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
권석

“진즉부터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저도요.”

그 남자 그 여자가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오래전이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것은 처음이다. 여자는 남자 때문에 요즘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남자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도 잘나가는 그 여자 때문에 배 아픈 걸 견디며 머리 쥐어짜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맞수다. 여자는 SBS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힐링캠프’ ‘화신’을 만든 최영인 CP(책임 프로듀서)이고, 남자는 MBC의 최근 히트상품인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를 기획한 권석 CP이다. 두 사람은 현재 예능계의 최고 스타 PD들이다. 지난 4월 30일 강풍을 몰고 온 봄비가 한바탕 꽃가지들을 흔들고 지나간 봄밤, 서울 종로구 북촌 인근 한 카페에서 주간조선이 두 맞수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들은 해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만나 심야까지 ‘예능공화국 대한민국’을 안주 삼아 ‘끝장 토크쇼’를 벌였다.

최영인
최영인

대한민국 TV채널은 언제부터인가 예능이 점령했다. 채널만 돌리면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예능 프로그램 한 개만 대박이 터지면 방송국 손익계산서가 순식간에 역전될 만큼 주요 돈줄이 됐다. 프로그램의 위상도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예능이 ‘코미디 쇼’에 한정된 구색 맞추기용이었다면 현재는 황금시간대를 꿰찬 메인이 됐다. ‘빨리 뜨고 싶다면 예능으로 떠라’가 연예계 성공 공식이 될 만큼 최고 스타들이 출연자 명단에 앞다퉈 이름을 올리고, 대통령 후보들도 기꺼이 게스트 자리에 나선다. 그야말로 ‘예능 공화국’이다.

시청률 그래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언제든 채널 돌릴 준비가 돼 있는 TV 리모컨과 싸우며 안방의 웃음을 책임지고 있는 두 PD의 입을 통해 TV 화면 뒤에서 벌어지는 방송국 간 치열한 ‘예능’ 전쟁과 제작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들었다. ‘세거나 착하거나’, 요즘 예능의 두 트렌드처럼 최영인 PD는 ‘세’ 보이고, 권석 PD는 ‘착해’ 보인다. ‘착한 예능’ 시대를 연 ‘센’ 여자와 ‘센 예능’의 선두에 선 ‘착한’ 남자, 술잔을 앞에 둔 두 사람의 대화는 취재진이 “저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나?” 걱정이 될 정도로 솔직했다. 방송가에서 최 PD는 ‘섭외의 여왕’으로, 권 PD는 ‘잘 마른 멸치’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최영인 “오늘도 회의 시간에 ‘권석’이란 이름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프로그램 두 개가 다 뜰 수 있어요? 요즘 MBC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어요.”

‘섭외의 여왕’이 선공을 시작하자 ‘잘 마른 멸치’가 받아쳤다.

권석 “MBC가 그동안 엄청 헤맸잖아요. 바닥을 쳤으니 올라올 때가 됐죠. TV 프로그램도 보면 경기순환 논리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20년 경력의 프로들답게 진행이 필요 없었다. “녹음기는 잘 빨아들이고 있나?” “기사 분량은 어떻게 뽑나?” 전문용어 써가며 진행까지 하고 나섰다.

“예능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툭 던진 기자의 질문을 받아 두 맞수가 말을 주고받으며 원인 분석부터 시작해 마무리까지 알아서 ‘분량’을 채웠다.

최영인 “우리나라에 오락거리가 없다는 거죠. 그만큼 TV에 의존하는 거고.”

권석 “주 5일 근무제가 되고 놀거리를 찾게 되면서 예능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어요. 과거엔 엄숙하고 웃는 것이 죄악시됐지만 이젠 웃을 준비가 돼 있잖아요. 방송국 입장에서도 돈 벌어주는 효자니까 예능 비중이 점점 많아지고.”

