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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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김치는 못 참는 한국인들이 왜 따분한(boring) 맥주는 잘 마실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2년 11월 22일자 ‘화끈한 음식, 따분한 맥주(fiery food, boring beer)’라는 기사에서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 잡지는 “오비와 하이트진로 양대 업체가 장악한 한국 시장에선, 원료인 맥아 대신 쌀이나 옥수수를 넣어 맥주를 만들기도 한다”면서 “영국 장비를 수입해 만드는 북한의 대동강맥주가 훨씬 맛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에는 필자의 이름이 없다. 기사에 필자 이름을 쓰지 않는 이코노미스트의 전통 때문이다. 기사를 쓴 사람은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다니엘 튜더(Daniel Tudor·31) 기자.

기사가 나간 지 6개월 남짓한 시간이 흐른 5월 10일, 그가 한국인을 위해 맛있는 맥주집을 차렸다. 서울 용산구 녹사평에 문을 연 수제맥주(Craft Beer) 전문점 ‘더 부스(The Booth)’. 주말이던 6월 8일, 이곳에서 그를 만났다.

“사실입니다.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어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한국 체류경력 도합 5년의 튜더는 능숙한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7월에 이코노미스트에서 퇴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더 부스에서 판매하는 맥주는 ‘빌스 페일 에일(Bill’s Pale Ale)’이라는 에일 맥주와 ‘헤페바이스’라는 밀 맥주, 두 가지뿐이다. 에일 맥주는 청량감 있는 국내 맥주와 달리, 쌉쌀한 홉의 맛을 잘 살린 전형적인 하우스 맥주. 밀 맥주는 걸쭉한 맛이 특징인데, 이날 다 떨어져 맛보지 못했다. 가격은 두 종류 모두 1파인트(568㏄·영국의 맥주컵 단위) 한 잔에 5000원으로 수입맥주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안주는 홍대앞 ‘몬스터피자’에서 제조법을 받아 구운 피자 한 가지. 종류는 살라미피자와 치즈피자, 두 가지로 단출하다. 가격은 한 조각에 3500원(한 판에 1만8000원)으로, 요기를 하기엔 한 쪽이면 충분하다.

맥주 제조법은 미국인 ‘브루마스터(양조 장인)’로부터 직접 전수받았다고 한다. 양조장은 가평에 있는 ‘카파 브루어리’를 이용한다. 국내에선 허가받은 4개의 양조장(하이트·카스·세븐브로이·카파)에서 제조한 맥주 외엔 판매할 수 없다.

튜더 기자는 “레시피를 전수해준 브루마스터의 이름이 빌(Bill)”이라며 “그의 이름을 따서 ‘빌스 페일 에일(Bill’s Pale Ale)’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튜더가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월드컵 열풍이 한창이던 2002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하던 그는 “한국인의 화끈한 열기와 친절함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졸업 후 2004년 다시 한국을 찾아와 영어강사, 증권사 투자분석가로 근무하다 2007년 고향인 영국 맨체스터로 돌아갔다. 2009년 맨체스터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2010년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으로 임명돼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서울의 수입맥주점에서 북한 ‘대동강맥주’를 마셔봤다”고 했다. “북한의 대동강맥주는 홉의 맛이 살아 있었어요. 하지만 그에 비하면 한국 맥주는 뭐랄까, 좀… 아, 싱겁다. 그 말이 맞겠네요. 네, 싱거웠어요.”

북한 ‘노동신문’ 2011년 10월 13일자는 대동강맥주에 대해 “2008년 12월 국제규격화기구(ISO9001)의 품질관리체계 인증을 받았고 2010년 10월에는 북한에서 처음으로 식품안전관리체계인증을 획득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2008년 3월 9일 “북한은 2000년 영국의 맥주회사 어셔스로부터 가동이 중단된 트로브리지(Trowbridge) 지역 공장을 인수하면서 고급 맥주 생산에 뛰어들었다”면서 “북한은 이 공장의 설비를 해체해 평양으로 옮긴 뒤 재조립해 2002년 4월부터 대동강맥주를 생산했다”고 했다. 대동강맥주는 천안함사태로 북한 물품 수입을 제한한 ‘5·24조치’ 이후 수입량이 급감, 현재는 수입되지 않고 있다.

튜더 기자는 “그렇다고 한국 맥주가 완전히 맛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오비나 하이트는 소맥(소주+맥주)을 만들기 좋고, 특히 치맥(치킨+맥주)용으로 마시기에는 최고입니다. 하지만 다양하고 역동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이, 왜 맥주만큼은 다양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한국 맥주에 아쉬움을 갖고 있던 그는 증권사 근무 시절 만난 양성후(27) 투자분석가와, 양씨의 친구인 한의사 김희윤(27)씨와 의기투합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맥주 매니아’라는 점. 서울 곳곳을 찾아다니며 수제맥주를 골라 즐기던 세 사람은 “맛있는 맥주를 직접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자”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일종의 동호회처럼 맛있는 맥주를 찾아 마시던 이들은 결국 쌈짓돈 1억원을 마련해 수제맥주(craft beer)집을 열었다.

‘한국: 불가능한 나라’를 쓴 다니엘 튜더. 그가 BBC TV에 출연한 장면이다.
‘한국: 불가능한 나라’를 쓴 다니엘 튜더. 그가 BBC TV에 출연한 장면이다.

동석한 김희윤씨는 “갑자기 결정해 두 달 만에 가게를 얻고, 보름 만에 인테리어를 끝냈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더 부스의 인테리어는 즉흥적이다. 바닥에는 나무상자를 얼기설기 쌓아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불규칙하게 놓여 있다. 격식을 갖춘 바(bar)가 아니라 편하게 한잔 하고 가는 선술집(pub) 분위기다.

이 집 벽면에는 런던 뒷골목의 ‘그래피티(graffitty)’를 연상케 하는 그림과 낙서가 그려져 있다. 앤디 워홀의 ‘행복한 눈물’ 패러디를 포함해 각종 그래픽 아트가 울긋불긋하다. 김씨는 “한쪽 벽면은 홍익대 미대생들이 그려줬고, 다른 쪽 벽면은 직접 그렸다”고 했다. 그는 “오픈이 임박할 때까지 인테리어를 다 끝내지 못해 고생했다”면서 “나머지 한 면은 칠판을 연상케 하는 진녹색 페인트로 칠한 뒤, 분필을 이용해 글씨로 채웠다”며 웃었다. 그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강동구에 있는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고 저녁이면 ‘더 부스’로 출근해 새벽 1시까지 맥주와 안주를 판다. 김씨의 친구인 양성후씨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근무가 끝난 뒤 더 부스를 찾아 다음날 1시까지 일한다. 힘겨운 일과다.

“하지만 재미있어요.” 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즐겁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만나 맛있는 맥주를 마셔서 좋다”는 것이다. 튜더 기자는 “한국 맥주는 ‘치맥(치킨+맥주)’에 제격이지만, 더 부스의 맥주는 ‘피맥(피자+맥주)’에 제격”이라고 했다.

튜더 기자는 지난해 11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란 ‘불가능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한국을 묘사한 ‘한국: 불가능한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는 영문판 책(미국 터틀출판사)을 출간했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역동적으로 살고 싶다”며 “당분간 출판과 맥주집에 전념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6월 말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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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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