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파는 사람 - 스물두 번째 인물

셀러(seller)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
셀러유형 퍼블릭 프런티어
대표상품 정책새봄운동
퍼블릭 프런티어의 셀링 포인트
1) 가치를 중심에 두면 형식은 유연해진다.
2) 애국심으로 꿈의 스케일을 넓혀라.
3) 큰 비즈니스는 철학에서 나온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여행이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웃음)”

지난 2월 말 정부과천청사에서 만난 그는 2주 후면 ‘자유인’이 된다. 지식경제부 장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깨가 무거운 자리에서 1년 넘게 일했다. 임기 중에야 어디 하루라도 제대로 쉬었겠나. 그에게 끝나고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더니 바빠서 안 된단다. 하긴 얼굴만 딱 봐도 쉴 타이밍이 아니다. 퇴임 앞둔 장관님 표정 치고는 너무 ‘쌩쌩’하달까.

홍석우(59) 장관은 벌써 퇴임 이후에 할 일도 세 가지 테마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판소리다.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대로 그는 소문난 판소리 애호가인 동시에 아마추어 소리꾼이다. 퇴임 후 집중적으로 개인교습을 받아 6개월 뒤면 머뭇거리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쌓는 것이 목표다. 두 번째는 중국어. 하루에 4시간씩 중국어에 매달려 죽기 살기 배우겠단다. 이미 다닐 학원까지 등록한 상태다.

“이 나이에 중국어를 배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죠. 거대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고 은퇴하고 갈 데는 일본하고 중국밖에 없어요. 나이 들면 비행기 타고 오래 가는 게 정말 힘들거든. 그런데 중국은 그 나라 말을 못하면 관광단 깃발 쫓아다니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혼자 여행 가서 동네에서 사부작거리려면 중국어는 필수라고 은퇴한 선배가 가르쳐주더라고.(웃음)”

지독하게 운 없던 ‘대학 4수생’에서

행정고시 7개월 만에 패스한 ‘행운의 사나이’로

듣고 보니 나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중국어를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그의 마지막 세 번째 테마가 흥미롭다. 이른바 ‘한글연구’.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한글의 연관성을 밝히는 인문학적 논문을 쓰겠다는 거다. 한글이 경제발전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잘살게 된 이유로 몇 가지 원인을 손꼽는다. 한국인의 교육열, 창조력, 그리고 ‘빨리빨리’ 문화 같은 역동성이다. 그런데 우리가 도대체 왜 그런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그냥 민족성이 그러니까. 타고난 DNA가 그런가 보다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런데 홍석우 장관은 조금 더 과학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한글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거다.

이를 테면 교육열 같은 것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다. 인구 5000만명 중에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불과 0.2%에 불과하다. 한글은 배우기가 무척 쉬운 글자이기 때문이다. 서너 살만 돼도 글자를 가르치면 곧잘 따라 읽으니 부모가 안 가르칠 수가 없다. 이것이 높은 교육열을 불러왔다는 얘기다. 홍석우 장관은 창조력의 원천도 한글로 본다. 영어가 낼 수 있는 발음은 360여개에 불과하지만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발음은 1만1000여개에 달한다.

“한류 드라마가 왜 유행인가를 보면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표현이 다채롭고 아기자기하거든요. 그들이 10개 단어로 표현하는 걸 우리는 100개로 표현할 수 있어요. 예쁘다는 말도 아름답다, 곱다, 어여쁘다 등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죠. 그러니까 말에 따라 표정이나 표현도 다채로워지죠. 중국 영화나 일본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표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뻣뻣하잖아요. 한국인이 시끄러운 것도 표현할 단어가 많아서죠. 저는 창의력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고 봅니다.”

듣고 보니 꽤나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 보인다. 연구를 조금만 더 하면 논문 한 편은 충분히 나올 것 같다. 역시 한 나라의 장관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도 해본다. 퇴임 후의 귀중한 개인 시간도 그에게는 여전히 ‘공공의 시간’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는 뭔가 의미 있는 일, 조금 더 많은 이들을 위한 일을 즐겁게 찾고 만들어낸다. 공직생활 30여년간 뼛속 깊이 다져진 그의 공공마인드가 점점 더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애국심이 투철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20대 초반에는 사회불만(?) 세력에 가까웠다. 암담한 4수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는 4수생이 정말 드물 때였다. 경기고 출신으로 공부는 꽤나 잘했는데 운이 없어 줄줄이 낙방했다. 세 번째 떨어지자 답답했던 어머니가 그를 끌고 간 곳은 남산골 점집. 관상을 보는 이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학생은 대학 갈 운명이 못 돼. 단, 수석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쌓으면 붙기는 해.”

