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 무지개 색깔의 비닐테이프를 바닥에 길게 깐 짐 람비의 ‘주보프’라는 작품.
색동 무지개 색깔의 비닐테이프를 바닥에 길게 깐 짐 람비의 ‘주보프’라는 작품.

올여름 런던 중심가 피키딜리 벌링턴 하우스에서는 어김없이 ‘영국 왕립예술원 여름전시회(Summer Exhibition of Royal Academy of Art)’가 열렸다. 이 미술 전시회는 1768년 처음 열린 이후 한 번도 중단되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다. 1·2차대전 중에도 개최되었다. 올해가 247회째. 이 전시회는 영국에서 로열 아스코트 경마 시합, 헨리 로열 레가타 보트 경주, 윔블던 테니스 대회와 함께 ‘전통의 여름 4대 행사’로 꼽힌다. 올해에는 6월 8일부터 8월 16일까지 68일 동안 개최돼 16만7000명이 다녀갔다. 대단한 성공이라는 평이다.

왕립예술원의 여름전시회는 1년에 한 번 열린다. 한국의 미술대전과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한국처럼 전시품의 우위를 가려 순위를 매기고, 상을 주고, 추천작가 등을 배출하기 위한 전시회가 아니다. 영국 예술을 발달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전시회라고 하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예술가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구나 작품을 출품할 수 있고 모든 출품작을 누구나 구매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이런 전시회는 대개 추천이나 초청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 영국의 여름전시회는 모두에게 개방돼 있다. 예술원 회원은 6점까지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특권이다. 예술원은 일반인의 출품작을 받아 이 중 일부를 선정해 전시한다. 올해에는 일반 출품작 1만2000점 중에서 1262점을 선정, 전시했다. 그래서 이 여름전시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전시회(world largest open submission exhibition)’라는 평을 받고 있다. 예술원 회원이 아닌 작가들은 일반인과 똑같이 작품 선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화풍이 알려진 유명작가의 작품도 출품되지만 기본적으로 선정위원들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돼 있다. 그렇게 선정된 작품들이 중앙 3개의 메인홀을 비롯해 12개의 전시장에 전시된다. 유명·무명 작가들의 작품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걸린다. 10만파운드짜리 거장의 유화 옆에 500파운드짜리 판화가 걸리는 식이다. 가격도 화랑의 도움 없이 작가가 알아서 매긴다. 그야말로 민주적이고, 정말 영국적이다. 무명작가가 한순간에 유명작가가 되는 일도 벌어진다.

상업적인 전문 화랑이 존재하지 않던 18세기 조지아 왕조 시절이나 19세기 빅토리아 시절, 이 전시회는 실력 있는 무명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영국 최고의 초상화 및 풍경화가로 유명해진 토마스 게인즈보로도 유명인사나 화제의 인물 초상화를 주문 없이 그린 후 이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당시는 구매자 시장이어서 주문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초상화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여름전시회의 또 다른 특징은 일반적인 미술관이나 상업 갤러리처럼 그림 한 점 한 점이 거리를 두고 은은한 조명 밑에 우아하게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조지아 왕조 시대나 빅토리아 시대는 정말 그림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서로 다닥다닥 붙어(pile-them-high, pack-them-tight)’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복잡하게’ 전시되고 있다.

이렇게 여름전시회는 도저히 한자리에 어울릴 수 없는 작품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축제다. 지명도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고, 성향도 완전히 다른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아마추어 화가에게 어느 날 자신의 작품이 유명화가 작품 바로 옆에 걸리는 일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당연히 그들의 흥분과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이 여름전시회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세계 어디에서고 이런 ‘무질서하고 잡동사니 같은’ 전시회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나온 장난기 섞이고 호의적인 표현이 ‘고급 폐품 상점(high-end junk shop)’이라는 말이다. 현존 영국 최고의 화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는 ‘잡동사니 세일(jumble sale)’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 기자는 이런 말들을 인용해 올해 전시회를 ‘잡동사니 세일이긴 한데 색채의 열의와 열기가 있는 잡동사니 세일(a jumble sale with pizzazz and a chromatic zing)’이라고 했다.

