 했던 사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사민당과의 대연정 협상은 녹록지 않았다. 대연정 협상은 연방, 경제, 노동, 사회 등 수많은 이슈들을 동시에 다뤘다. 메르켈은 대연정 협상 과정에서 사민당의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총선에서 기민당에 표를 몰아준 국민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았다. 전임 총리였던 콜이나 슈뢰더같이 요란스럽지는 않았지만 메르켈은 정국 전체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협상을 처리해 나갔고, 무려 9주라는 긴 시간을 들인 끝에 결국 대연정 타결에 성공했다.

한국의 롤모델?

지난 12월 대선 이후 한국에서 메르켈 총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박근혜 당선인이 당선 확정 다음날 메르켈 총리와 통화하는 등 각별한 친분을 과시한 게 직접적 이유다. 박 당선인은 2000년부터 메르켈 총리와 각별한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메르켈 총리와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다”고 쓰기도 했다. 현재 메르켈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지도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제전문잡지 포브스(Forbes)가 2012년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4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부문에서도 메르켈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국에서 메르켈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이유는 박 당선인과의 친분에만 있지 않다. 현재 메르켈이 이끄는 독일은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앞서 해결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경제민주화, 사회복지, 일자리와 성장, 평화 통일을 앞서 이룩한 한국의 ‘역할 모델’이라 할 만하다. 전쟁의 폐허와 통일의 시련을 딛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우뚝 선 나라, 그 중심에 메르켈의 리더십이 있다.

메르켈 리더십의 탁월함은 현재 독일의 경제 성적표가 말해준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와 유로화 지역 국가들의 재정위기 속에서도 독일은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이라 할 만한 호황을 맞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3%대의 경제성장률과 4%대의 낮은 실업률을 기록 중이며, 무역 경상수지 규모는 세계 1위에 올라서 있다. 중국을 제치고 장사를 가장 잘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2012년 미국의 조사전문기관인 퓨(Pew) 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73%가 현재 경제 상황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프랑스는 19%, 재정위기를 맞고 있는 스페인은 6%로 낮게 나타났다. ‘1% vs 99%’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사회 양극화에 분노해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시위에 나섰지만 독일 젊은이는 조용하다. 폭넓은 사회안전망과 촘촘한 복지제도 때문이다. 오히려 독일은 일자리가 있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유럽 각국의 젊은이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베를린이 뉴욕을 제치고 세계에서 호텔 객실이 가장 많은 도시로 올라설 정도로 독일에는 관광객도 넘쳐나고 있다.

뚝심과 통합의 정치인

이같은 독일의 현 상황은 2005년 총리직에 오른 메르켈의 개혁이 이뤄낸 성과라 할 수 있다. 메르켈은 사민당과의 대연정에 성공한 후 사민당이 시작한 사회개혁인 ‘어젠다 2010’을 이어받는 등 실제 대연정 정신에 투철한 정책을 펼쳐왔다. ‘어젠다 2010’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장기 구조개혁 정책으로, 전임 슈뢰더 정권의 인기 하락을 가져온 정책이었지만 메르켈은 이를 계속 밀어붙이며 정책 연속성을 유지했다. 슈뢰더가 추진한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시장 개혁(하르츠 4)도 더욱 정교화해서 추진했다. 메르켈은 연금과 의료보험제도에도 손을 댔다. 이는 이해세력을 넘어 정치세력 간 힘들고 긴 협상과 타협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지만 메르켈은 의회 공식석상에서 전임자 슈뢰더에 대해 “용기 있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했다”는 찬사를 보내며 협상과 타협을 조율해 갔다.

메르켈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개혁을 밀어붙이는 한편 구조개혁으로 고통받는 국민에게는 ‘따뜻한 마음의 여성 총리’로 다가섰다. 중소기업들에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정부 재정 지출의 절감을 통해 재정을 공고히 하는 알뜰함을 보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국민은 점차 메르켈에게 더 높은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2009년 총선 결과 대연정 상대였던 사민당을 밀어내고 자민당과 정부 구성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차근차근 자신의 것을 성취해 나가는 전형적인 뚝심과 통합의 정치인이 메르켈이라 할 수 있다.

메르켈의 리더십이 현재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유럽연합(EU)과 유로화 지역의 위기로 번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위기가 다소 진정되는 국면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EU와 유로화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유럽의 최대 돈줄인 독일을 이끌고 있는 메르켈에게는 이 EU의 위기를 해결할 가장 중요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그동안 메르켈은 “재정위기 국가들이 허리띠를 졸라매 재정적자를 줄이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놀고 먹는 베짱이 문화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메르켈로서는 “왜 우리가 게으른 국가들의 빚을 떠안아야 하느냐”는 독일 유권자의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해 유럽 여러 나라들은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메르켈로서는 국내 정치에서 보여준 통합과 뚝심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발휘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현재 메르켈은 유럽중앙은행에 힘을 실어주면서 ‘더욱 유럽(more Europe)’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유럽과 유료화의 해체가 아니라 유럽 통합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앤드루 모라브스키 교수는 “만약 유럽이 유로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다면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연대의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고 말했는데, 세계 최초의 성공 사례가 가시화될지 여부도 메르켈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목사의 딸

메르켈이 뚝심과 통합의 정치인으로 성장한 데는 그의 인생 자체가 가장 큰 자산이 됐다. 그는 1954년 7월 함부르크에서 개신교 목사의 첫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터는 서독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 딸이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동독 지역의 조그마한 도시 크비트초프로 이주했다. 무신론의 국가에 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동독으로 들어간 것이다.