그때부터 정말 수석 합격할 각오로 공부에 올인했다. 마침내 다음 해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이 말은 그의 좌우명이 됐다. “뭐든지 1등할 각오로 덤비면 운명도 이길 수 있다.” 한 친구는 ‘낙방 횟수 제한의 법칙’을 얘기하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너는 살면서 평생 떨어질 것 다 떨어졌으니까 앞으로 더 떨어질 일이 없을 거야.”

그런데 이게 웬걸. 얄궂은 운명은 끝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신체검사에서 방위 판정을 받아 입대를 미뤘는데 다음 해 영장이 나왔다. 정책이 바뀌어서 방위 갈 사람들도 다 현역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당시만 해도 방위는 1년, 현역은 꽉꽉 채운 3년이었다. 게다가 그가 도착한 곳은 백마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최전방 철책부대. 학교에 돌아와 보니 동기들은 6살이나 어린 조카뻘이다. 앞길이 막막했던 그때,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친구가 일생일대의 조언을 해준다.

“네가 지금 이 나이에 일반 직장 들어가면 노털 중의 노털이라 적응하기 힘들어. 그러니까 너는 행시를 봐. 보통 3~4년 떨어지니까 네가 남들보다 덜 떨어지면 몇 년 늦은 걸 보충할 수 있어.”

듣고 보니 꽤나 그럴 듯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그해 4월부터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긍정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의 황홀함을 제대로 맛봤다. 기적처럼 4개월 만에 행시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문제는 2차 시험. 두 달밖에 준비할 시간이 없는 데다 순전히 주관식이라 합격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방법은 나올 만한 것을 찍어서 공부하는 수밖에. 그런데 정말 ‘낙방 횟수 제한의 법칙’이 통했는지 그가 찍은 게 거의 다 나왔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마지막 국제법 과목은 빈칸이라도 메우자는 심정으로 ‘소설’을 썼는데 의외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결과는 250명 중에 230등. 남들이 3~4년 만에 되는 행시를 7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합격한 것이다. 그가 상공부로 배정받은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당시 상공부는 250명 중에 4명만 갈 수 있는 데다 워낙 인기가 좋은 부서였다. 어차피 안 될 것, 질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썼는데 덜컥 됐다. 알고 봤더니 경쟁이 너무 치열해 상위권 지원자들이 아예 쓰질 않았던 것이다.

“그때 알았죠. 아, 운명이구나. 시험에 된 것도 운명이고 상공부라는 조직에 온 것도 운명이라면 이 조직에서 끝을 볼 수 있겠구나. 그런데 정말 장관이 되더군요.(웃음)”

신은 공평하다. 남다른 불운을 줬다면 남다른 행운도 준다. 홍석우 장관이 그걸 믿지 않았다면 초년의 답답한 상황에서 세상 탓, 팔자 탓만 했을 것이다. 신이 주는 멋진 행운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알았기에 기다렸고, 최선을 다해 행운을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공무원 중심의 낡은 프레임 깨자”

정책새봄운동으로 불필요한 규제 대폭 축소

홍석우 장관이 상공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지 5~6년째에 접어들던 1987년. 당시 그의 업무는 섬유를 해외에 수출하는 쿼터를 각 기업에 배분하는 일이었다. 기업의 이익과 직결된 일인 만큼 이권 개입도 치열했다. 그런데 문제는 업무내용이나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담당 공무원조차 이해하는 데 며칠씩 걸린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 내용을 전국에 다니면서 설명회를 해야 할 정도였다. 6개월 뒤 사무관이었던 그는 이건 아니다 싶어 요령을 원점에서 다시 만들었다. 몇 개 기업에 보여주니 너무 쉽다며 반색했다. 최종 결재를 받으러 국장실에 올라갔는데 국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홍 사무관, 섬유쿼터 운용 쉽게 만든 건 칭찬할 만한 일이야. 그런데 혹시 이 요령을 악용해서 불법적인 움직임이 많이 생기면 어떡하지?”

순간 그는 당황했다. 전혀 예상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은 자칭타칭 ‘홍석우 어록 1호’가 됐다.

“국장님, 우리는 98%의 선량한 대한민국 기업과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악용하려는 나머지 2%는 검찰에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어렵게 만들수록 말썽이 적어진다’는 공무원 중심의 낡은 프레임을 과감히 깼다. 이는 지난 1년간 지경부가 벌여온 ‘정책새봄운동’으로 연결된다. 지난해에는 지식경제부 간부 100여명이 석 달간 번갈아가며 부처 소관 사업신청서 90여종을 작성했다. 복잡한 서류절차로 인한 불편함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신청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간부들이 비효율적인 서류 절차를 경험해보니 바로 개선효과가 나타났다. 평균 제출서류 분량은 32%, 첨부서류는 54%가 줄었다.

