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아일랜드·노르망디 10개 도시를 여행하는 크루즈선 로얄 프린세스호 갑판.
잉글랜드·아일랜드·노르망디 10개 도시를 여행하는 크루즈선 로얄 프린세스호 갑판.

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좋은 일이 아주 가끔 생긴다. 졸저 ‘영국인 재발견’ 덕분에 내 이름으로 된 크루즈 여행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안내자로 나서는 신나는 일이 지난해부터 생겼다. 이름도 거창한 ‘영국인 재발견의 저자 재영 저널리스트 권석하와 함께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일주 크루즈 15일’이다. 한국으로 치면 남해안 진해 정도에 위치한 사우샘턴(비운의 타이타닉호가 항해를 시작한 항구)에서 배가 출발해 노르망디 르아브르~에든버러~인버네스~글래스고~벨파스트~리버풀~더블린~코크~건지섬~사우샘턴~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을 거쳐 런던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문자 그대로 영국과 아일랜드섬을 뺑 도는 일주 코스. 요즘 유행하는 ‘영국 깊이 보기 관광’에 크루즈 여행이 합쳐진 것이다. 산타크루즈 회사가 운영하는 12만t 규모의 로얄 프린세스호를 이용한다.

‘크루즈 여행이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말처럼 크루즈 여행은 여행 중에는 제일 호화판이다. 편리하기도 하고 일정도 길고 경비도 비싸다. 이번 여행도 15일 일정이긴 하지만 항공권 포함 1인당 900만원이 족히 든다. 부부라면 결국 1800만원에 용돈까지 합치면 대략 2000만원을 써야 한다. 요즘은 크루즈가 일반화되어 옛날같이 진짜 부자들만 가는 여행은 아니라 해도 일반인이 쉽게 쓸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 만큼 다른 단체관광에 비해 편리한 점도 하나둘이 아니다.

크루즈는 일단 배에 올라 한 번 짐을 풀면 일정이 끝나 배에서 내릴 때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선실이 바로 집이 된다. 짐을 싸고 풀고 할 일이 없다. 거기다가 크루즈는 밤에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장거리 버스나 기차, 항공기를 탈 이유가 없다. 말이 그렇지 영국·아일랜드·노르망디의 10개 도시를 어떻게 이보다 더 편하게 볼 수 있나.

현대의 크루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이타닉 시절의 호화 유람선은 아니다. 선장이 승객 전원을 돌아가면서 초대해 식사를 같이하는 일도 승객이 3000~4000명이 되는 요즘의 초대형 크루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항공기 이코노미 수준보다 조금 더 정중한 대접이라고 보면 가장 적당하다. 복도를 지나가는 선원들이 열심히 인사를 하고 식당 종업원도 친절하긴 하지만 음식은 시내 호텔 뷔페 수준보다 결코 낫지 않다.

보통 크루즈를 타면 선내에서 먹는 모든 식음료는 무료라고 많이들 알고 있지만 슬프게도 이제는 이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선내에서 먹는 기본적 음식은 모두 무료지만 커피·홍차 같은 기본 음료를 벗어나면 유료다.

하지만 안심을 해도 좋은 점은 서비스나 음식의 수준이 도시의 고급 레스트랑에 빠지지 않지만 가격은 상대적으로 싸다는 점이다. 무료 정찬 식당의 음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요리인데 굳이 돈을 내고 먹는 음식의 값을 너무 비싸게 하면 손님이 안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적당히 가격을 매겨 놓았다.

매일 저녁 선내에는 번갈아 가면서 각종 쇼가 펼쳐진다. 굳이 옵션 투어를 택하지 않아도 선내에는 하루 종일 지낼 수 있게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사교댄스, 요가, 색종이 조각, 도자기 공예, 퀴즈 게임, 자수 바느질 모임, 브리지 게임 심지어는 스도쿠 게임도 있다. 물론 운동 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테니스는 몰라도 농구, 배구, 탁구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옵션 관광을 전혀 안 나가고 배 안에서만 즐기는 사람들이 거의 반도 넘는다. 그들은 “배 안에 무료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굳이 돈 주고 나가느냐”고 말한다.