편안한 생활을 버린 앙겔라 가족은 곧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난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염소젖을 짜야 했고, 채소를 키워야 했다. 동독의 공산당 정권은 점점 옥죄어 오기 시작했고, 기독교인들은 괴롭힘과 모욕을 당하기 일쑤였다.

메르켈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80㎞ 떨어진 템플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장애인 생활시설과 성직자 교육원이 있었다. 아버지는 성직자교육원을 맡았다. 다행히도 그곳은 구 동독 공산정권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난 하나의 해방구였다. 서독의 신문과 책이 비치돼 있고 서독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 또한 목회관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다. 물론 밖에서는 감시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 앙겔라는 지적 및 생존 능력을 쌓아갔다.

앙겔라는 35세까지 학자로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앙겔라는 나중에 양자물리학과 정치를 같은 원리로 이해했다. 힘과 에너지의 역학 관계와 정치권력 관계를 비슷한 것으로 파악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험하고 오류를 줄이는 자연과학의 방식이 메르켈의 정치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9년 11월 동베를린 장벽은 시민들의 무혈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메르켈은 화합과 통일을 지향하는 정치세력, ‘민주개혁(Demokratischen Aufbruch)당’에 가입했다. 동독에서 치른 첫 자유선거에서 민주개혁당은 실패했다. 그는 곧 기민당(CDU)에 입당했다. 정치 변방에서는 자신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연방정부 총선에서 그는 승리했다. 연방의원으로 당선돼 당시 수도인 서독의 본(Bonn)에서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적 행운이 따랐다. 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은 메르켈의 정치적 역량을 재빠르게 간파했고 자신의 ‘정치적 양녀’라고 불렀다. 콜은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장관에 대한 여성 할당제가 메르켈에게 축복이었다. 이어 그는 환경부 장관에 올라 국제무대에도 데뷔했다.

메르켈은 서독 출신의 남성들이 득세해온 ‘마초 정치세계’에서 다른 행동 양식을 보였다. 거만하거나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동독 정권하에서 그랬듯이 조용히 움직이며 자신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메르켈의 정치적 롤모델은 러시아의 여제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Ⅱ·1729~1796)였다. 당시 메르켈 책상 위에 그녀의 초상화가 있었다. 러시아의 황제인 표트르와 결혼한 이후 17년 만에 남편을 밀어내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 인물이 예카테리나 2세다. 이후 교육 및 경제 개혁으로 강한 러시아를 만들었다. 마치 동독 출신의 여자가 미래 독일의 총리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이것보다 더 잘 보여주는 상징이 있을까?

기다리고 때를 아는 정치인

정치 입문 이후 그는 서독의 정치를 공부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98년 독일 보수정치의 거목이 쓰러졌다. 헬무트 콜이 새로운 정치스타일을 보여준 사민당의 슈뢰더에게 패한 것이다. 이어 1999년 기민당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졌다. 기민당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고, 허물을 벗고 환골탈태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당시 메르켈은 기민당의 사무총장이었다. 콜의 경쟁자였던 쇼이블레 기민당 대표 역시 정치자금 스캔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콜을 향해 칼을 뽑았다. 이를 통해 기민당을 접수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고 승부사의 기질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무너지는 당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 ‘본의 남자’들 중 일부는 동독 출신의 신출내기 여자를 선택했다. 정치적 위협 상대라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당을 맡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기존의 방식인 지도부를 공략하는 전략 대신 지구당원협의회 당원들을 만났다. 풀뿌리 당원들과 미래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지며 실질적인 당의 권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메르켈은 당원의 어머니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며 자신이 내건 ‘작은 발걸음의 전략’을 실천했다. 2000년 4월 그는 기적처럼 기민당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당시 독일은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과 녹색당이 소연정을 이루고 있었다. 메르켈은 2002년 총선에서 기민당의 총리 후보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는 준비가 덜 된 정치인이었다. 일반 여론조사와 당원의 지지도에서 자매당인 기사당(CSU)의 에드문트 슈토이버에 밀리고 있었다. 현실을 파악한 그는 총리 후보를 포기하고 실리를 택했다. 그는 슈토이버가 머물고 있는 뮌헨으로 날아가 담판을 통해 총리 후보를 포기하는 대신 원내총무직을 쟁취했다. 슈토이버는 총선에서 슈뢰더 총리에게 패했지만 메르켈은 미래를 기약하고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메르켈이 중요한 정치적 고비에서 실리를 택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헬무트 콜의 정치 경력을 공부했다는 것이 주요한 배경이 됐다. 콜 역시 1978년 기민당의 유력한 총리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총리 후보를 양보하며 더욱 실력을 키우는 길을 택했다. 콜은 절치부심 끝에 1982년 총리직을 거머쥐게 된다.

