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때문에 조선 유학이 주자학 일색으로 귀결됐다고 비판한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는 ‘일선사화(日鮮史話)’에선 다른 성격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활동한 일본 사상가 모토다 에이후(元田永孚·1818~1891). 그는 구마모토(熊本) 번의 번교(藩校)인 시습관(時習館) 출신으로 이 지역 주자학을 창설한 오쓰카 다이야(大塚退野·1677~1750)의 학풍을 계승했고, 일본 근대국가 건설의 기점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 ‘교육칙어(敎育勅語)’의 초안을 작성했던 인물이다. 다카하시 도오루가 모토다 에이후를 언급한 것은, 그가 천황의 시강(侍講)이 되었을 때 자기 스승으로 삼은 오쓰카 다이야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도 함께 거론하며 칭송했기 때문이다. 중국 주자학이 조선의 이퇴계(李退溪)를 통해 전승되었고, 오쓰카 다이야 선생도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고 깨달은 점이 있었기에 자신도 천황에게 이 학문의 요체를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언이 300여년도 더 지나 일본 메이지시대 교육정책 입안자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어째서일까.

일본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에 파견한 조선의 통신사원행, 그리고 이들이 전한 주자학 서적을 통해 형성됐다. 1719년 일본 통신사 제술관으로 파견된 신유한(申維翰)은 오사카의 서적상을 둘러보고 ‘퇴계집(退溪集)’이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申維翰, ‘海遊錄’) 도산서원이 어디 있고 퇴계 선생 후손은 어떻게 살며 퇴계 본인은 생전에 무엇을 좋아했는지, 끝없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海遊錄’ 樂宗己亥) 중국과 일본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퇴계학의 학문적 영향력에 대해선 이미 일본학자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논평한 적이 있다. 백제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했듯이 조선의 퇴계도 주자학을 일본에 처음 전한 인물로 제2의 왕인으로 불릴 만하다는 것이다.(阿部吉雄, ‘李退溪一その行動と思想’) 아베 요시오의 평가는 일본 근대의 개창자로 알려진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오규 소라이는 왕인을 시작으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까지 네 사람의 학술적 공로를 열거했는데, 마지막 후지와라 세이카가 바로 퇴계 이황의 학문을 에도(江戶) 막부에 전파한 첫 인물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선승(禪僧)이었지만 임진왜란 발발 직전(1590년) 통신사로 파견된 퇴계 문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 전쟁 직후 포로로 일본에 억류된 강항(姜沆)과 교류하면서 승복을 벗고 유학자로 돌아섰다. 이때부터 조선 번각본(飜刻本)을 통해 주자학 서적이 일본에 유통됐고,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自省錄)’ 등이 일본 지식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에도시대를 통틀어 조선 책을 가장 많이 보유했고 막부 관료로도 유명했던 하야시 라잔(林羅山), 그는 세이카의 수제자로서 퇴계의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序)’에 발문을 달았고, 16세기 조선의 대표 논쟁인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을 평가했다.(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이(理)와 기(氣)를 나눈 퇴계의 관점은 지리(支離)한 데 빠졌고 이와 기를 합한 기대승의 관점은 선악(善惡) 구별에 어두워서 방탕(放蕩)한 데 빠질 폐단이 있다고 보았다.(林羅山文集, ‘寄朝鮮國副使姜弘重’) 라잔과 스승 세이카는 퇴계와 그 문인의 사칠논변(四七論辨)을 보면서 중국 명나라 지식인들의 논설(羅整庵, ‘困知記’)보다 뛰어나다고 논평했다.

