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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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총리 인선 때마다 물망에 오르는 인물, 공직자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청백리표상으로 상찬되는 인물. 그는 조무제(趙武濟) 전 대법관이다.

지난 8월 말 조무제 전 대법관이 부산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장에서 물러났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부산지방법원 안에서도 그의 퇴임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법원이 본인의 요청에 따라 퇴임식이나 환송식을 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모교인 동아대 법학원 석좌교수로 돌아갔다. 공직에서 떠났으니 당장 그가 언론에 등장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자는 조무제 전 대법관의 부산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장 퇴임 기사를 접한 뒤에 인터넷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인터뷰 기사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어떻게 그런 청빈한 공직 생활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 조선일보 부산주재 박주영 기자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셨어요? 그분은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해요. 휴대폰도 없어요.”

이 말이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람은 보통은 좋은 일로 언론에 나오고 싶어하는 게 자연스러운 욕망인데 그는 이를 애써 마다한다. 더군다나 그가 초등학생도 들고다니는 휴대폰이 없다는 말이 더욱 구미를 당겼다.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신문에서 마치 관용어구처럼 따라붙는 문장이 있다. △1993년 공직자 첫 재산공개 때 25평 아파트 한 채와 부친 예금 등 6434만원을 신고해 고위법관 103명 중 꼴찌를 기록했다 △1998년 대법관 선임 때도 그의 재산은 아파트 한 채와 7200만원에 불과했다 △2004년 대법관 퇴임 이후 변호사 개업이나 로펌으로 가지 않은 유일한 인물 △1993년부터 20년간 남몰래 모교에 학교발전기금 8000만원을 기부했다 ….

2014년은 사법부의 권위와 도덕성이 진흙탕에 추락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일일이 거명하기조차 민망한 이들이 탐욕과 타락의 퍼레이드를 벌인 곳이 법조계였다. 사상 유례없는 검찰·법원의 혼탁 속에서 절제와 희생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전 대법관 조무제가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조무제는 1941년 경남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월횡리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촌로·촌부였다. 옥종면 월횡리는 하동군이 산청군과 만나는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 월횡리 북서쪽에는 지리산의 장엄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덕천강이 흐른다. 월횡리는 고고학계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편이다. 바로 월횡리에 고인돌 7기(基)가 있기 때문이다. 월횡리는 한때 함안(咸安) 조(趙)씨 집성촌이었다. 월횡리 역시 여타의 농촌마을처럼 이농현상이 몰아쳐 빈집이 늘고 있는 상황. 현재는 마을 전체 중 함안 조씨가 10여가구 거주한다.

월횡리에서 가장 가까운 대처(大處)는 진주였다. 그는 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는 둘째 형(덕제)과 함께 진주 시내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의 집에는 둘째 형과 동갑인 가까운 친척 형(조범래)도 기거했다. 알려진 대로 사범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초등학교 교원 양성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덕제와 무제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해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마친 뒤 각각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덕제씨는 교사 생활 7년을 마치고 당시 럭키화학으로 옮겨 LG화학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졸업 성적이 좋았던 조무제는 당시 부산에서 최고로 평가받던 동신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그는 이와 함께 동아대 국문과 61학번 야간과정에 입학한다. 얼마 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낮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교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허약체질로 인해 군입대가 좌절된다. 초등학교 교사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야간부에서 주간부로 옮긴다.

재경동아대 동문회장을 지낸 정연준씨는 동아대 법대 61학번이다. 그는 학창 시절 만난 조무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조무제를 1학년 때는 몰랐다. 조무제가 2학년 때부터 주간학부로 옮겨오면서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 조무제는 정말 공부를 잘했다. 우리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항상 법대 수석이었다. 그는 3학년 때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조무제는 곧바로 2차 시험을 보지 않고 4학년 때인 1964년 2차에 합격했다. 1964년도 사법시험은 22명을 뽑았다.”

그는 이른바 향판(鄕判) 출신 대법관이었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1970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했다. 이어 대구고법 판사와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거쳤다. 판사 시절 단 한 번도 영남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1993년 첫 번째 공직자 재산공개 당시 그는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있었다. 결혼은 초임 판사 시절 했다. 배우자는 평범한 공직자 집안의 딸.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1994년 창원지법원장으로 승진했을 때의 일화다. 주변의 강권으로 전별금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엄격한 조무제 판사라고 해도 법조계의 오랜 관행인 전별금만큼은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무제 판사는 전별금 전액으로 책을 구입해 부산고등법원 도서관에 익명으로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급여나 법으로 정해진 수당이 아니면 일절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향판은 올해 여러 차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향판들이 토착세력과 내통해 사법정의를 능멸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장병우 전 광주지방법원장이다. 장병우씨는 광주지방법원장 시절 허재우 대주그룹 회장에게 “벌금 대신 노역을 하면 하루에 5억원씩 쳐준다”는 판결을 내려, 향판 폐지론을 불러온 장본인이 됐다.

모든 판사의 꿈은 대법관이다. 그러나 대법관이 되는 길은 험난하다. 하물며 비(非)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게다가 향판에서 대법관이 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 배기원·김신씨가 향판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낸 인물이다.

1998년 임기 6년의 대법관으로 지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대법관 신분이었지만 그는 전세보증금 2000만원짜리 원룸 오피스텔에 거주했다. 대법관에 배정된 관용차는 업무 외에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 출퇴근할 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대법관 퇴임 때도 재산은 부산의 아파트 한 채를 포함해 2억원가량이 전부였다. 대법관들은 퇴임 후 대부분 유명 로펌으로 직행, 전관예우를 받으며 부를 축적하는 게 관행이 되어왔다.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낸 김능환씨 역시 퇴임 후 부인의 편의점에서 일하다 ‘가정 사정’을 이유로 로펌에 들어갔다. 전 대법관 안대희씨 역시 “가족에게 더이상 부담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로펌행을 선택했다.