메르켈 역시 총리직에 도전하기 위해선 4년이란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그는 정치판을 거대한 실험실로 인식하는 자연과학도답게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에서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깨달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위기관리 능력을 익혀갔다. 서독 출신의 남자들을 쓰러트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갔다.

역사 공부로 정치적 무기 만들어

기민당 내에서 ‘서독의 남자’들은 메르켈 앞에서 거의 다 쓰러져갔다. 스스로 실수나 자충수로 무너졌다. 콜의 후계자로 한때 유력했던 헤센주의 롤란트 코흐 주지사도 그중 한 명이다. 더 이상 당내의 경쟁자는 없었다. 야당지도자로서 메르켈의 목표는 총리 슈뢰더를 향했다. 그를 꺾기 위해 비전과 프로그램, 무기가 필요했다. 그는 독일 건국의 아버지들을 공부했다. 건국의 주역이었던 아데나워 초대 총리와 에르하르트 2대 총리가 공부 대상이었다.

그는 먼저 경제 이슈에 몰입했다. 당시 사민당과 녹색당의 진보 정권은 높은 실업률, 낮은 경제성장률, 재정부채 등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는 개념으로 메르켈은 초대 경제부 장관이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제시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업그레이드한 키워드를 도출한다. ‘신사회적 시장경제’였다. ‘신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목표인 ‘모두가 잘사는 나라’에다가 ‘참여하는 사람에 대한 혜택’을 새로 내걸었다.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과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에 대한 혜택을 말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슈뢰더 정부는 ‘어젠다 2010’을 발표한다. 슈뢰더는 사회복지개혁이라는 카드를 내건다. 정치평론가 슈마허는 이를 두고 “슈뢰더가 메르켈의 덫에 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슈뢰더는 정치적 모험을 선택했지만 실패했다.

경제 이슈 선점과 함께 메르켈은 아데나워가 내건 미국과의 동맹을 복원하는 제스처를 썼다. 당시 슈뢰더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등 미국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에 맞서 반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이에 맞서 건국의 정신을 내걸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했다. 총선을 하루 앞둔 마지막 TV 토론에서 슈뢰더는 이러한 메르켈을 상대로 거만한 행동으로 실수를 연발했다. 2005년 11월 동독 출신의 메르켈은 드디어 최연소, 최초 여성 총리로 선출되었다.

동독의 마그데부르크(Magdeburg)대학의 볼프강 렌츠시 정치학 교수는 메르켈의 성공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독일의 최고 권력 자리는 동독 출신들이 차지해 완전한 통일을 이룩했다”는 농반 진반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현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 모두 구 동독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메르켈의 인생 자체가 독일이 안고 있는 시대의 결핍인 간극과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메르켈의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했다.

사민당 출신으로 함부르크 시장을 지낸 클라우스 폰 도나니는 “메르켈 총리는 동·서독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행운의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치경제적 통일을 이룩했지만, 동독 출신인 메르켈이 집권한 이후에야 비로소 서독인들이 동독인을 비하하는 ‘오시’와 동독인들이 서독인의 거만함을 조롱하는 ‘웨시’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등 동·서독 간의 심리적 장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메르켈은 정치 경력 2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스캔들이나 부패에 연루된 일이 없었다. 부모 형제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메르켈 총리는 2013년 9월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한다. 예상은 반반이다. 최근 포르자 여론조사에서 메르켈의 기민당과 바이에른주 자매 정당인 기사당의 지지율은 41%를 기록했다.

문제는 소연정을 하고 있는 자민당의 탈락 가능성이다. 메르켈 총리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연정 대상인 자민당이 5% 이하의 지지를 받아 의회 입성이 좌절될 경우 소연정은 불가능해진다. 이 경우 메르켈은 다시 사민당과 대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사민당이 약진해 좌파정당들(녹색당과 좌파당)과의 소연정이 가능해지는 경우이다. 이 경우 메르켈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메르켈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메르켈이 3선에 성공하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그의 경쟁자는 이제 역사의 인물들이 된다. 아데나워, 브란트, 슈미트, 콜, 슈뢰더 모두 위대한 정치가들이다. 메르켈이 ‘콜의 양녀’라는 이미지를 떨어내며 ‘뚝심의 여장부’로 우뚝 설지는 미래만이 알고 있다.

김택환

경기대 교수·‘넥스트 코리아’ 저자

김택환 경기대 교수·‘넥스트 코리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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