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조 감독들. (아랫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홍명보, 파비오 카펠로(러시아), 마르크 빌모츠(벨기에), 바히드 할릴호지치(알제리). ⓒphoto 연합
H조 감독들. (아랫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홍명보, 파비오 카펠로(러시아), 마르크 빌모츠(벨기에), 바히드 할릴호지치(알제리). ⓒphoto 연합

지난 12월 6일 브라질 북동부의 휴양지 코스타 두 사우이페는 축구 열기로 뒤덮였다. 주목을 끌 만한 축구 경기 하나 열리지 않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축구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워했고 때론 심각해했다. 2014 브라질월드컵 본선 조 추첨식의 풍경이었다. 기자는 2010 남아공월드컵과 2012 런던올림픽 등 다수의 스포츠 빅이벤트를 현장에서 취재한 경험이 있지만 월드컵 조 추첨식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미디어카드를 목에 걸고 조 추첨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제법 가슴이 떨렸다. 그곳엔 전 세계 2000여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 추첨은 어떤 축구 경기보다 스릴이 넘쳤다. 평소에 웬만하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심장’ 홍명보(44) 축구대표팀 감독도 조 추첨이 끝나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세 번 마음을 졸였다고 털어놓았다. 아시아·북중미 국가가 속한 3번 포트에 들어간 한국은 1·2번 포트 국가가 먼저 배정된 상황에서 추첨에 들어갔다.

홍 감독이 가장 긴장했던 순간은 A조 발표 때였다. 개최국이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과는 같은 조에 속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다음엔 우루과이와 이탈리아가 먼저 배정된 C조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다행히 코스타리카의 이름이 불렸다. 이후 C조는 4번 포트에서 잉글랜드가 들어오며 월드컵 우승 경력이 있는 세 나라가 조별 리그에서 경쟁을 펼치는 명실상부한 ‘죽음의 조’가 됐다.

마지막 고비는 G조와 H조를 남긴 시점이었다. G조엔 독일과 가나가 자리 잡고 있었고, H조엔 벨기에와 알제리가 먼저 편성돼 있었다. 홍 감독은 “예전부터 독일과 같은 전통 강호는 피하고 싶었다”며 “50%의 확률이라 더 떨렸다”고 말했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끈 명수비수 파비오 칸나바로는 G조에 들어갈 팀으로 미국을 뽑았다. 자동으로 한국이 H조에 배정됐다. 이후 포르투갈이 독일·가나·미국과 한 조가 되며 G조도 ‘죽음의 조’ 대열에 합류했다. H조엔 러시아가 오며 한국은 벨기에·알제리·러시아와 한 조가 됐다.

조 추첨이 끝나자 전문가들은 만족할 만한 조 편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와 같은 포트였던 호주와 코스타리카, 미국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쉽다. 호주가 아닌 우리가 B조에 들어갔다면 2010 남아공월드컵 우승팀 스페인과 오렌지군단 네덜란드, 남미의 복병 칠레와 한 조에 속하게 된다. 한국이 코스타리카 대신 우루과이·이탈리아·잉글랜드와 C조가 되거나 미국 대신 독일·포르투갈·가나와 G조에 속한 상황을 가정해 봐도 지금의 조 편성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만 추첨 결과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조 추첨이 끝나면 각국 취재진들은 감독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는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으로 몰려든다. 믹스트존은 조별로 나뉘어 있어 자연히 같은 조에 속한 국가 기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20여명의 벨기에 기자들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조 추첨 결과에 만족해했다. 러시아와 알제리 기자들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H조는 네 팀 모두 행복한(Happy) 조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저마다 16강 진출을 자신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을 달성했지만 한국은 외국 기자들에게 여전히 미지의 팀이었다. 벨기에·러시아·알제리 기자들은 번갈아 한국 취재진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한국의 감독은 어떤 사람이냐” “너희 팀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누구냐” 등의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기자가 “한국 감독인 홍명보는 월드컵에 4회 출전한 전설적인 선수였다”고 설명하자 많은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월드컵 4회 연속 출전은 세계적으로도 몇 명 없는 대기록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명한 선수를 물을 때면 예전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팍(Park·박지성)’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엔 좀 어려웠다. 그들은 손흥민(레버쿠젠)이나 이청용(볼턴)을 잘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각 팀 감독들이 믹스트존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그들은 엄살을 떨며 상대팀을 칭찬하기 바빴다. 한국과 조별 리그 첫 경기를 치를 파비오 카펠로(67·이탈리아) 러시아 감독은 “지난 11월 상대한 한국은 매우 터프했다. 체력도 좋다”고 했다.