북아일랜드 자이언트 코즈웨이
북아일랜드 자이언트 코즈웨이

이 원고를 쓰고 있는 7월 16일 현재 내가 타고 있는 로얄프린세스호에는 3560명의 승객과 1345명의 선원이 타고 있다. 거의 5000명이 배에서 움직인다. 승객 선실만 해도 1780개이다. 선원 선실까지 치면 2500개는 될 것 같다. 해서 뭍에서 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거대하다. 웬만한 광각렌즈가 아니면 선수에서 선미까지의 길이 330m가 렌즈 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바로 아래서 올려다보면 고개가 다 아프다. 17개층을 이룬 배의 높이가 38m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배가 거의 시간당 40㎞ 속도로 바다를 가르고 달리니 솔직히 말해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이제 각 항구에서의 일정을 살펴보자. 내가 크루즈 프로그램을 받아들었을 때 영국·아일랜드 일주 프로그램이라면서 왜 노르망디를 가는지 의아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알 수 있었다. 잉글랜드 역사는 로마가 물러간 뒤 소위 말하는 ‘암흑기(Dark Age)’를 거쳐 당시 선진국이었던 프랑스 노르망디를 지배하고 있던 노르망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시작한다. 그래서 영국 일주 첫 방문지를 노르망디 방문으로 잡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프랑스 서해안의 제일 큰 항구 르아브르에 내려서 대개의 승객들은 두 시간 거리의 파리 관광을 가지만 한국에서 온 일행 대부분은 파리는 여러 번 다녀온 탓으로 노르망디 해변의 보석 같은 마을 세 군데(에트르타·옹플뢰르·도빌)를 다녀오는 일정을 택했다. 사실 노르망디 해변과 마을의 아름다움은 이미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에트르타 마을 앞 바다의 코끼리바위는 ‘에트르타의 일몰’이라는 그림으로 익숙한 풍경이다. 바다로 들어가 있는 바위 사이에 파도가 구멍을 내서 흡사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대고 물을 빨아 먹는 듯한 모습이다. 노르망디를 좋아하던 모네는 여기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뿐만 아니라 옹플뢰르 마을은 어촌 포구로는 더 이상 따라갈 데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다. 더군다나 이 마을은 프랑스 요리로도 유명하다. 옹플뢰르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도빌은 칸느, 모나코와 함께 프랑스 부자들의 3대 휴양지 중 하나다. 카지노, 경마장을 비롯해 각종 명품 상점들이 카지노와 초호화판 호텔 옆에 들어서 있다. 코코 샤넬이 파리의 1호점 다음으로 상점을 연 곳이 바로 도빌이다.

잠시 프랑스의 맛을 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배만 타는 전일 항해 날이다. 사실 이날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 선내의 각종 프로그램과 요리 등을 차분하게 즐겨 볼 시간이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배는 달려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도착한다. 스코틀랜드 역사의 각종 애환이 담긴 에든버러성을 보고 나와 로열 마일을 천천히 걸으면서 길거리 백파이프 악사의 연주를 들으며 스코틀랜드의 정수를 즐기는 일은 결코 빠질 수 없는 관광이다. 그리고는 멜 깁슨의 인상적인 연기로 유명해진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배경 성이자 이 성을 지배하는 자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다는 전설 때문에 성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는 에든버러 외곽의 스털링성을 거치면 하루가 모자라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

이제 공룡을 닮은 수중 괴물 네스가 출몰한다고 해서 유명해진 하일랜드의 호반 도시 인버네스를 간다. 네스호에서 다시 유람선을 타고 호수 옆에 폐허로 남은, 발음도 잘 안 되는 우르콰르트성에서 스코틀랜드의 슬픈 역사를 듣는다. 배는 북해를 돌아 스코틀랜드 서해에 있는 스코틀랜드 제일의 도시 글래스고로 간다. 일정상 들르는 도시 중 가장 평범하고 볼 것이 없는 도시이다. 차라리 이 도시를 빼고 웨일스의 한 곳이나 잉글랜드 남부 콘월이나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모허절벽을 넣었으면 훨씬 더 기가 막힌 조합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부터는 아일랜드와 영국을 지그재그로 번갈아 방문하는 일정이다.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건너가서 1시간 반 거리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세계 자연 8대 불가사의라는 자이언트 코즈웨이로 간다. 제주도 주상절리의 10배는 됨 직한 기이한 돌기둥 해변에서 자연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맛본다. 거인이 바다 건너 애인을 만나기 위해 지었다는 바닷길이란다. 언제나 이렇게 사랑은 기적을 낳는가 보다. 벨파스트로 돌아와 타이타닉을 만든 조선소 자리에 세워진 타이타닉센터를 가서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타이타닉의 이야기를 듣고 만져본다. 왜 영국인이 타이타닉에 열광하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이제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을 가기 위해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리버풀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 없이 세기의 록 영웅 비틀스의 도시이다. 비틀스가 무명 시절 300회 이상 출연했다는 케이번 클럽에서 맥주도 한잔 하고 아프리카 노예들을 잡아와 미국으로 싣고 가서 팔아먹던 알버트 독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가 봐야 한다. 거기에는 비틀스의 각종 소지품과 함께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 여기를 들르지 않고는 ‘리버풀 비틀스 투어’를 했다고 할 수 없다. 초기 비틀스의 사진부터 폴 매카트니가 쳤던, 너무 백색이라 야하다는 느낌이 드는 새하얀 미니 그랜드 피아노를 비롯해 과연 이런 안경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두꺼운 존 레논 안경도 있다.

