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8월,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책봉의례도.
1784년 8월,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책봉의례도.

19세기 말 이후 서양은 우리의 절대적인 지식·문화 수입원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유교지식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서양의 과학과 정치제도다. 엄청난 위력의 과학지식과 민중에 의한 정치가 선출 방식(민주정)은 지난 세기 동양인을 깊은 열등감에 빠뜨렸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유학의 정치이념은 흔히 민본주의(民本主義)·위민주의(爲民主義)로 불린다. 이것은 소수의 뛰어난 정치가가 천심(天心)을 담은 백성의 마음, 즉 백성의 원망(願望)과 요구를 헤아려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당연히 국민의(of), 국민에 의한(by), 국민을 위한(for)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백성을 위한’ 정치를 수행하도록 정치가 개인의 도덕심을 고무시켰을 뿐이다. 가령 민(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서 다수의사를 정책에 반영하는 ‘다수결’의 원리 같은 것은 유교지식인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무지(無知)한 이들에 의한 정치폭력을 의미할 뿐이다. 이들에게 ‘정치(政)’란 모든 것을 ‘바로잡는(正)’ 윤리적 행위였기 때문에 뛰어난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성인(聖人)이 세계의 운영원리(天理·天道)에 따라 백성을 가르치고 계몽해야(敎化) 했다.

조선 유학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어서 오백 년간 철저한 엘리트 의식과 관행을 고수했다. 정약용 같은 인물도 신국가건설안을 담은 ‘경세유표’에서 왕실귀족, 관료, 양인(良人), 천민(賤民)의 위계와 신분질서를 강조했다. 유교지식인은 모든 사람이 선한 본성을 갖고 있고 누구나 학문을 익힐 수 있다고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먼저 깨닫고 먼저 인격함양이 된 선각(先覺)·선배(先輩)와, 이들에 의해 교화될 후생(後生)·후배(後輩)의 서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도덕적 인격수양에 따른 정치권위의 차등화라는 독특한 신분차별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조선은 세습이 아닌 국가공식시험(科擧)을 통해 문무(文武)·양반(兩班)·관료를 선발했고, 이들은 세습국왕과 왕실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양천제(良賤制·백성, 노비)라는 태생적 신분차별제도가 엄존했고, 같은 양인이라도 관료사회에 입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간의 신분차별을 당연시한 조선 유학의 정치이념을 ‘민주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 가지 문제점이 더 있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학문, 정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총체적 이념이자 사유 체계다. 따라서 정치를 도덕·윤리로부터 해방시킨 서양 근대의 정치관에서 볼 때 조선 유학은 오히려 퇴행적이다. 정도전은 참된 사대부(士大夫)란 도덕군자인 ‘유(儒)’와 뛰어난 행정관료인 ‘이(吏)’의 능력이 결합되어 백성을 도덕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자라고 믿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도 ‘정교일치(政敎一致)’를 말하면서, 유교정치란 백성의 도덕심을 고양시켜 도덕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교지식인에게 ‘정치’란 뛰어난 소수의 정치가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도덕적 사회를 실현하는 윤리의 극대화 과정을 의미했다. 정치를 유학적 진리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늘날 서양에서 말하는 정치공학 혹은 기술로서의 고유한 정치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조선왕조의 정치 체제와 그것을 떠받든 유학 이념을 다시 보려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물음이 놓여 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이길래 오늘날 모든 정치제도와 가치관을 판가름하는 절대기준으로 군림하는가. 민주주의 자체로 칼날을 돌릴 때 조선 유학의 이념과 조선왕조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간주된 ‘민주정’과 그것의 이념인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서양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오늘날 대의민주정에서 주장하는 다수결 원칙, 선거제, 대표제는 서양학자들 사이에서도 민주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 것으로 부정되고 있다,(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특히 국민의 권리를 대행할 정치지도자를 선발하는 ‘선거’ 제도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극에 달했다.

논리적으로 개인의 권리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는 선거제도가, 기존에 습득한 부와 권력에 따라 특정집단과 사회성원에게만 유리한 비민주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양에서도 참된 민주정의 유일한 역사적 선례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있었던 아테네의 ‘추첨제’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기득권, 계파나 인맥, 조직이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도록 무작위적인 우발적 선출방식으로 ‘추첨제’를 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법원의 배심원단 선발, 의회 입법단 구성, 민회 운영 등 모든 정치 분야에서 적용되었다.

