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고통은 저항에서 비롯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내 모습이 되길 원하는 갈망에서 괴로움이 시작되지요. 나는 이런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이렇게 아파해야 할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저항할 때 사람들은 고통을 느낍니다.”

지난 6월 26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유나방송’(인터넷 불교방송·02-3216-1789)에서 만난 정목 스님(법랍 38년)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님은 평생을 치열하게 정진해온 수행자다. 38년의 승려 생활 중 참선수행 10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을 장애인, 환자, 노약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며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돌봐왔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고통은 내가 원한 게 아니잖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라며 저항합니다.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내가 한 것이 아니야’라는 말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고 미루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냥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거죠. 끌려가면 괴로워집니다. 괴로우니까 더 저항하게 되죠. 그러면 고통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스님은 고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고통은 내가 괴롭다고 느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괴롭다고 느끼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 고통을 만든 것이 누굴까요?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받아들이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면 그 순간 고통은 사라집니다.”

지금은 ‘힐링 전도사’로 유명하지만, 스님은 원래 끓는 피를 가진 ‘열혈여아’였다. 초등학교(서울 삼선초) 때는 ‘잔다르크’로 통했다고 한다. 4학년 땐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6학년 오빠들과 ‘맞짱’을 뜨고 다녔고, 중학교(동구여중) 땐 부당하게 체벌을 가하는 선생님에게 ‘항의’를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잘못한 게 없다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이 저한테도 손을 휘두르시는 거예요. 그 어린 나이에, 제가 그 선생님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어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스님은 “이런 기질이 출가한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고 했다. “오래전 일입니다. 절에 연등행사가 있었는데 웬 노부부가 찾아오셨어요. 자식들을 위해 연등을 켜고 싶은데 법당 안에 달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당시엔 법당에 켜는 연등과 사찰 마당에 켜는 연등이 달랐어요. 법당이 더 비쌌거든요. 노부부는 ‘돈이 이것밖에 없다’면서, 법당 안에 켜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어요. 접수받는 사람들이 안 된다고 거절하는 거예요. 저도 얘기했어요. 저렇게 간절한데, 좀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다 제가, 결국…. 사고를 쳤어요.”

스님은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행사가 끝나면 이듬해에 다시 쓰기 위해 연등을 거둬들입니다. 제가 절에 있는 연등을 모두 떼어서는, 한데 모아놓고 불을 질렀어요. 잿더미가 됐지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너 이제 큰일났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두렵지 않았어요. 각오를 하고 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날 큰스님(광우 스님, 정목 스님의 은사)이 오시길 기다렸다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는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말씀드렸죠. 제가 다 태웠으니, 내년엔 다 똑같은 연등으로 다시 하시라고요. 큰스님 표정이 딱 굳어졌습니다. ‘왜 태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답했습니다. ‘절에 내는 돈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닌 것으로 안다’라고요.”

스님은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고 했다. “정말 죽을 각오를 했었어요. 큰스님은 ‘허’ 하고 혀를 차시더니 ‘그럼 할 수 없지 뭐’ 그러고 마시는 거예요. 나중에 저를 부르시더니 ‘정목아, 사찰 살림을 꾸려가려면 시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네가 아직 어리구나’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그냥 넘어가셨어요.”

정목 스님의 이런 기질은 사회참여로 나타났다. 대학(동국대 선학과) 시절엔 노동자와 농민을 외치며 ‘현장’을 찾았다. 시위대와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랐어요. 제가 전경대를 향해 ‘이 새끼들, 뭐하는 거야’라고 한 거예요. 진압대를 그 순간 ‘적’이라고 여긴 거지요. 그러는 저를 보고 제 자신이 더 놀랐어요. 승복을 입고 있는 내가, 진압대를 ‘적’으로 봤다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세상을 ‘나’와 ‘적’으로 구분할 거면 내가 뭐하러 중 노릇을 하고 있나. 저들도 똑같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인데….”

스님은 “그 순간 시위대에서 빠졌다”고 했다. “누군가와 싸워서 이기는 길을 찾을 것이 아니다. 싸울 대상이 무엇인지, 그 대상이 과연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수행에 전념했지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의 세계란 어떤 것인가. 참선도 하고, 호흡도 하고, 배워도 봤습니다. 10년 동안 치열하게 찾아다녔어요. 찾으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알게 됐습니다. 깨달을 게 없다는 것을 말이죠.”

스님은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를 떠난,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저항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욕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 하며 괴로워합니다. 과거는 행복했다면서 집착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갈망하면서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과거나 미래는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게 보장된 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밖에 없습니다.”

스님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엔, 지금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는 것, 그 자체에 충실해 보세요. 입으로는 음식을 먹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산을 하고, 풍광을 보면서도 계획을 세웁니다. 과일을 먹는 지금, 이 순간만은 먹는 데 집중을 해보세요. 씹는 데서 오는 느낌, 과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기분, 그 순간에 충실해지세요.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범진 차장대우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