에도시대 일본 유학자들 입에 수시로 오르내린 퇴계와 기대승의 철학 논쟁은 무엇이었을까. ‘사칠논변’에서 ‘사단(四端·네 가지 마음의 단서)’이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등장하는 네 가지 도덕적 마음 혹은 감정을 일컫는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유학사에선 이 네 가지 윤리적 감정(情)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선천적 본성(性)이 발동하여 마음(心) 밖으로 드러난 단서(四端)라고 여겼다. 잠재적 본성이 밖으로 드러나 감정으로 표출된다(性發爲情)고 본 것이다.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등장하는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일곱 가지 일반 감정을 가리킨다. ‘중용(中庸)’ 첫 장에 나오는 ‘희로애락(喜怒哀樂)’도 이와 유사한 감정으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주희(朱熹)가 ‘희로애락’을 감정(情)으로, 그리고 그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마음에 잠재된 상태를 본성(性)으로 규정했던 점이다.(朱熹, ‘中庸章句’) 이에 따르면 인의예지 본성 및 네 가지 도덕적 마음인 사단(四端)과 마찬가지로, 칠정(七情)도 본성과 감정의 관계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도덕 감정과 다양한 일반 감정 사이엔 분명한 구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군자소인논쟁’을 촉발시켰던 기묘사림의 사상적·정치적 행보 이후 보편화된 추세의 하나였다. 유교사회에서 누가 군자(君子)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한 본성과 도덕적 마음의 실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퇴계와 고봉(기대승) 간의 논쟁을 촉발시킨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도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 인간의 본성과 마음을 풀이했다. 정지운은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천명도(天命圖)’란 그림을 그렸고 해설을 덧붙여 ‘천명도설’을 작성했는데 미완이라고 여겨서 간행하지 못했다. 몇 해 뒤(1553년) 퇴계의 평가를 받고 대폭 수정한 뒤에야 ‘천명신도(天命新圖)’라고 이름을 바꿔서 세상에 유포했다.

퇴계는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동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표현한 것을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 썼다. 사단과 칠정은 인간 마음에 속하는 심리 현상이고 이와 기는 신유학에서 세계를 설명한 존재론적 범주인데, 양자를 연결해 인간 마음과 우주를 연속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그런데 정지운의 천명도를 고쳐 쓴 퇴계의 표현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사단과 칠정의 유사한 감정을 이와 기의 두 차원으로 나눈 것도 문제였지만, 주자학에서 움직이지 않고 작용하지 않으며 특정한 의도나 의지를 갖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이(理)를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한 점도 문제가 되었다. ‘이지발(理之發)’이란 표현에서 ‘이가 발동한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이가 구체적 사물처럼 작동하는 것으로 퇴계가 오인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이의 발동과 작용을 인정한 듯한 퇴계의 발언은 수많은 노론(老論) 학자들로부터 주자학에 어긋난 관점이라고 비판받았다.

1558년 기대승은 서울에서 정지운을 만나 ‘천명도설’에 대해 논한 뒤 그해 가을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 퇴계 선생을 만나기 위해 안동으로 내려갔다.(‘高峰集’ 年譜) 고봉은 퇴계에게 출처(出處·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의리에 대해 질문하고, 몇 해 사이 한양에서 퇴계의 이기심성론 때문에 사림(士林)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큰 논란이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당시 만남에선 두 사람의 견해 차만 확인했지만 이듬해인 1559년부터 8년에 걸쳐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고봉과 퇴계는 장기간 ‘사단칠정논변’을 펼쳤다. 논쟁의 내막을 보기에 앞서 기대승의 질문에는 항상 정치적 상황이 전제되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퇴계는 을사사화를 전후로 계속 벼슬을 사양했는데, 이 같은 이황의 반복된 출처 태도가 사림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황의 제자인 조호익(曺好益)은 퇴계 선생의 정치적 의리는 세상 사람 누구나 아는 것인데 기대승 같은 현명한 인물이 어째서 시의(時議)가 분분한 이때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서신으로 선생을 비난하는지 반문했다.(芝山集, ‘退溪先生行錄’) 표면상 ‘사칠논변’은 학술 논쟁의 성격을 띠었지만 이것은 당대 유학자들에게 정치적 기 싸움으로 읽혔고, 학문과 정치를 연동시킨 유교사회에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퇴계도 고봉과 첫 서신을 주고받을 때 별도의 편지를 작성해서 학문적 관점과 정치 의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해명했다.(退溪全書, ‘答奇明彦’) 이와 기, 사단과 칠정을 엄밀히 구분한 퇴계의 관점에 모종의 정치적 태도가 반영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퇴계는 기묘사림 같은 극단적 정치행보를 피하려고 항상 신중히 처신했지만, 그 역시 군자와 소인,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도덕적 마음(道心)과 비도덕적 마음(人心)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했다.