마르크 빌모츠 벨기에 감독은 “한국은 기술이 좋고 빠르다”며 “그들은 좋은 감독이 있다”고 했다. 홍명보 감독과 44세 동갑내기인 빌모츠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선수로 홍 감독과 맞부딪친 경험이 있다. 당시 멕시코에 1 대 3, 네덜란드에 0 대 5로 패했던 한국은 심기일전해 벨기에와의 3차전에선 1 대 1 무승부를 기록했고, 그 결과 벨기에는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바히드 할릴호지치(61·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알제리 감독은 한국에 대해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 한국의 경기를 인상적으로 봤다. 패스가 좋고 기술이 뛰어나며 스피드도 좋다”고 평했다. 홍명보 감독은 이번 월드컵 조 추첨 결과에 선수들이 들뜨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는 “월드컵에 만만한 팀은 하나도 없다”며 “쉬운 조라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이 객관적으로 브라질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를 수치로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각종 베팅 사이트다. 각 팀의 16강 진출 여부는 중요한 베팅 항목 중 하나이기 때문에 도박사들은 면밀히 팀 전력을 분석해 배당률을 책정한다.

축구대표팀이 지난 11월 스위스와의 평가전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축구대표팀이 지난 11월 스위스와의 평가전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영국의 베팅 업체 ‘윌리엄 힐’은 한국 축구 대표팀이 브라질월드컵 16강까지 가는 것에 12월 23일 현재 9/4의 배당률을 걸었다. 4만원을 걸면 원금 외에 9만원을 추가로 받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리스크가 높다는 것이다. ‘윌리엄 힐’은 벨기에·러시아(이상 4/5), 한국, 알제리(9/2) 순으로 16강 진출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또 다른 베팅 업체 ‘스카이베트’는 H조 1위를 알아맞히는 항목에서 벨기에(8/11), 러시아(9/4), 한국(15/2), 알제리(14/1) 순으로 배당률을 매겼다.

해외 언론들도 한국의 전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다. 영국 BBC는 1986 멕시코월드컵 득점왕 출신인 게리 리네커(53·잉글랜드) 해설위원의 기고문을 통해 “한국은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해졌다”고 평했다. 리네커는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은 행운으로 4강에 올랐다”며 “2014 월드컵 본선에 오른 32개국 가운데 한국(54위)보다 FIFA 랭킹이 낮은 나라는 호주(59위)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1월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점수를 토대로 본선 진출 32개 팀을 분석했다. 가디언은 각 팀의 FIFA 랭킹 평균을 산출해 각 조의 전력을 비교했는데 한국(577점)이 속한 H조의 평균은 836점으로 8개조 중 가장 낮았다.

이렇듯 대부분 외신은 FIFA 랭킹을 기준으로 한국의 전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다. FIFA는 이번 조 추첨 때 10월 랭킹을 기준으로 1~7위 팀을 톱 시드에 배정할 정도로 자신들의 랭킹 시스템에 신뢰를 보이고 있다. 1993년 시작된 FIFA 순위는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산정 방식을 바꾸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최근 4년간 모든 A매치가 대상이 되며 경기당 점수는 승패와 경기의 중요도, 상대팀 FIFA 랭킹, 상대팀이 속한 대륙의 가중치를 모두 곱한 값으로 계산한다.

현재 54위의 한국은 지난 9월 FIFA 랭킹이 58위까지 내려가는 등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3년 상반기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고전한 데다가 홍명보호(號) 역시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지난 6월 홍명보 감독 부임 이후 한국 대표팀은 3승3무4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많이 져서 랭킹이 내려갔다고 탓할 문제만은 아니다. 홍명보호는 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브라질·크로아티아·스위스·러시아 등의 강팀과 평가전을 치렀다. 비록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해 랭킹은 여전히 50위권을 맴돌고 있지만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좋은 모의고사를 치렀다는 평가다.

강팀과 줄줄이 친선전을 벌이는 바람에 순위에서 손해를 본 한국의 경우를 보듯 FIFA 랭킹이 그 팀의 적확한 수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A매치로만 랭킹을 매기기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 개최국인 브라질은 월드컵 남미 예선을 치르지 않으면서 지난 6월 랭킹이 역대 최저인 22위(현재 10위)까지 추락한 적이 있다. 당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브라질 감독은 “FIFA 랭킹 산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어쨌든 한국은 FIFA 랭킹상으로나, 도박사들의 예측상으로나 16강 진출 가능성이 낮다. 외신들도 대부분 H조에서 벨기에와 러시아의 16강행을 점치고 있다. 분명히 전력상으로도 유럽 두 팀이 한국에 앞서 있다.

조별 리그 H조 3차전(6월 27일 오전 5시·상파울루) 상대 벨기에와는 벌써 월드컵에서 세 번째 만남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한국은 벨기에와 처음 만나 0 대 2로 완패했다. 이 경기는 홍명보 감독의 월드컵 데뷔전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선 양 팀이 1 대 1로 비겼다.

