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행단고슬’, 비단에 연한 색, 29.8×23.2㎝, 왜관수도원
정선, ‘행단고슬’, 비단에 연한 색, 29.8×23.2㎝, 왜관수도원

1년 동안 그림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공자의 생애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긴 여정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연재한 글을 점검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스쳐가는 문장이 있었다. ‘행복은 짧고 고난은 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후자가 예술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데 반해 전자는 시난고난한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동양을 대표하는 공자라는 성인(聖人)의 인생이다. 공자의 생애에는 특별한 인물에게 부여되는 눈부신 아우라가 없다. 마지막까지 울퉁불퉁한 고난의 길을 걸어간 평범함만이 깔려 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공자가 잠깐 동안의 관직 생활을 거친 후 유랑 생활을 접고 귀향했을 때 그의 앞에는 5년여의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귀국 후 노나라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제자들도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런 힘 없는 노옹(老翁)이 어떻게 동양의 전설이 되었을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는 공자가 시대를 뛰어넘어 ‘만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이룬 두 가지의 업적 때문이다. 제자 교육과 고전의 정리다. 정선이 그린 ‘행단고슬(杏壇敲瑟)’은 교육자로서의 공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우람한 은행나무 아래 공자와 네 명의 제자가 앉아 있다. 동파관을 쓴 공자는 공수자세를 취한 채 거문고를 타는 제자를 바라본다. 공자와 제자들은 물론 서 있는 시동까지 모두 공수자세다. 공수자세는 두 손을 모아 앞에서 맞잡는 예법으로 공손함의 표현이다. 거문고를 뜯고 있어 야외로 놀러 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거문고를 통해 예를 공부하는 중이다. 돌로 기단을 쌓은 행단 앞으로는 두 그루의 나무가 윗부분만 그려져 있어 석축이 매우 높은 곳임을 암시한다. 공자 뒤로는 푸르스름한 먼 산을 실루엣으로 처리해 깊이감과 공간감이 느껴진다. 정선이 그린 ‘행단고슬’은 고사인물화로 구성된 21점의 화첩 속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정선의 그림에는 제목을 ‘은행나무 단상 아래서 거문고를 연주하다’는 뜻으로 ‘행단고슬(杏壇敲瑟)’이라 적었지만 ‘공자성적도’에는 ‘은행나무 단상에서 예악을 가르치다’란 뜻으로 ‘행단예악(杏壇禮樂)’이라 적혀 있다. 이후로 ‘행단(杏壇)’은 공자가 강학(講學)하던 학교를 넘어 학문을 가르치는 곳을 의미하게 됐다. 이렇게 중요한 뜻이 함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단’에 대한 내용은 ‘논어’ ‘공자가어’ ‘사기’ 등 공자와 관련된 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장자’ ‘어부’에 ‘공자가 치유의 숲 속에서 노닐며, 행단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나니,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어 ‘행단예악’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정선은 ‘행단고슬’에서 제자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으로 그렸지만 ‘행단예악’에는 공자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인 것이 다르다.

‘행단고슬’과 ‘행단예악’의 차이점은 또 있다. ‘행단’에 심어진 나무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발행된 ‘공자성적도’와, 중국 책을 범본으로 한 우리나라의 ‘공자성적도’에는 모두 살구나무가 그려졌다. ‘행단’이 설치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공자묘(孔子廟)의 대성전(大成殿) 앞에도 ‘행단’에 대한 설명 중 ‘행’을 ‘apricot tree(살구나무)’라고 분명히 표기했다. 그런데 정선의 ‘행단고슬’처럼 우리나라의 문묘 대성전과 향교, 서원 앞에는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었다. 이런 혼동은 ‘행(杏)’이라는 한자에서 비롯된다. ‘杏’은 살구나무와 은행나무 모두를 지칭한다. 같은 글자를 중국에서는 살구나무(杏)로,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杏)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란은 조선시대에도 불거졌던 듯 이수광(李睟光·1563~1628), 이유원(李裕元·1814~1888) 등이 이 문제를 지적하며 한탄한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과연 살구나무가 은행나무로 바뀐 이유가 꼭 한자 해석의 오류에만 있을까.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두 나라 간의 문화적 차이는 없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스승으로서의 공자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공자의 제자 사랑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는 안회처럼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른 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염유처럼 스승의 뜻과 반대로 행동한 제자도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들 모두를 제자로 끌어안았다. 제자가 어긋나게 나아갈 때는 ‘북을 울려 성토하라’고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결코 내치지는 않았다. 공자는 교육이야말로 인간을 도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열쇠라 여겼다. 그는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교육은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공자가 교육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염유와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염유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잘살게 해줘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미 잘살게 됐는데 또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공자는 ‘가르쳐야 한다’고 대답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지만 먹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었다.

공자는 ‘말린 고기 열 묶음 이상’을 예물로 가져오면 누구라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교육 방법도 매우 독특했다.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한 가지 틀만 고집하는 대신 제자의 성정을 살핀 맞춤식 강의를 적용했다. 자로처럼 성질이 급한 제자에게는 물러서는 법을, 염유처럼 소극적인 제자에게는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제자가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발휘하도록’ 말해주지 않았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을 때 다른 세 귀퉁이로써 반응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을’ 정도로 ‘밀당’을 잘했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억측을 하지 않았고, 반드시 하겠다는 게 없었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나만이 옳다고 하지도 않았다.’ 공자는 스승이었지만 제자 위에 군림하지 않는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공자가 행단에서 가르친 내용은 출세에 필요한 지식만이 아니었다. ‘학문·덕행·충심·신의’ 등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였다. 철저히 인간 중심의 교육이었다. 공자는 ‘괴이한 일, 위세 부리는 일, 어지럽히는 일, 귀신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행단은 인간학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대표적인 제자를 네 부류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鶱)·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이고,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계로(季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였다. 네 가지 분야에 뛰어난 제자들을 ‘공문사과(孔門四科)’ 혹은 ‘성문사과(聖門四科)’라 부른다. 그들에 의해 공자의 가르침은 전승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교육이야말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넘어 천년지대계(千年之大計)였다. 공자를 공자이게 한 위대한 작업이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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