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신작 소설 수백 권으로 ‘책탑’을 쌓은 도쿄 산세이도 서점 풍경. ⓒphoto 연합
하루키의 신작 소설 수백 권으로 ‘책탑’을 쌓은 도쿄 산세이도 서점 풍경. ⓒphoto 연합

‘1Q84’ ‘해변의 카프카’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등 쟁쟁한 작품을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 42개국에서 번역 출간한 일본 문학의 자존심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4). 오에 겐자부로 이후 해마다 노벨문학상 유력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그는 전후 일본 문학의 상징이자 일본 출판 시장의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12일 신작을 출간했다. 뉴욕타임스와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이기에 신작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세계적이다.

370쪽 분량의 신작 제목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 彼の巡禮の年)’. 소설은 “대학 2학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로 시작된다. 대학 2학년 때 느닷없이 고교시절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철도회사 직원 다자키는 그로 인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는 여자친구로부터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를 듣고, 16년 전 절교당한 이유를 찾아 떠난다. 이 ‘순례’의 과정을 통해 다자키는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것이 신작의 줄거리다.

이번 신작은 일본에서만 770만부라는 경이적 판매고를 올린 ‘1Q84’의 기억을 뒤로 밀어낼 태세다. 소설은 정식 출간일 이전 사전예약 주문만으로 판매량 50만부를 돌파했다. 초판부수만 무려 60만부에 달한다. 영어판이 아닌 일본어 버전으로, 그것도 대중소설이 아닌 문학장르인 책의 초판부수가 60만이라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통상 1만~2만부만 판매돼도 성공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요즘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부수다.

여기엔 이 책을 낸 분게이슨주(文藝春秋)사의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한몫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전 예약주문을 진행하는 경우, 근간도서에 대한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이번엔 이를 전혀 공개하지 않고 비밀주의 마케팅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극대화시켜 예약판매 수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에 알려진 정보라곤 고작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집필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길어졌다”는 작가의 메시지에 불과했다.

독자들은 △여느 작가의 작품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는 세계관과 문체 △소설 내용과 주제의 보편성 △등장인물에 투여된 감각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 등이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라고 꼽는다. 이 같은 반응은 중요하다. 하루키가 글로벌 문단에서도 확고한 기반을 굳힐 수 있었던 덕목 역시 그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 내면의 고독, 상처, 그리고 상실감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주인공의 내면 성숙의 과정에 대한 전개방식은 그만의 개성이자 최대의 무기다. 바로 이런 대목이 크게 어필하며 ‘역시 하루키다’라는 찬사와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서점 문을 열자 4시간 만에 320권이 팔렸다. 아침 5시50분부터 독자들이 몰려들었다.” 출판사와 에이전시 사무실, 그리고 고서점들이 밀집해 있는 도쿄 진보초(神保町)에 있는 산세이도(三省堂) 서점 반응이다. 이 서점은 하루키의 신작이 나오는 날을 겨냥, 아예 ‘무라카미 하루키도(堂)’라고 옥외간판을 바꿔 걸었다. 서점 개점시간도 평소보다 3시간 이른 오전 7시로 잡았다. 매장엔 하루키 소설 수백 권으로 1.4m에 달하는 높이의 ‘책탑’을 쌓아 특설 판매코너의 분위기를 살렸다. 시부야(澁谷)구 쓰타야 서점에서는 이날 오전 0시에 ‘자정 판매’를 실시했다. 여기에 140여명의 하루키스트(하루키 매니아)들이 몰려들었다. NTV, TBS 등 일본 민영방송은 심야 뉴스에서 신간 판매 현장을 생방송으로 보도하며 하루키의 열기를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음악도 한몫했다. 신작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순례의 해’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작품집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6곡으로 구성된 피아노 작품집 ‘순례의 해’는 리스트가 여행을 통해 보고 경험한 풍경이나 사건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 소설 열풍이 일어나자 제목에 차용된 리스트의 피아노 모음곡 ‘순례의 해’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상승하고 있다. 이는 그간 자신의 여러 작품에 음악적 이미지를 즐겨 활용한 ‘음악 매니아’ 하루키의 영향력이, 책을 넘어 음반시장까지 미치고 있는 단적인 예로 풀이된다.

하루키 소설이 세계적 화제가 되고 있는 만큼 우리 출판계에서도 이 책의 번역 출판권을 확보하려는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전작 ‘1Q84’(문학동네)가 현재까지 한국 시장에서 200만부나 팔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만큼 이번 신작에 대한 관심 또한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출판사는 10여곳인 것으로 전해진다. 판권 세일즈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국내 에이전시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출판사들이 이번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략적으로 함구하고 있다. 출판계 일각에선 과도한 선인세 경쟁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확히 공개된 바는 없지만 전작 ‘1Q84’의 경우 선인세가 10억원에 육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을 감안해 보면 이번 신간의 선인세도 대략 그 정도 선에서 결정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하루키 책의 판권을 독점 관리하고 있는 일본 ‘사카이에이전시’는 이번 신작에 관심 있는 한국 출판사들에 선인세를 포함해 구체적 홍보 마케팅 계획을 담은 제안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작소설이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시간적 요소를 감안, 제안서 마감시한은 아직 확정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로선 전작 ‘1Q84’를 성공적으로 흥행시킨 문학동네로 기회가 돌아갈지, 아니면 또 다른 출판사가 기회를 거머쥘지에 대해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다. 전작을 낸 경우, 특히 전작을 통해 성공적 성과를 올린 경우엔 차기작에 대한 우선권을 해당 출판사에 주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직 그 같은 관례가 적용되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동네가 전작 ‘1Q84’를 내기 전엔 문학사상사가 하루키의 책을 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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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용 케이엘매니지먼트 대표·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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