최영인 “예능은 대박 한번 치면 광고가 계속 따라붙어요. 2~3년 이상 따뜻하게 살 수 있어요. 드라마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잘돼도 두세 달 방송하는 그때뿐이거든요. 예능이 시청자 충성도가 높아요. 또 드라마는 시작하면 접을 수도 없지만 예능은 아니다 싶으면 접으면 되니까.”

권석 “드라마에 비해 제작단가도 낮아서 예능이 투자 대비 수익도 좋죠. 우리가 입사할 때보다 방송국 내부에서의 위상도 달라졌어요. 과거엔 신입 PD 사이에서 예능이 기피 부서였는데 요즘엔 가장 경쟁이 치열해요.”

최영인 “사람들이 많이 봐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거죠. 예능의 영역도 확장됐어요. 아예 우리는 예능과 교양국이 합쳐졌어요(총 127명, MBC는 예능 따로 교양 따로 총 140명 선). 교양 PD들이 아무래도 접근이 다르다 보니 새로운 것이 나오더라고요. SBS ‘짝’도 교양 PD출신이 맡다 보니 ‘1호 여자’ ‘2호 남자’ 같은 설정이 나온 거죠.”

권석 “사실 예능 프로그램이 많기는 해요. 포맷들도 고만고만하니 제 살 깎아 먹기죠. 밤 11시대만 해도 전부 토크쇼 일색이잖아요. 차별이 안 되니까 서로 마이너스이고. ‘예능 공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예능에 대한 피로감도 많을 거예요.”

최영인 “종편까지 더해 제작 경쟁이 갈수록 치열하고 힘들어졌어요. 우리도 밤 11시대 새로운 장르 개발이 최대 과제예요.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 판단도 매우 빨라졌어요. 예전엔 3개월 걸리던 것이 한 달이면 성공·실패 여부가 결론이 나요. 시청자들이 무서워졌어요.”

권석 “요즘엔 재미있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해요.”

최영인 “재미없어도 새로우면 용서가 되지만 했던 것 따라하면 바로 채널이 돌아가죠.”

권석 “MBC 김영희 PD가 한 말이 있어요. 첫째 남이 했던 것은 죽어도 안 한다. 두 번째가 백 가지가 같아도 한 가지만 다르면 된다.”

최영인 “맞아 맞아.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해. 최근 3~4년 사이 새로운 게 없었는데 이번에 MBC에서 새 콘셉트로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가 나오니까 성공했잖아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방송국 간의 시청률 경쟁으로 넘어갔다. 두 PD 모두 눈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스마트폰 들고 시청률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권석 “우리도 계속 망하다 보니 지지고 볶다 새로운 게 나온 거죠.”

최영인 “맞아요. 우리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경우가 없어. 총 맞을 때까지 뽕을 뽑아야 끝나. 결국 예능은 일희일비예요. 잘나갈 때 실컷 즐겨야지 겸손 떨다 추락하면 바로 고개 숙여야 하거든요. 하하. MBC가 뜨니까 회사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계속 새로운 것 내놓으라고 하고, 전부 바꾸라고 하고.”

권석 “주가지수처럼 예능지수도 사이클이 있어요. 사실 잘나갈 땐 모험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정상에 있으면 안주하게 되고, 바닥을 기다 보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막 던지니까 먹히는 거고. ‘아빠 어디가’도 기획할 땐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어요.”

최영인 “우린 ‘아빠 어디가’라는 제목 듣는 순간 벌써 불길했어요. 뜰 것 같더라니까요. 요즘 SBS는 밤 10시대의 드라마까지 부진해서 뒤에 따라붙는 예능이 더 고전하고 있어요. 프로그램이 끝나면 리모컨이 사정없이 움직이거든요. 앞 드라마 시청률이 7%라면 예능은 2%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해요.”

권석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외국보다 우리 예능 프로그램이 제일 독 하고 재미 있어요. 입사 초기만 해도 일본 프로그램 베끼느라고 정신 없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 포맷을 수출하잖아요. ‘나가수’ ‘아빠 어디가’도 중국에 팔렸어요. ‘진짜 사나이’도 사겠다고 하고. 냄비처럼 인기가 확 뜨거워졌다 식으니까 계속 바꿔야 하고 그러다 보니 진화할 수밖에 없죠.”