성학십도
성학십도

사람 마음(心)은 항상 이와 기로 함께 구성돼 있는데, 굳이 퇴계가 사단의 도덕적 마음은 이가 작동한 결과이고 희로애락의 일반적 감정은 기가 작동한 결과라고 구분한 것은, 현상적 기와 섞일 수 없는 이(理)의 위상을 강조한 것이고 나아가 인간의 선한 본성(性卽理)에 바탕을 둔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퇴계 말년, 나이 어린 소년왕으로 즉위한 선조에게 그가 여섯 조목의 상소문을 올리고(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그려 진강했던 마지막 언설도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성인군주(聖主)로서 어질고 현명한 신하를 잘 구별해서 등용하라는 당부였다. 그러나 사화(士禍)의 모든 격랑이 지나고 상대적으로 정치 안정기에 접어든 시대의 인물인 기대승은 퇴계와 정치 의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떠받친 윤리적(학문적) 입장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자와 소인이 태생적으로 나눠진 것이 아니듯이 사단과 칠정, 도심과 인심도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고봉은 사단이란 감정은 보다 넓은 범주인 칠정의 일곱 감정에 포함된다고 보았고, 이(理)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기(氣)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감정 상태가 선하게도 혹은 불선하게도 나눠진다고 말했다. “대개 본성(性)이 드러날 때 기(氣)가 잘못 작동하지 않으면 곧 본연의 선(善)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입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천리(天理)가 드러난 것이지만 칠정(七情)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단이란 바로 칠정 가운데 ‘발동해서 절도에 맞게 드러난 것(發而中節)’의 핵심을 가리킵니다.”(高峯集, ‘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존재론적으로 구분된 감정이 아니라는 것, 도덕적 마음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보통 마음이 상황에 맞춰 절도 있게 드러나면 그것이 곧 선한 마음이란 점을 강조했다.

현실에서 이와 기를 분리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로부터 유래한 사단과 기에서 유래한 칠정을 구분할 수 없다고 본 고봉은 더 노골적으로 퇴계에게 반문한다. 성인이 ‘중용’ 첫 장에서 말한 ‘희로애락’ 네 감정은 모두 절도에 맞는 선한 마음인데 퇴계에 따르면 이 마음들은 도대체 사단과 어떻게 다르며, 이에서 나왔다고 해야 하는지 기에서 나왔다고 해야 하는지 계속 추궁했던 것이다.(高峯集, ‘高峯答退溪再論四端七情書’) 그는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동일한 인간 본성에서 유래했다고 보았고, 다만 어지럽게 작용하는 기(氣)의 움직임 때문에 어느 때는 본성인 이(理)가 잘 드러나고 어느 때는 그렇지 못하므로, 사람의 배움이란 결국 기를 잘 조절해서 과불급(過不及)이 없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보았다.(‘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 단지 기가 절도에 맞게 움직이도록 유도하면 이것이 곧 이의 본래 모습(理之本體)이 밝게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왕복서신 중 퇴계가 마지막까지 양보하지 못했던 점은 바로 고봉의 주장이 고요하게 멈춘 상태의 기를 마치 이의 모습과 같다고 혼동했던 부분이다. 이 점에 대해선 이미 화담 서경덕 문인과도 오랜 논란이 있었다. 퇴계는 기의 담일청허(湛一淸虛)한 모습을 악(惡)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기의 이런 상태를 선(善)이라고 볼 수도 없고, 오직 고요한 기(氣) 가운데 이(理)가 주재(主宰)할 때만을 온전히 선한 상태라고 주장했다.(退溪全書, ‘答李公浩’) 아무리 기가 맑고 고요해도 그것은 선악 미분(未分)의 불안정한 상태일 뿐 그 자체로 이상적인 윤리적 상황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고봉과의 논쟁에서도 퇴계는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따지면 이 감정들이 기원한 곳(所從來)이 다르기에 이와 기로 나눠 배속할 수 있다고 했고(退溪全書,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一書’), 고봉이 이에 동의하지 못하자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氣)가 드러날 때 이(理)가 올라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退溪全書,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라는 타협적 명제를 내놓았다. 둘 다 이기(理氣)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지만 주된 핵심이 무엇인지 보면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계속 강조한 것이다. 기대승에게 보내지 못한 마지막 서신에서도 퇴계는, 기가 이를 어기지 않고 순응하며 작용하는 모습을 마치 이가 발동한 것으로 간주하면 기를 이로 여기는 병통에 해당한다고 경계했다.(退溪全書,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三書)’)