다시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넘어간다. 아일랜드인의 멍든 가슴이 만들었다는 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갈색의 기네스맥주 공장으로 간다. 공장 투어를 마치고 더블린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꼭대기층으로 올라간다. 입장권을 주면 한 잔 주는 기네스는 맛이 특별나다. 그리고는 트리니티칼리지 도서관에서 천장 높이 쌓인 가죽 장정의 고서에 경악한 다음 다시 시내 공원 한구석 바위 위에서 세상을 조롱하듯이 비스듬히 누워 앉아 있는 정말 희한한 모습의 오스카 와일드 동상을 봐야 한다. 와일드는 동성 연애를 했다는 죄로 받은 강제노역형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리로 건너가 영국은 물론 고향 아일랜드로도 돌아오지 않고 죽어 파리 공동묘지 한구석에 묻혔다. 이 와일드의 무덤은 세계에서 온 뭇 여인들이 키스로 남긴 루즈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성연애자 무덤에 키스 마크를 남기는 여인들의 심리는 뭔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에트르타 마을의 코끼리바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에트르타 마을의 코끼리바위

이제 배는 아일랜드의 가장 남쪽 도시 코크로 간다. 코크는 사우샘턴을 떠난 타이타닉호가 마지막으로 들른 항구이다. 여기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아일랜드인을 실은 다음 다시 항해를 했다가 타이타닉호는 결국 운명의 빙하를 만나 침몰한다. 코크에서 할 일은 ‘블라니’라는 별로 특이할 것 없는 성의 제일 위 첨탑에 있는 돌을 보러가는 것이다. 이 돌에 몸을 뒤집어 매달려 키스를 하면 달변가가 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자식을 나중에 지도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많이 온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도 다녀간 적이 있고, 클린턴도 다녀가서 달변이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자랑을 안내인은 한참 한다. 그리고는 코크 남쪽 바닷가에 있는 킨세일이라는 조그만 어촌 마을로 간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순박한 어촌 마을이다. 순박한 마을 풍경을 보러 관광버스들이 모여든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정은 우연인지 모르나 타이타닉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타이타닉이 처녀 항해를 한 사우샘턴에서 크루즈배도 출발했고 타이타닉을 만든 벨파스트 조선소를 거쳐 마지막 기항지인 코크까지 다녀가니 말이다. 우리는 호화 여객선을 타고 호화 여객선의 침몰 흔적을 찾아다니는 묘한 일정을 소화하는 셈이다.

이제 마지막 일정인 건지섬으로 간다. 영불해협에 위치한 건지섬은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를 교대로 받고 심지어 2차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다. 독일군은 건지섬을 비원의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사용하려고 각종 참호나 방어시설들을 만들어 놓았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이 섬에서 일부 쓰기도 했다고 해서 만들어진 조그만 빅토르 위고 하우스는 크루즈가 들어올 때는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집이 좁아 한 번에 10명밖에 못 들어가서다. 건지섬에 이런 유명 작가의 자취가 있다는데 안 들르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사실 건지섬은 이런 크루즈 항해가 아니면 들르기 어려운 섬이다. 특이한 역사뿐 아니라 영국령이되 영국 법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섬이다.

이제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울로 가는 항공편을 타기 전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찾는다. 자신의 무덤에 손을 대는 자는 저주가 있으리라는 특이한 묘비 밑에 누운 세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무덤을 마지막으로 서둘러 히드로공항으로 가야 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을 이런 크루즈 말고 2주라는 짧은 기간에 돌아볼 방법은 없다. 앞으로는 영국·아일랜드를 도는 크루즈선에서 친지들을 만날 기회가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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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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