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요섭 바리스타가 드립커피를 만들고 있다.
권요섭 바리스타가 드립커피를 만들고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신곡’의 지옥문 입구에 쓰여 있는 유명한 말을 인용한 헬카페의 슬로건에서 당돌함과 재치를 느꼈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헬카페는 카페 ‘좀비커피’ ‘매드커피’와 함께 한국 커피 업계에서 마성의 시리즈로 꼽힌다. 카페 ‘보통’과 더불어 이태원에 스페셜티 커피 시대를 열었다. 2010년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 3등을 거머쥔 카페 ‘뎀셀브즈’의 임성은 바리스타와 홍익대 일대서 골수 커피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카페 ‘곰다방’의 권요섭 바리스타가 의기투합해 2013년에 오픈했다.

아직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헬카페를 찾는 주 고객은 지역의 단골손님들과 동료 바리스타들이다. 이곳에서는 커피 블로거 조원진씨, 미식 컨설턴트 김혜준 교수, ‘매드커피’ 김영현 바리스타, ‘외계인커피’ 김동민 바리스타, ‘프츠’의 송성만·박근하 바리스타와 같이 쟁쟁한 커피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커피 업계에서 인정받는 곳이지만 매장의 모습은 의외로 화려하지 않다. 카페에 들어서자 커다란 커뮤니티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바카라 크리스털 꽃병에는 꽃이 한 다발 꽂혀 있었다. 빈티지 탄노이 아룬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카페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얼마 전 매장 확장을 했다는 카페의 곳곳에서 두 바리스타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권요섭·임성은 바리스타가 함께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첫 커피로 헬카페 블렌딩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이곳은 핸드드립 필터로 융드립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종이 필터를 사용할 때와 달리 융 드립은 유분이 넉넉히 추출되어 질감이 좋고 커피의 향미도 더욱 배가 되는 방식이다. 가장 이상적인 추출방식으로 꼽히지만, 워낙 방법이 까다롭고 관리가 어려워 일반 매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30g이 넘는 커피를 잔뜩 넣고, 점 드립으로 충분히 불림을 한 뒤 오랜 시간에 걸쳐 180g의 커피를 추출한다. 헬카페의 아이스 드립 커피는 아이스 버킷을 통해 급속냉각된 후 매장에서 직접 칼로 셰이빙한 칵테일 통얼음과 함께 차가운 나흐트만 글라스에 담겨 나온다. 칵테일 매장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칵테일 얼음은 단단하면서도 쉽게 녹지 않기 때문에 커피를 희석시키지 않고 그 맛을 더 오래 유지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나흐트만 글라스는 바닥이 두껍고 오랫동안 냉각된 얼음 잔으로 차가움을 더욱 오래 지속시켜 줄 수 있다.

이름에 걸맞은 ‘헬카페’의 외관.
이름에 걸맞은 ‘헬카페’의 외관.

단단한 얼음과 냉동된 나흐트만 글라스 덕에 강배전 블렌딩의 느낌이 더욱 도드라진다. 헬카페의 핸드드립 커피에서는 커피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단맛, 산미, 밸런스가 모두 녹아 있는 맛이라고 할까? 헬카페의 블렌딩은 브라질 마이크로 랏, 모카하라, 과테말라COE, 콜롬비아COE까지 단종 커피보다도 훨씬 좋은 생두들로 구성이 되었다. 저품질의 커피를 강하게 태운 쓴맛은 커피인들에게도 상당히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헬카페의 아이스 커피에서 나는 쓴맛은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견고함, 쓴맛 속에 함유된 깊은 단맛,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과일과 꽃 향이 총체적으로 포함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철에는 아이스 핸드드립이 인기가 좋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100mL 정도의 커피잔에 담겨 나오는 핸드드립 커피를 추천하고 싶다. 이 커피는 운이 좋으면 에르메스 커피잔으로 우아하게 맛볼 수 있다. 투박한 매장 분위기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커피잔이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린다. 매장에는 에르메스 커피잔 이외에도 다양한 골동품 커피잔들이 많은데 권요섭·임성은 바리스타가 몇 년 동안 틈틈이 모아 온 것들이다. 커피잔을 구하다가 이베이에서 국제사기단에 사기를 당한 적도 있고, 계산 착오로 원래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한 적도 있었다고. 수북이 쌓인 커피잔에서 두 바리스타의 커피 인생과 커피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매장에는 에르메스잔을 비롯해 골동 커피잔들이 많다.
매장에는 에르메스잔을 비롯해 골동 커피잔들이 많다.

헬카페의 핸드드립과 함께 인상 깊었던 메뉴는 임성은 바리스타의 ‘클래식 카푸치노’다. 선천적으로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그가 피나는 노력 끝에 개발한 메뉴로서 기술적 측면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카푸치노로 꼽힌다. 클래식 카푸치노는 크레마와 우유의 조합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반 잔 정도를 일정 속도로 유지하며 마실 것을 권장한다. 먼저 진한 커피 향이 크레마를 뚫고 입안 가득 퍼지면 곧 이어 잘 스티밍된 우유 성분이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코팅한다. 카푸치노의 교과서적인 모습으로 단계적인 밸런스가 규칙적이어서 일관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손님이 맛과 향을 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좌석 바로 앞에서 밀크 푸어링을 해주는 배려가 돋보인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고운 우유 거품이 올라간 웨트 카푸치노의 궁합은 마치 커피맛 생크림을 연상시킨다. 목넘김에서 느껴지는 카푸치노의 미끈한 감촉을 한번 느껴보면 오래도록 그 기억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커피 이외의 메뉴로는 시즌에만 맛볼 수 있는 당근 주스가 있다. 제주에서 항공으로 공수해온 당근을 쓴다는 이 주스는 조기 품절되는 경우가 많아 매장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메뉴라고 한다. 대부분의 메뉴는 5000원을 넘지 않는 선이며 테이크아웃 시에는 2000원을 할인해준다. 테이크아웃 컵은 일회용 컵 특유의 이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 전 반드시 더운물로 린스하는 세심함을 잊지 않는다.

헬카페에는 두 젊은 바리스타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벽돌 하나하나부터 실내 도색까지 어느 한 곳 이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샘플 로스터의 연기에 눈물이 나고, 카푸치노를 만들기 위해 피처를 들고 다니느라 근육통에 시달리지만, 3년 전 카페 오픈 이래로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치열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핸드드립처럼 손이 많이 가는 메뉴들을 정리하면 편할 일이지만, 헬카페는 단골들을 위해 매출 손해를 감수하며 바쁜 일상을 마다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커피를 사랑하는 바리스타가 있는 곳, 그런 카페가 커피 매니아들에겐 천국이다.

서울시 용산구 보광로 76

(010)4806-4687

심재범

아시아나항공 선임사무장, 아시아나항공 바리스타팀 그룹장.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SCAA) 큐그레이더. 호주관광청 인증 바리스타. 저서 ‘카페마실’ ‘스페셜티 커피 인 서울’

심재범 아시아나항공 바리스타팀 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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