지금까지 조선 유학 연구자들은 정약용이나 최한기 같은 대표적 실학자에게서 서양 민주주의에 비견될 만한 선거(선출)의 맹아적 관념이 있었는지 찾으려고 고심했다. 하지만 지방 향촌의 유력자에게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자를 정계에 천거하도록 한 ‘향거리선(鄕擧里選)’의 추천제가 제도화되었을 뿐 민(民)에 의한 정치가의 직접선출(선거)이란 관념은 왕조사회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층민에 대한 양반지도층의 철저한 통제와 지배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요점은 이상적 정치제도나 정치운영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선거’라는 한 가지 쟁점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정치가의 선출은 고사하고 조선에는 동아시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격하고 잔혹한 노비제가 있었다. 부모 한쪽이라도 노비면 후손 대대로 노비가 되어 모든 세대마다 노역에 종사토록 한 종천제(從賤制)나 세역법(世役法), 도망간 사노비를 추적하는 데 국가공권력을 동원했던 추쇄법(推刷法) 등이 법전에 명문화되어 인구 절반 이상의 천민을 세습시켰던 곳은 동시대 한·중·일을 비교할 때 조선이 거의 유일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철저한 노예제 사회에 기초했다. 은광 채굴에 투입되었던 상당수 노예들이 아테네 경제력을 담당했으며 지중해에서 수백 년간 지속된 폴리스 간의 치열한 살육전을 통해 아테네인은 전리품으로서 수많은 노예를 충당했다. 일반 자유민에 대한 정치권한을 ‘추첨’을 통해 실질적으로 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테네가 귀족 및 중간층의 기보병 부대에 이어 해상 전투를 담당할 도시 자유민의 군사력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공간을 달리한 조선에서든 아테네에서든, 우리는 과거로부터 정치제도에 대한 어떤 완벽한 모범답안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에도 부족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중요한 정치적 통찰들, 이념을 현실 속에 제도화하면서 그들이 겪었던 파행과 갈등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반면교사 삼으면 된다.

조선의 정체(政體)는 군주정(君主政) 혹은 왕정(王政)이다. 전자가 특정 왕실의 세습군주를 정치 주체로 본 것이라면, 후자는 군주이면서 성인인 이상적 정치지도자(철인왕)가 왕도정치를 편다는 윤리적 의미까지 함축한다. 신종 유교국가 조선을 건립한 지식인들, 정도전·조준 등은 군주정을 수용했지만 정치 운영은 뛰어난 지식인 관료가 전담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에 반영된 총재론(冢宰論), 재상 중심의 국정운영론은 유교지식인에게 정치·경제·군사·재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국공신 조준도 재상이란 임금의 다음 지위지만 임금과 천위(天位)를 함께 나누고 천공(天工)을 대신하므로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高麗史’ 列傳 31, 趙浚) 개혁파 동료 윤소종도 마찬가지다. 군왕의 자리는 천위이고 백성은 천민(天民)인데 임금이 가진 명기(名器)와 관작(官爵)은 하늘의 소유이므로 군왕이 사사롭게 다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高麗史’ 列傳 33, 尹紹宗)

군주정에서 왕의 권력을 상징적 권위에 가두려고 한 사대부들의 정치 운영은 결국 태종·세조의 무력에 의한 정변과 쿠데타를 불러일으켰다. 이성계만 해도 정도전이 작성한 국왕 수교를 통해 천직(天職)을 재상과 함께 다스린다는 점을 인정했다.(태조실록 4년 4월 24일) 초기 법전인 ‘경제육전’도 의정부 중심 육전 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정권이 재상에게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정도전의 정치 감각을 공유했다.(경제문감·상권) 그러나 태종은 정사를 홀로 감당하겠다고 자청하면서, 하륜의 발의를 통해 의정부서사제를 위축시키고 육조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토록 한 육조 직계제를 강행했다.(태종실록 14년 4월 17일) 세조도 모든 명령 계통을 일원화해서 한 사람(왕)에게 명령을 듣도록 하는 정치의리를 펼쳤다.(세조실록 7년 6월 23일) ‘경제육전’ ‘속육전(續六典)’ ‘속대전(續大典)’ 등 여러 법령이 차례로 개편되면서 ‘경국대전’ 편찬사업이 세조 때 속행된 것도 결국 왕권강화를 위해서다.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이조(吏曹) 부서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언론과 감찰을 맡은 사간원·사헌부, 수도 및 도성 방위를 맡은 군영아문(軍營衙門)이 직계권(直啓權)을 갖고 국왕에게 직속되었다.