최영인 “외국에 비해 연예인 수가 적으니까 프로그램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어요. 더 독하고 더 세지고. 독한 것으로 따지자면 사실 ‘정글의 법칙’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군대’가 있더라니까요. ‘진짜 사나이’는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권석 “돌던 아이템이죠. 어떻게 접근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폭탄주처럼 우리가 독하고 ‘센’ 거 좋아하잖아요. 근데 힐링캠프가 그걸 확 뒤집었잖아요. 착한 예능으로.”

최영인 “MBC ‘무릎팍 도사’ 잡으려고 머리 맞대다 작가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힐링’이란 키워드가 뜨더라면서. 처음에 ‘힐링캠프’라는 이름을 두고 위에서 난리가 났어요. ‘영어 써서 되는 거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면서. 게다가 이경규씨는 자꾸 ‘휠링’이라고 하지를 않나. 운이 좋았던 거죠. 사실 모든 토크쇼는 힐링이에요. 잘나가든 못 나가든 남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배설하는 기분인 거죠.”

권석 “착한 예능 중에서도 힐링캠프는 뭔가 따뜻하게 남는 것이 있어요. 먹고 나면 속이 편한 음식처럼.”

최영인 “이제 가짜는 안 통해요. 시청자들이 얼마나 정확한데요. 진짜와 가짜를 확실히 구별해요. 그러니 가식적이다 싶으면 가차 없이 편집이에요. 5시간 이상 녹화해서 분량도 넘치는데 그런 걸 왜 넣겠어요.”

권석 PD가 기획한 MBC 히트 예능 프로 ‘아빠 어디가’(위)와 ‘진짜 사나이’.
권석 PD가 기획한 MBC 히트 예능 프로 ‘아빠 어디가’(위)와 ‘진짜 사나이’.

권석 “‘아빠 어디가’도 각본이 거의 없어요. 리얼리티를 강화하기 위해 처음 기획의도가 ‘1분 후를 모르게 하자’였어요. 시청자도 출연자도, 심지어 연출자도 1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죠. 그래야 시청자들이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거든요. 착하고 독한 예능에 이어 요즘 트렌드가 이렇게 리얼리티를 강화한 ‘관찰 예능’이에요. 트렌드에 묻어가는 것이 좋더라고요.”

PD들 사이에선 “섭외가 제작의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핫’한 게스트 모시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최 PD는 방송가 공인 ‘섭외의 여왕’. 권 PD가 최 PD를 띄우며 살짝 ‘영업비밀’을 물었다.

최영인 “섭외는 프로그램의 힘이지 PD 한 사람의 능력은 아니에요. 굳이 노하우를 말한다면 거절당해도 ‘오늘 안 되면 다음에 되겠지’ 생각해요. 저축해 놓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씨를 뿌려 놓고 계속 공을 들여야 해요. 다섯 번 만에만 섭외에 성공해도 빠른 거예요.”

권석 “그렇게 뿌려 놓은 씨들이 많겠네요. 지금도 계속 싹이 자라고 있겠어요. 계속 연락하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느닷없이 전화하는 것도 어색하고 그러다 보면 잊어먹고.”

최영인 “씨를 뿌려 놔도 타이밍을 맞추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전 사심 많은 섭외를 해요. 출연자를 사랑해야 좋은 감정이 방송으로 연결되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주로 공략해요. 차인표씨 같은 경우 소설책 내고 사인회 할 때 책 들고 줄 서서 사인 받았잖아요. 그렇게 공들여 섭외한 차인표씨가 힐링캠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줬어요.”

권석 “김수로씨 연극 공연에 갔는데 최 PD님이 보낸 화환이 있더라고요. 같이 프로그램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놀랐어요.”

