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호시관준’,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0.2×51㎝,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호시관준’,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0.2×51㎝, 국립중앙박물관

공자의 유랑생활도 어언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를 등용하겠다는 왕은 없었다. 14년 동안이나 유랑했다. 혼자 몸도 아니었다. 여러 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랐다. 그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워 줄 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유랑은 가능하지 못했다. 공자가 다닌 곳은 위(衛), 진(陳), 조(曹), 송(宋), 정(鄭), 채(蔡) 6개국이었다. 공자는 산동성에 있는 노나라에서 출발해 서쪽과 북쪽으로는 황하를 건너지 못했고 남쪽으로는 장강에 이르지 못했다. 그다지 넓은 지역은 아니었으니 한 번 갔던 곳을 또 방문할 때도 많았다.

일정하게 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떼거리로 다니는데 그들을 받아 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들은 육체노동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앉았다 하면 예(禮)가 어떠니 인(仁)이 어떠니 하면서 토론을 벌이기 일쑤였다.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면 악취를 풍긴다는 속담처럼 쓸모없는 손님을 거듭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공자 일행은 14년 동안 누군가의 손님이 되어 그렇게 살았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물렀을 때였다.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일 년이 넘게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매 한 마리가 진나라의 조정에 날아와 죽었다. 새매의 몸에는 싸리나무로 대를 만들고 돌을 깎아 촉을 만든 화살이 꽂혀 있었는데 길이가 한 자 여덟 치나 됐다. 아무리 살펴봐도 진나라나 주변국에서 쓰는 화살은 아니었다. 진나라 민공(湣公)이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죽은 새매를 보내면서 이 일에 대해 물었다. 새매에 꽂힌 화살을 유심히 살펴보던 공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숙신(肅愼·옛날 중국 북방에 살던 퉁구스족)이 쓰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사방의 오랑캐로부터 조공을 받을 때 숙신에게서 이 화살을 받아 호공에게 주면서 진나라에 봉했습니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이런 사실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민공이 사람을 시켜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했더니 과연 진나라의 왕실 창고에도 이것과 똑같은 화살이 있었다.

‘호시관준(楛矢貫準·화살에 맞은 새매가 날아와 죽다)’은 그 내용을 그렸다. 오른쪽 병풍 앞에 앉아 있는 붉은색 복장의 남자는 민공일 것이다. 민공의 뒤에 세워진 사각 병풍은 중요한 인물이 돋보이도록 그려 넣은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번에 본 ‘의봉앙성’에서도 공자 뒤에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신하가 들고 있는 가리개는 다르다. 왕이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의 뒤에만 그려진다. 그림 속의 주인공이 공자가 머물고 있는 집의 사성정자가 아니라 민공임을 알 수 있다. 민공 앞에는 화살이 꽂힌 새매가 놓여 있다. 한눈에 봐도 새매보다 큰 화살이다. 그 앞에 서서 새매를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는 사람은 공자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새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리된다. 오른쪽이 민공과 신하들과 병풍 등 복잡하면서도 뭔가 그득한 느낌이 드는 구도라면, 왼쪽은 공자와 두 제자만으로 그려진 단순한 구도다. 배경으로 그려진 언덕의 능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공자가 민공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아무 의미 없이 그려 넣은 능선이 그림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선의 방향은 민공의 직위가 공자보다 높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호시(楛矢)라는 화살은 광대싸리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1척8촌(54.54㎝)이며, 화살촉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숙신에서 만든 싸리나무에 돌촉을 붙인 화살(楛砮)은 천하에서 보물로 여겼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만큼 유명한 화살이다. 옛 문헌에 밝은 공자가 호시를 모를 리 없다. ‘호시관준’에는 공자가 오랜 유랑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이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그 비결이다.

공자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유랑하는 동안 각 나라의 군주나 경공사대부들이 궁금해 한 사항을 ‘참고 문헌’을 곁들여 설명해 줬다. 당시 군주들은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었고 학문을 사랑하기보다는 무력을 선호했다. 공자만큼 유식하고 혜안을 갖춘 학자가 없었다는 뜻이다. 운 좋게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능력 없는 군주에게 공자는 대단히 중요한 해결사였다. 공자에게 물으면 마치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즉시 대답했다. 이것이 공자가 기나긴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생선과 손님’처럼 천대받지 않은 이유였다. 밥만 축내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지 않은 방법이다.

양나라 왕은 ‘붉은 새 한 마리가 입에 자줏빛 꽃무늬가 새겨진 황금 죽간을 물고 날아와서 왕의 앞에 내려놓은 의미’를 물었고, 초나라 소왕은 ‘강을 건너다가 강 가운데에 붉은 빛을 띠는 큰 물건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었다. 제나라 왕은 ‘다리가 하나뿐인 새가 조정에 날아와 날개를 퍼덕이며 뛰어다닌’ 연유를 물었고, 오나라 왕은 월나라를 정벌한 후 ‘회계산의 성벽을 허물다가 발견된 유골’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그때마다 막힘 없이 대답했다.

공자의 역할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주고 자문해주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때로는 어리석은 위정자들을 꾸짖고 부끄럽게 만드는 목적으로도 이용됐다. 진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후가 능양대(陵陽臺)라는 전각을 짓고자 했는데 시일이 오래 지나도록 공사에 진척이 없었다. 화가 난 제후는 일의 책임을 물어 수십 명의 인부를 죽이고 감독관 세 명을 참수하려 했다. 그때 마침 공자와 함께 공사 중인 능양대를 둘러보게 됐다. 제후는 공자에게 “옛날 주나라 황실에서 영대를 건축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죽였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문왕이 영대를 세울 때는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움직일 수만 있으면 서로 나와서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어찌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나라 제후는 심히 부끄러웠다. 그는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감옥에 가둔 관리들을 풀어주고 능양대 공사를 그만두도록 했다. 상대방의 치부를 직접적으로 욕하지 않으면서 부끄럽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공자의 화술(話術)이었다.

그러나 어찌 상담해 주는 일이 유랑한 목적이겠는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군주를 만나는 것이 목적인 것을. 애공 6년(BC 489), 공자가 63세 되던 해에 초나라 소왕이 죽었다. 공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려고 기대했던 왕이었다. 공자는 더 이상 자신을 알아 줄 군주를 찾아 유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나라에서 진나라로 돌아가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나 재능이 부족하고, 비록 학문의 성취는 볼 만하지만 바르게 활용할 방법을 모르는구나.” ‘논어’ 공야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는 위나라로 돌아가 5년을 더 보낸 후 노나라로 귀국했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이었다. 애공 11년(BC 484), 공자 나이 68세였다. 공자가 귀국하게 된 배경에는 단지 그의 수구초심(首丘初心)만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관직을 맡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제자들의 노력이 한몫했다. 다음에는 그의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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