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70×65㎝, 소수박물관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70×65㎝, 소수박물관

연재의 마지막 글을 쓰기에 앞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성균관대학교에 갔다. 문묘(文廟)를 보기 위함이다. 문묘는 학교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다. 규모와 위용이 대단하다. 문묘 안에 들어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성전(大成殿) 앞 계단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온 듯한 남녀 한 쌍이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이름만 남고 실체가 사라진 공자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문묘는 대성전과 명륜당(明倫堂)이 결합돼 있다. 앞쪽의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위패를 모셔 놓은 제사 공간이고, 뒤쪽의 명륜당은 인재를 길러내는 강학(講學) 공간이다. 앞쪽에 제사 공간이, 뒤쪽에 강학 공간이 배치된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은 성균관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문묘와 성균관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문묘는 각 지방에 향교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향교 역시 제사 공간과 강학 공간이 기본이다. 대성전에서는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이를 석전(釋奠)이라 한다. 석전은 현재도 제사 공간으로서의 문묘의 기능이 살아있음을 말해준다. 강학 공간으로서의 성균관의 기능도 살아 있다. 아니 오히려 더 확대됐다. 명륜당만으로는 유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아예 더 넓은 공간을 찾아 담장 밖으로 나갔는데 성균관대학교가 예전 성균관의 강학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성균관의 역사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됐다. 유서 깊은 대학이다. 유교를 지향했던 조선시대에 성균관을 세운 목적은 하나였다. 조선의 국가 통치이념을 이해하는 유학자들을 길러내기 위함이다. 유학 교육의 중심에 공자가 서 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떠한가.

교육과 고전 정리로 여생을 보낸 공자에게 아쉬움은 없었을까. 왜 없었겠는가. 걸어온 발자국마다 아쉬움이 찍혀 있었을 것이다. 안회와 자로 같은 제자가 세상을 먼저 떠났고 아들 공리도 가슴에 묻은 지 오래됐다. 어느 날 공자가 탄식했다. 이를 본 손자 자사(子思)가 그 연유를 물었다. 공자는 “네가 어찌 나의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자사가 다시 말했다. “저는 아비가 장작을 패고 있는데 자식이 그것을 등에 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불초자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근심이 되어 게으르지 못합니다.” 아비가 장작을 패면 아들이 등에 지는 것은 부모의 유업을 잘 받든다는 관용어이다. ‘할아버지의 뜻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자사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손자라고 어리게만 생각했는데 어른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구나. 공자는 흐뭇했다. “이제 내가 근심할 필요가 없겠구나. 대대로 가업은 끊이지 않고 앞으로도 번창할 것이다.”

공자는 여러 저작들을 완성한 후 목욕재계하고 북두성을 향해 책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이때 하늘에서 무지개가 떨어져 문자가 새겨진 황옥으로 변했다. 공자는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문자를 받았다. 술이부작(述而否作·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자족하고 있을 때 서쪽 들판에서 기린(麒麟)이 잡혔다. 공자가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린이로구나. 기린은 인의를 상징하는 동물인데 나타나자마자 죽고 말았으니, 나의 도 역시 다한 모양이구나!” 공자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죽음이 가까이 온 걸까. 공자는 두 기둥 사이에 관이 놓여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자공을 불러 말했다. “태산이 무너지려나 보다. 대들보가 내려앉으려나 보다. 학식을 지닌 이가 죽으려나 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7일 후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애공 16년(기원전 479년)이었다. 공자는 노성(魯城·현재의 곡부)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안장됐다.

공자가 죽은 후 제자들은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묘를 지켰다. 각지에서 나무를 가져와 묘 주위에 심었다. 제자들은 삼년상을 치른 후 되돌아갔고 자공은 삼 년을 더해 육 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애공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당을 세웠다. 사당을 지킬 100여호의 가구를 옮겨와 살도록 했는데 이것이 현재 ‘천하제일의 집안(天下第一家)’이라고 불리는 공부(孔府)의 시작이었다. 노나라에서는 해마다 공자의 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후세에는 공자 사당에 공자가 쓰던 의관, 거문고, 수레, 서책이 보관됐다. 한대(漢代)까지 200여년 동안 공자 사당에는 한 번도 제사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 역시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지날 때 소, 양, 돼지의 제수(祭需)를 갖춰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송나라 진종(眞宗)은 봉선제를 가던 길에 공자의 사당에 배알했고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의 사당에도 참배했다. 진종은 공자의 72제자에게도 제사를 지내 추모하도록 했다.

공자는 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왕(素王·왕의 덕을 갖춘 사람)이라 불렸다. 시대가 흐르면서 공자의 이름 앞에 차츰차츰 높은 관이 씌워졌다. 시호(詩號)다. 제왕들이 올린 시호를 보면 다양하다. 노 애공은 추도문에서 니보(尼父)라 높였고, 한나라 평제(平帝)는 추존하여 니선공(尼宣公)이라 불렀다. 당 현종(玄宗)은 왕으로 한 단계 높여 문선왕(文宣王)이라 추존했고, 송나라 진종은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으로 부르다 다시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라 했다. 원나라 성종(成宗) 때는 여기에 대성(大成)을 더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고쳐 불렀다. 지성(至聖)은 지덕(智德)이 지극히 뛰어난 성인(聖人)을 뜻한다. 결국 공자의 마지막 시호는 지금까지도 대성지성문선왕이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는 공자에서 시작된 유가의 계보를 정리한 그림이다. 공자는 맨 위쪽 중앙에 홀을 잡고 앉아 있고 양 옆으로 안자와 자사, 증자와 맹자가 호위하듯 앉아 있다. 그들 옆으로는 공자의 직계 제자가 5명씩 병풍처럼 앉아 있고 이들 앞에는 83명의 제자가 앉아 있다.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세다. 파도처럼 두 줄로 펼쳐진 제자들은 맨 위에 앉은 공자를 향해 점점 간격이 좁아진다. 모든 시선이 공자로 귀결되게 하려는 계산이다. 공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좌우대칭의 구도만큼이나 치밀한 의도가 느껴진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는 유가의 질서가 정교하게 표시돼 있다. 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근엄하고 신격화된 공자가 박제돼 있을 뿐이다. 사당에 모신 그림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우상화 작업 때문에 공자가 더욱 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신화 속의 인물처럼 변질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는 인간적이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에는 그런 인간미가 제거돼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성인 공자만이 있다. 이 두 극단의 어디쯤에 우리가 만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공자가 있다. 공자를 추모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 공간과 강학 공간을 같은 장소에 마련한 문묘(성균관)의 배치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공자를 제대로 만났습니까? 앞으로도 그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