그는 달랐다. 2004년, 6년 임기의 대법관을 마치고 나서 로펌으로 가지 않고 동아대로 갔다.

그는 한 번도 언론과 개별 인터뷰를 하지 않았지만 공식적인 발언은 여러 번 있었다. 2004년 8월 17일의 대법관 퇴임식 때다. 조무제 전 대법관은 후배 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해관계에 얽힌 주변으로부터 초연하려면 고독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법관은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달갑지 않은 어둠 같지만 고독에 익숙해지면 미처 볼 수 없었던 은밀한 사물의 존재까지 알아보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보편성을 잃은 주장이라면 눈앞에 다가오는 여론이라 할지라도 그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은 깊이 있는 사색과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보편적인 상식을 가져야 한다.”

그는 대법관을 마치고 로펌행을 택하지 않고 모교인 동아대 석좌교수를 선택했다. 같은해 10월 7일 그는 동아대 법과전문대학원에서 ‘법과대학 생활의 목표와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첫 수업을 했다. 강연이 끝난 후 학생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 학생이 “법관 생활을 하면서 재물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조무제 석좌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있다 없다라고 사례를 공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법관이 사건과 관련해 유혹을 당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 법관의 청렴도도 다른 나라 법조인 못지않게 높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는 이날 세상의 시선에 대한 감정의 일단을 드러냈다.

“재산 상태로 법조인의 청빈도를 판단하기보다는 법관이 어떤 가치와 철학으로 재판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언론이 자신의 재산 상태만을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는 것에 대한 우회적 불만처럼 보인다. 왜 대법관으로서 어떤 판결을 했는지를 주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대법관 6년간 그가 어떤 판결을 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2003년 1월, 대법원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더라도 공무를 다루는 위원회에 위촉돼 직무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면 뇌물죄가 성립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2부 주심 조무제 대법관은 중앙약사심의위 소분과 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신약 안전성 검사 등과 관련해 제약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종세 전 식품의약품안전청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중앙약사심의위 소분과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위원으로 위촉된 사람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문을 한 안건의 심의가 끝날 때까지 공무원으로 볼 수 있다”면서 “피고인이 형법상 공무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은 공무원 법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2001년 5월에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됐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원 직위를 해제하는 것은 재량권 남용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기소된 공무원의 직위를 해제하려면 유죄판결을 받을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지 여부와 직무를 계속 수행할 경우 공정한 업무 집행에 위험이 생길지 여부 등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2001년 1월에는 진급을 앞둔 부하장교에게 빚보증을 서게 하는 것은 수뢰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 중령은 1차 진급 평정권자로서 직접 돈을 받지는 않았다고 해도 부하 장교에게 연대보증을 서게 함으로써 일체의 유형·무형의 이익을 의미하는 뇌물을 받은 것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뇌물의 직무 관련성은 담당 직무뿐만 아니라 직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 관례상이나 사실상 소관하는 직무행위, 결정권자를 보좌하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직무행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10월, 조무제 대법관은 족발집들이 즐겨 사용하는 ‘장충동’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상호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조무제 대법관은 10월 13일 ‘장충동 왕족발’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던 H식품이 허모씨를 상대로 낸 권리범위확인 소송에서 장충동 상호의 배타적 사용권을 인정해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던 원심을 깨고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서울 중구에 속하는 동의 이름인 장충동은 각종 운동경기가 자주 열리는 장충체육관이 위치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지리적 명칭으로 상표로서의 식별력이 없는 만큼 배타적 사용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위에 예시로 나열한 네 개의 판결은 법관 조무제의 삶과 상당 부분 일치해 보인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는 직업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기자는 대법관 조무제 주변 취재를 하면서 옥종면 면사무소 직원, 월횡리 이장, 월횡리의 가까운 친척, 동아대 법대 동기, 진주사범 동기 등과 두루 접촉을 했다. 이들은 모두 대법관 조무제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동아대 법대 동기인 정연준씨는 “나는 애들 결혼 때 무제에게 청첩을 했었다. 축의금도 보내왔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녀 결혼 때 청첩을 하지 않았다.”

인간 조무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고향 선배인 조범래씨, 진주사범 동기이며 판사 생활을 함께한 박준석씨 등이다. 조범래씨는 월횡리 시절부터 진주 시절까지를 소상히 아는 사람이다. 현재 부산에 거주하는 조범래씨는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 대법관이 공직자로서 저렇게 훌륭한 처신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좋은 습성 때문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비록 평범한 촌부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검소했고 아무리 어려워도 바른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으신 분이었다. 남한테 절대 신세 안 지고 정말 바르게 열심히 사신 분이다. 당시 진주 시장통에서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까지는 찻길로 80리, 걸음으로 50리였다. 어머니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 단 한 번도 차를 타고 다닌 적이 없다. 짐을 머리에 이고 재를 넘어 월횡리에 다녀오시곤 했다. 그렇게 아들을 키웠다.”

박준석 변호사는 진주사범 동기이지만 사법고시는 6년 아래다. 그는 인간 조무제에 관한 일화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박준석 변호사는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지금까지 친구인 조무제 판사에게 밥 한끼를 대접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친한 친구인데도 밥 한번 같이 못했다.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해도 자기한테는 전혀 신경쓰지 말라며 내가 미안할 정도로 간곡하게 거절하곤 했다. 조 판사는 차라리 진주사범 동기 모임에서 밥을 사라고 했다. 그런 그가 남을 도울 때는 아무도 모르게 하곤 한다. 정말 친구지만 대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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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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