‘경국대전’은 왕권과 재상권을 둘러싼 건국 이후 백 년간 정치 투쟁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강화에도 불구하고 법전에서는 백관(百官)을 통솔하며 온갖 정무(政務)를 담당하는 재상의 막강한 권한을 명시했다. 더구나 ‘경국대전’이 최종 완성된 1485년, 성종은 기득권을 독점한 훈구공신 및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관료로 구성된 대간(臺諫)제도를 활성화했다. 홍문관마저 언론기관으로 만들어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三司) 관료가 모두 고관대작을 감찰·탄핵하도록 했다. 사실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고려한 것이 바로 왕권(王), 재상권(冢宰), 언론권(臺諫) 간의 권력견제와 균형이었는데 이런 정치 구상이 몇 세대를 지나 현실화된 것이다. 군사력을 독점한 태종조차 대간(臺諫)의 반대가 너무 심해 관직을 제수하는 임금의 명령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개탄했을 정도다.(태종실록 11년 4월 14일) 정5·6품의 이조전랑(吏曹銓郞)과 이들이 천거해서 선발한 삼사(三司) 관리들은 고위공직자 인사적부심제인 ‘고신서경권(告身署經權)’을 독점하면서, 조선의 공직사회에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대소(大小) 신료 간의 권력견제 장치로 고안된 대간제도는 점차 왕의 통제마저 벗어났다. 언관(言官)의 발언 수위는 대신을 사람 행실을 못하는 자(不人), 간사한 귀신(奸鬼), 아첨꾼 등으로 묘사한 정도를 넘어 빈번히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3년 7월 21일, 정6품 정언(正言) 조순(趙舜)은 30세 나이로 70이 넘은 전직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을 공격하며,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노사신의 ‘인육을 먹고 싶다(欲食其肉)’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노사신이 젊은 언관들을 비판하며 이들이 공경 대신뿐만 아니라 이제 왕까지 능멸한다고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연산군은 “선왕께서 유생을 벌주지 않았기에 이렇게까지 왕을 능멸하는 풍속이 생겼다. 일마다 모두 의견을 수렴해서 처리한다면 임금의 권한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연산군 1년 1월 30일) 대간제도를 옹호한 부친 성종조차 회의를 표명했다. “대간이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대간이 나오라고 하면 나온다면 어찌 이것이 임금의 체통이겠는가!”(성종실록 23년 12월 25일),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격이니 참으로 불미스럽다.”(성종실록 25년 5월 5일) 왕권이 최고로 강화된 숙종 때도 중국 명나라 조정은 “조선 왕의 세력이 미약하고 오히려 신료가 강성하다”고 평가했다.(숙종실록 1년 윤 4월 29일)

여말선초의 사대부, 조선 초기의 훈구세력, 성종·중종의 비호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 지식인까지 이들에게는 차이점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 왕조처럼 이민족의 침입과 전란으로 완전히 세대가 단절된 경우가 없었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대대로 쌓인 문벌을 자랑하며 권세를 누렸고 왕권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이 남송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했을 때 그토록 화려했던 송대 사대부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바닥에 떨어졌다. 몽골 정복군의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전락한 사대부들은 창기(娼妓)보다 못하고 거지(丐)와도 같은 사회의 가장 무능력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어렵게 주자학을 원제국의 관학으로 등극시켰지만, 이들의 주자학은 더 이상 정교한 학문이나 원대한 치국방략이 될 수 없었다. 중앙에서는 관리 진출을 위한 고식적 제도로, 재야에서는 이민족과의 긴장 속에 저항을 위한 과도한 실천윤리학으로 그 성격이 편향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훈구·사림에 관계없이, 심지어 정약용처럼 유배의 처지에서도 사족(士族)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상했고 중앙의 정치권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왕권강화를 위해 뜻을 함께했다고 알려진 정약용도, 정조가 사대부를 존경하지 않고 사인(私人)으로 삼는 것에 반발,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없애라고 주장했다.(‘경세유표’ 春官禮曹, 弘文館) 이것은 영조·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군사(君師)를 자처하면서 사대부의 권력을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탕평 논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사대부가 국왕을 가르치던 경연(經筵)을 무시하고 대신 자신이 만든 새로운 경사강의제(經史講義制)를 내세웠다. 이것은 정치 일인자인 국왕이 학자가 되어 지식인 관료를 가르친 일종의 중앙공무원 재교육 시스템이었다. 정조는 유학의 학문적 권위자를 자처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려고 했다. 1920년대 식민지 지식인 안확(安廓)이 ‘조선문명사’에서 지적했듯이, 영·정조시대 국왕의 권력 독점은 왕권과 신권, 사대부 정파 간의 미묘한 권력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조선왕조의 운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탕평 정치는 일인자의 사망 이후 권력을 특정 가문에 몰아주는 19세기 세도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이질적인 학파를 모집단으로 해서 성립된 조선 중·후기의 붕당(朋黨)은 이념을 달리한 오늘날의 정당이며, 이들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은 입법·사법·행정의 서구식 삼권분립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 균형과 견제 논리를 창출했다. 왕과 사대부, 사대부 간의 첨예한 경쟁과 경합으로 점철된 조선의 정체(政體)는 결코 민주정이 아니었다. 조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관치(官治)사회이며 유교지식인들은 사회구성원 간의 위계와 서열이 명백히 나눠져야 국체(國體)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어도 인간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심사숙고했고, 정치권력의 집중과 부패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책을 모색했으며 자신들의 의지를 법전으로 제도화했다.

이제 우리에게 되물어보자. 우리가 염원하는 민주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나. 왜 아직도 우리는 제왕학, 최고경영자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동경하며, 누구도 2인자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갖고 있을까. 이 점에서 민주주의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조선 지식인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이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정을 다수에 의한 독재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한 이래 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18세기 미국 헌법의 초안자들도 자신의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민주정을 회피하고 로마 공화정(共和政)의 정치 전통을 따랐다. 글자 그대로 민중 모두가 주인이 되는 그날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에 ‘민주공화정’이라고 명시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마치 왕조 사회에서 권력찬탈을 평화로운 정권 교체인 선양(禪讓)이라고 공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초보적 감각을 인정하면 조선 유학의 정치 논리에도 여전히 숙고할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백민정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로 연세대박사학위. 저서 ‘정약용의 철학: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백민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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