조 추첨장에서 만난 벨기에 기자들이 자주 한 말이 “Now or Never(지금 아니면 안 된다)”였다. 그만큼 이번이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벨기에 현 대표팀은 ‘황금 세대’로 불릴 만큼 유럽에서 손꼽는 재능들이 모여 있는 팀이다. 유럽 예선에서 강호 크로아티아를 제치고 A조 1위(8승2무)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2008 베이징올림픽 4강 멤버인 마루앙 펠라이니(26·맨유), 빈센트 콤파니(27·맨시티), 토머스 페르말런(28·아스널), 무사 뎀벨레(26·토트넘)는 모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무대를 주름잡는 선수가 됐다. 여기에 첼시의 ‘에이스’ 에당 아자르(22)와 지난 시즌 애스턴 빌라에서 23골을 넣은 크리스티안 벤테케(23), 에버턴의 장신 공격수 로멜루 루카쿠(20) 등 20대 초반의 샛별들도 팀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약점은 경험 부족이다. 2002년 대회 이후 12년 만에 본선 무대에 오른 탓에 월드컵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거의 없다.

한국과 첫 경기(6월 18일 오전 7시·쿠이아바)를 벌이는 러시아는 벨기에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팀이다. 벨기에가 잉글랜드의 각 명문 클럽에서 뛰는 젊은 스타들의 집합체라면 러시아는 자국 리그 소속의 덜 유명한 선수들이 만들어낸 끈끈한 조직력으로 월드컵 본선행을 이룬 팀이다.

러시아의 축구 색깔은 카펠로 감독으로부터 나온다. ‘빗장 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카펠로는 러시아를 ‘짠물 수비’의 팀으로 만들었다. 러시아는 유럽 예선 10경기에서 20골을 넣는 동안 단 5골만 실점했다. 카펠로 감독은 수비를 두껍게 쌓은 뒤 발 빠른 알렉산드르 코코린(디나모 모스크바)과 활동량이 좋은 원톱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제니트)를 앞세워 역습을 노리는 전술을 주로 쓴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수비진의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4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포백의 평균 연령이 30세가 넘는다. 손흥민과 이청용 등 스피드가 좋은 한국의 공격수들이 그 틈을 충분히 파고들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이 브라질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르기 위해서 반드시 잡아야 할 팀이 알제리(6월 23일 오전 4시·포르투알레그리)다. 알제리는 대부분 선수들이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민 2·3세로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 출신이 유난히 많다. 프랑스의 ‘아트 사커’를 이끌었던 지네딘 지단(41)도 알제리계다.

축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단을 보면 알 수 있듯 알제리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드리블 등 기술이 뛰어나다. 스트라이커 이슬람 슬리마니(25·리스본)와 공격형 미드필더 야시네 브라히미(23·그라나다), 왼쪽 풀백 파지 굴람(22·생테티엔) 등은 유럽 무대에서 맹활약 중인 선수다.

개인 기술이 뛰어난 반면에 조직력이 탄탄하지 않다는 것이 알제리의 약점이다. 알제리는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를 세 번(1982·1986·2010) 밟는 동안 한 번도 조별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7회 연속 본선에 나가는 동안 2002년(4위)과 2010년 16강에 올랐다. 확률은 29%다. 원정으로만 따지면 16강 진출은 여섯 번 중 한 번(17%), 남아공월드컵이 유일하다.

남아공월드컵은 한국 축구 역대 최강의 멤버였다는 평가를 받는 대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의 박지성이 주장으로 중심을 잡았고, 프랑스 리그 모나코에서 득점포를 쏘아 올리던 박주영이 최전방 공격수로 나섰다. 수비엔 베테랑 이영표가 버티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샛별 이청용과 기성용이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4년 뒤 월드컵을 맞는 한국엔 박지성과 이영표가 없다. 둘은 2011 아시안컵 이후로 나란히 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박주영도 아스널에서 경기를 거의 뛰지 못하며 월드컵 본선 출전이 불투명하다.

플러스 요인이라면 경험이 쌓인 ‘쌍용’ 이청용과 기성용의 존재다. 여기에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과 구자철이 가세한다. 197㎝의 장신 스트라이커 김신욱이 브라질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도 한국 축구 16강행에 큰 변수다.

무엇보다 한국의 16강 진출 여부는 홍명보 감독의 지도력에 달릴 가능성이 크다. 2009 이집트 U―20 월드컵 8강,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 등 맡는 팀마다 소기의 성과를 거뒀던 홍 감독은 지도자 인생 최대의 무대를 앞두고 있다. 한국 국민의 81%(한국갤럽 여론조사)가 16강에 간다고 생각하는 상황은 분명히 벨기에·러시아가 H조 1·2위로 16강에 오를 것이란 외신의 예상과는 괴리가 있다. 홍 감독은 이 현실과 희망의 격차를 줄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홍명보 감독은 “우리는 월드컵 무대에서 언제나 도전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며 “하지만 도전자가 챔피언을 꺾을 수 있는 것이 스포츠이며 축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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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석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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