퇴계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이와 기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한 것일까. 퇴계는 이와 기를 마치 승부를 겨루는 경쟁 관계처럼 묘사하며 기가 반항해서 이가 은폐되는 현상을 신하가 존귀한 왕에게 대드는 형국과 같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退溪全書, 答李達李天機) 명령을 내리는 이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기의 모습을 강조한 것은 여러 대목에서 발견된다. 퇴계가 중시한 경(敬) 공부도 결국 이의 모습을 제대로 알고 성(性)을 잘 보전하기 위한 삼감과 두려움의 자세였다. 고봉이 기질을 통제하는 기 차원의 공부에 주목했다면, 퇴계는 기질에 가려진 이의 모습을 극존하고 존숭하는 ‘존리(尊理)·존덕성(尊德性)’의 공부를 강조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추상적인 주자학의 이(理) 개념, 퇴계가 떠받든 이의 의미보다 음식남녀의 구체적 욕망 속에서 우리가 평이하게 감지할 수 있는 기의 가치에 주목했다.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공유한 삶의 생물학적 토대를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우리가 지향할 만한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理) 없이는 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천인합일(天人合一)·만물일체(萬物一體) 논의도 실효성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고 보았다. 세상과 한 몸이 되기 위해선 스스로 마음의 주재력(敬)을 확보해야 하고 외부 대상에 나아가 소통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退溪全書, ‘西銘考證講義’) 오만하게 만물일체의 인(仁)을 깨달았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학십도’를 올릴 무렵 선조에게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을 진강하며 했던 말이다.

퇴계는 철저한 자기 극복의 공부 없이는 유한하고 덧없는 인생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바로 이 점에서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고 노력하지 않고도 행할 수 있다”는 양지(良知)의 선천성을 강조한 양명학(陽明學)을 거부했다.(退溪全書, ‘傳習錄論辨’) 명대 심학(心學)의 영향을 받은 화담학파도 번잡한 외부 사물을 마음의 장애로 여기고 세속에서 초연한 듯 무욕(無欲)의 정신 상태를 지향했지만, 퇴계는 이 또한 심기(心氣)에만 집착한 중대한 과오라고 논평했다.(退溪全書, ‘答南時甫·別幅’)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수많은 상대와 관계를 맺게 하는 윤리적 원리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결국 기질 차원의 자기 한계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유한한 개체가 자신을 벗어나는 자기초월의 길이 오직 하나로 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막스 베버는 동양의 유교를 논평하며 너무 합리적이고 현세적이라서 종교적 초월의 가치를 볼 수 없다고 폄하했지만(‘유교와 도교’) 유교사회의 자기초월·자기구원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조선 유학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서경덕은 담연하고 맑은 태허(太虛) 기를 직관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고자 했다. 이황은 마음을 넘어 보편적 이(理)와 연결된 본성(性)에 주목했고, 한 걸음 나가 천명(天命)의 근원인 ‘상제(上帝)’까지 거론했다.(戊辰六條疏, 第六條) 하늘의 의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경(敬)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聖學十圖, 第九圖·第十圖) 구체적 마음에서 본성으로, 본성에서 초월적 상제로 이행한 퇴계의 지적 행보는, 자기극복 과정이 일시적 깨달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것을 말해준다. 조선 유학의 논쟁사를 새롭게 쓴 퇴계와 고봉의 설전은 조선의 울타리를 넘어 해외로 전해졌다. 세속에 기반한 유교적 초월의 논리도 서양종교와의 접전에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백민정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로 연세대박사학위. 저서 ‘정약용의 철학: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백민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