그는 직원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다른 지역 곳곳에서도 불필요한 규제를 찾아서 없앴다는 직원들의 이메일도 적지 않게 받았다. 직원들이 각종 행정규제와 절차를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가 바뀐 것이다. 이처럼 제대로 된 공공마인드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준다. 우리는 그동안 ‘애국심’이라는 공공마인드를 낡고 촌스러운, 시대에 뒤떨어진 열정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이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대개 모든 사람의 꿈이나 이상은 내가 잘되자고 하는 개인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보통 나 이외의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꿈이 10년, 20년 이상 무르익은 뒤다.

그러나 애국심이라는 공공마인드가 처음부터 세팅된 사람들은 내 꿈을 바라보는 프레임과 스케일 자체가 달라진다. 홍석우 장관은 처음부터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 애국심이 저절로 커진 케이스다. 내가 일한 결과가 기업에, 한국 경제에, 나라에 어떤 파급효과를 미치는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전율을 느꼈다는 그는, 작은 일 하나에도 가치를 담으려 노력했다.

공공마인드로 일한다는 것은 결국 일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함인지, 명예를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함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가치지향적인 일은 형식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왜 하는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것인가의 방법론에서는 훨씬 더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홍석우 장관은 공무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공공에 민간의 장점을 접목하려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다. 중소기업청장 시절에는 기업들이 국가지원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절차와 자격요건 등을 확 바꿔 나 같은 중소기업 CEO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코트라(KOTRA) 사장 재직시절에는 직원들에게 업무효율 방안이 아닌, 코트라의 존재 이유부터 물었다. 직원들 한명 한명에게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일의 의미를 재발견한 직원들의 눈빛 역시 달라졌다.

큰 비즈니스는 철학에서 나온다

K-POP 키운 이수만 회장의 신념

“저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큰 비즈니스는 결국 철학에서 나온다. 철학 없는 비즈니스는 결국 쫀쫀한 장사에 불과하다고요. 돈을 왜 버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철학이 있을 때 비즈니스도 결국 거대해질 수 있습니다.”

철학 있는 비즈니스로 승리한 대표적 케이스가 바로 K-Pop(Korean-Pop)이다. 많은 사람들이 K-Pop의 성공에 대해 쉽게 말한다. 드라마 등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기도 하고, 국내 음반시장이 몰락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울 만한 공공마인드가 숨어있다. 그 중심에 바로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있다. 그는 2000년 베이징에서의 HOT 콘서트를 보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됐다. 태극기를 흔들고 한국 물건을 사고, 한국으로 관광까지 오는 팬들을 보면서 ‘컬처 퍼스트, 이코노미 넥스트(Culture first, Economy next)’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했다. 문화가 먼저 나가면 경제가 뒤따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한국이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보아를 필두로 끊임없이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은 문화적으로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개발도상국일 뿐이었다. 가수 한 명을 해외에 내보내려면 어마어마한 선투자가 필요한 데다 아시아 투어는 매진행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적자였다. 공연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제작비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M이 수많은 K-Pop스타를 배출하고도 수익이 흑자로 돌아선 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엄청난 리스크와 적자를 견디고도 뚝심 있게 밀어붙였던 힘은 결국 이수만 회장이 가진 철학 때문이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홍석우 장관의 말처럼 애국심과 공공마인드가 있다면 쫀쫀한 장사가 아닌 더 넓은 비즈니스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도 얼마 전 글로벌한 사건을 하나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하버드, MIT, 월드뱅크까지 돌며 강연을 한 것이다. 국내에서 강의는 여러 번 했지만 외국 대학에서 그것도 영어로 하는 강의는 처음이었다. 강의안을 준비해서 자연스럽게 말할 때까지 수없이 준비하고 무대에 섰다. 주제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세 가지 원인. 과연 지식경제부 장관님답다. 공공마인드로 30년 넘도록 한국 경제를 개척해온 그를 나는 감히 퍼블릭 프런티어라고 부르고 싶다. 앞으로 본격적인 민간의 영역에서 그의 공공마인드가 어떻게 빛을 발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김미경

스피치 전문가 및 동기 부여 강사. ‘김미경의 아트스피치’ 원장, ‘W.insights’ 대표. 연세대 음대 졸업, 이화여대 정책대학원 석사. MBC ‘희망특강 파랑새’, KBS ‘아침마당’ 등 방송 출강. 저서로 ‘한 달에 한 번, 12명의 인생 멘토를 만나다’ ‘내 안의 스티브 잡스를 깨워라’ ‘2012년 자기계발을 위한 트렌드 키워드’ ‘언니의 독설’ ‘김미경의 아트 스피치’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등이 있다.

김미경 아트스피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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