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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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야구 구단들은 11월 내내 ‘억, 억’ 소리에 시달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오백 번 넘게 비명이 아우성쳤다. 다름 아닌 메가톤급 FA(Free Agent·자유계약선수) 계약이 잇달아 성사됐기 때문이다.

올해는 FA 강풍이 유난히 거셌다. 국내 야구에서 드문 존재인 ‘풍부한 국가대표 경력의 20대 공격형 포수’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강민호(28)가 4년간 총액 75억원(계약금 35억원 포함)이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소속팀 롯데와 잔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곧이어 정근우(31)와 이용규(28)가 각각 4년간 70억원과 67억원에 올 시즌 최하위(9위)를 기록한 한화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들 세 명이 각각 4년간 받을 돈은 2005년 심정수(은퇴)가 현대에서 삼성으로 옮기면서 기록한 역대 FA 최고 총액기록(4년 60억원)을 훨씬 웃돈다.

올 FA 자격신청을 했던 16명 중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 중인 윤석민(전 KIA)을 제외한 15명의 계약 총액은 532억5000만원이다. 2개 구단 한 시즌 살림살이에 드는 돈과 맞먹는 규모다.

FA 선수들의 몸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된 것이 올해 일만은 아니다. 2011년 이택근이 LG에서 ‘친정’인 넥센으로 돌아오면서 4년간 50억원을 받았고, 지난해엔 김주찬이 롯데에서 KIA로 옮기면서 역시 50억원(4년)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때부터 올해 FA 광풍(狂風)은 예고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이 때론 ‘거품’이란 말까지 들어가면서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것에는 여러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선수의 몸값은 시장 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선수라도 그를 원하는 구단이 없으면 가치는 떨어진다. 정반대라면 성적이나 기량보다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강민호는 2004년부터 올해까지 10시즌 통산 타율이 0.271이며 여섯 시즌이나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린 강타자다. 풍부한 국제대회 경험과 함께 병역혜택도 받았다. 더욱이 그는 모든 구단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포수를 맡고 있다. 서울의 한 구단 고위 관계자가 “신인 드래프트에 포수가 대상이 되면 성적에 관계없이 무조건 지명해야 할 판”이라고 털어놓는 것은 포수의 희귀성 때문이다.

또 롯데가 거금을 강민호에게 투자한 것은 롯데만의 사정이 있었다. 이대호의 일본 진출에 이어 홍성흔(두산)과 김주찬이 지난해 FA로 팀을 옮기면서 롯데는 올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실망한 팬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관중이 뚝 떨어졌다.

롯데 고위 관계자는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면 열 명 중 여덟, 아홉 사람은 ‘올해는 반드시 강민호를 붙잡아달라’는 말을 한다”고 ‘팬심’을 소개하면서 “강민호는 마케팅적 가치를 고려해서라도 구단이 거액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롯데가 강민호에게 제시한 75억원은 설득력 있는 가격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강민호에겐 그가 타석에 설 때 울려퍼지는 응원가처럼 ‘롯데의 강민호’라는, 롯데에서만의 특수한 마케팅 가치를 지닌 선수였다.

정근우
정근우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몸값은 성적이나 기대치 이상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역시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국내 야구 저변은 넓지 않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이란 성과에도 여전히 선수 공급이 부족한 형편이다. 9구단 NC에 이어 10구단 KT까지 가세하면서 기존 구단의 전력에서 누수가 생겼다. 또 각 팀의 주전 라인업을 살펴보면 20대 중후반보다는 3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프로야구의 젖줄인 고교야구에서 대형선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도 문제다. 각 팀 스카우터들은 대어(大魚)뿐 아니라 준척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매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교보다는 대학 선수가 높은 순위로 지명되는 배경엔 고교에서 좋은 자원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깔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구단은 여전히 ‘성적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구단을 운영하는 기본 정신이 ‘팬 퍼스트(Fan First)’로 바뀌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각 구단의 최대 목표는 우승이다.

문제는 우승을 위한 전력을 구축하기 위해 각 구단이 장기적 플랜을 짜기보다는 단기간에 성적을 낼 수 있는 전력 보강에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국내 프로야구 구단의 단장 이상 고위 관계자들 대부분은 모기업에서 임원을 지내다 야구단을 맡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들의 임기는 2~3년 정도. 이 기간 안에 성적을 내야 능력을 인정받는다. 짧은 기간 내에 전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은 FA 선수와 외국인 선수 영입뿐이다. 2군 유망주를 길러내 5~10년 이내에 강팀을 구축한다는 건 이들에게 ‘먼 이웃’ 얘기다.

올해 FA에서 최고의 ‘큰손’으로 떠올랐던 한화는 소속선수 FA와 외부 FA 영입으로만 178억원을 썼다.

한화의 경우 지난해 쓰지 못했던 여윳돈이 있었다고 해도 다른 FA를 영입한 구단은 등골이 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적자를 면치 못하는 살림살이에서 두세 명의 선수에게 수십억원을 쓴다는 사실은 모순에 가깝다. 그래도 그게 가능한 것은 모기업의 끊임없는 후원이라는 보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으면 적자가 나도 그만’이라는 게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이다.

각 구단 관계자들은 FA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구단을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한숨을 내쉰다. 과다한 인플레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전 구단, 또는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정작 누구 하나 전면에 나서는 사람은 없다. 해마다 구단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또 서로 몸값을 끌어올리지 말자고 의견의 일치를 봐도 그걸 믿는 구단은 없다.

FA 광풍을 잡는 방법은 여럿 있다. 메이저리그처럼 구단 연봉 총액제를 도입해 사치세를 물린다든지, 아니면 FA 자격 기한을 줄여 선수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를 늘려 국내 선수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자는 얘기도 나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FA 제도를 국내 현실에 맞게 뜯어고치지 않으면 프로야구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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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철 조선일보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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