출연자 섭외도 문제지만 프로그램 성공의 관건은 진행자이다. ‘카드 돌려 막기’처럼 채널을 돌려도 똑같은 얼굴을 보면서 ‘우리나라 진행자가 저렇게 없나’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다른 프로그램과 다르게 하기 위해 온갖 머리를 굴리면서 왜 같은 진행자를 놓고 박 터지는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는 것일까. MBC는 최근 강호동과 유재석을 SBS에 내줬다.

최영인 PD가 기획한 SBS 간판토크쇼 ‘힐링캠프’(위)와 ‘화신’.
최영인 PD가 기획한 SBS 간판토크쇼 ‘힐링캠프’(위)와 ‘화신’.

최영인 “대본의 역할은 50%라고 생각해요. 준비한 것을 반도 못 먹는 진행자가 있는 반면 찰지게 씹어 100% 이상을 소화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진행자가 중요하죠.”

권석 “시청자들도 당장은 재미가 없어도 강호동·유재석이 하면 기다려줘요. 계속 좋아지니까.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에이스를 놓으면 다른 방송국에서 채가니까 꼭 쥐고 있는 거죠. 강호동·유재석을 SBS에 뺏기고 만들려니 힘들었어요. 한편으론 빈곤 속에서 만들려니 새로운 것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

최영인 “맞아 맞아. 결핍이 에너지가 돼요.”

권석 “버릴 수 없는 에이스 카드가 계륵이 될 수 있어요. 그들에게 맞추다 보면 새로운 걸 시도하기 어려우니까.”

최영인 “제작 환경이 갈수록 힘들어져요. 녹화 분량도 옛날하곤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고요.”

권석 “무한도전 찍을 때 카메라 3대가 전부였는데 ‘아빠 어디가’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따라 붙으니 30대가 돌아요. 3시간만 찍어도 90시간 분량이 나와요. 편집하려면 죽는 거죠. 단계별로 프리랜서까지 15명 정도가 붙어요. PD들도 힘들어지고, 연기자들도 군대 가랴 정글 가랴 힘들고, 제작비 많이 드니 방송국도 힘들고.”

최영인 “그래도 PD에겐 시청률보다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나. 물론 시청률이 계속 안 나오면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죠. ‘혼자 예술하고 앉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하하.”

제작환경 이야기가 나오자 ‘맞수’가 ‘동지’가 됐다. 권 PD는 “아이가 PD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선뜻 하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했다. 최 PD는 “밤 새는 일이 허다하고 힐링캠프 녹화가 토요일이다 보니 주말도 없고 체력도 달리고 남편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PD라는 직업에 만족한다”에는 두 사람 모두 의견 일치.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냐는 질문에 최 PD는 “10년 뒤에도 힐링캠프를 만들고 싶다”, 권 PD는 “착한 예능을 하고 싶다”면서 “시청률 의식하다 보니 너무 독하게 만든 것 같다”고 했다.

권 PD는 지난해 제작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고 제목을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고 했다. 최 PD가 책을 화제로 올리더니 말했다. “아이디어는 정말 책 제목처럼 성실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번쩍’ 하는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쌓이고 투자한 게 있어야 좋은 게 나와요. 처음엔 반짝거리는 후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성실함이 성공하는 것 같아요.”

시청률 그래프 위에서 매일 물러설 수 없는 승부를 벌여야 하는 이들이지만 바라보는 곳은 같았다. 이들이 ‘숫자’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 시선을 계속 맞춘다면 독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아닌 따뜻하고 유쾌한 웃음이 넘치는 ‘예능 공화국’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권석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1993 MBC 예능국 PD

현 MBC 예능1국 예능1 부장

대표 프로그램

무한도전

놀러와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


최영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1990년 EBS PD

1996년 SBS PD

현 SBS 제작본부 제작3CP 부장

대표 프로그램

진실게임

야심만만

힐링캠프

화신

키워드

#맞수 토크
황은순 차장 / 유창우 영상미디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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