올해에는 TV 연기자부터 유명 코미디언 등 다양한 아마추어 화가들의 작품이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다. 왕립예술원 여름전시회 중 가장 컬러풀한 전시회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올해 여름전시회 수석 큐레이터가 영국 젊은 악동 예술가(YBA·Young British Artist)들의 배출처로 유명한 골드스미스 아트스쿨에서 가르치던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이었기 때문이다. 골드스미스 아트스쿨에서 ‘세상을 뒤집은 괴물들을 키운 괴수’가 유서 깊은 여름전시회를 주관하다니 세상이 변하기도 많이 변했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예술원은 크레이그-마틴을 여름전시회에 새 바람, 새 생명을 불러일으킬 적임자로 봤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크레이그-마틴은 입구부터 전시회장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꾸몄다. 현대미술만을 전시하는 테이트모던미술관을 입장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동안 비어 있던 정문 앞마당에는 콘라드 쇼크로스라는 최연소(38세) 예술원 회원이 제작한 ‘얼룩진 태양광’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언론들의 표현에 의하면 ‘기하학적인 철제 구조물의 나무숲(geometric steel frame woodland)’ 같은 작품이다. 대형 철 사다리 구조물 같은 작품은 밑으로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6m의 높이, 5t 무게의 구조물이다. 정문을 통과해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이층계단에는 변화무쌍한 색동 무지개 색깔의 비닐테이프를 바닥에 깔아 축제 분위기가 나게 했다. 짐 람비 작가의 ‘주보프’라는 작품이다. 관람객이 처음 들어서는 전시실 3개의 벽은 각각 밝은 청록색, 하늘색, 짙은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통상 미술 전시장 벽을 무채색으로 꾸미는 관례를 깬 것이다. 첫 전시실 중간에는 매튜 다르비셔의 ‘도리포로스’라는 작품이 서 있다. 그리스 조각에서 모티브를 얻은, 창을 든 압도적인 높이의 기사상이 아크릭으로 만들어져 세워져 있다.

나머지 전시장 12개에는 앞서 얘기한 대로 작품들이 진짜 다닥다닥 붙어있다. 여기에 전시된 거의 모든 작품을 살 수 있다는 점도 정말 영국적이다. 3파운드를 내면 작품번호와 작품명, 작가 이름, 가격이 적혀 있는 작품 목록을 살 수 있다. 작품과 가격을 심각하게 보고 다니는 관람객이 많다. 구매를 목적으로 온 이들이다. 눈 밝은 구매자가 여름전시회에서 무명작가 작품을 사서 몇 년 뒤 대박을 쳤다는 얘기는 새로운 게 아니다. 심지어는 돈을 받고 투자 자문을 해주는 전문가도 있다. 작품을 사지 않더라도 목록을 들고 흥미 있는 작품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무 비싼 가격에 한숨도 쉬지만 주머니 사정을 조금 쥐어짜면 구입 가능할 것 같은 작품도 있다. 다량 제작이 가능한 판화의 경우는 수십 개의 붉은색 원형 스티커가 붙어 있다. 팔린 만큼 이 스티커가 붙는다.

그렇게 전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졸저 ‘영국인 재발견’ 표지 그림의 작가인 팝아티스트 줄리언 오피의 판화를 발견했다. 두 점이 각각 다른 방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한 작품의 가격이 8600파운드였다. 그 양쪽으로 유명하지 않은 판화가의 작품이 850파운드, 400파운드의 가격표를 달고 붙어 있었다. 오피의 다른 작품은 무려 2만3500파운드였는데 그 옆의 작품은 오른쪽 왼쪽 모두 450파운드였다. 이렇게 여름전시회에는 수백만파운드짜리 집 옆에 그 값의 10분의 1밖에 안 하는 집이 위화감 없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영국의 주택가 같다.

예술원은 여름전시회 작품 판매가 중 30%를 일반 화랑처럼 수수료로 받는다. 이렇게 해서 예술원은 거의 매년 100만파운드 이상의 수익을 올린다. 그 돈 전부는 예술원 예술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비용으로 쓴다. 덕분에 예술원 예술학교 학생들은 영국의 다른 대학교와는 달리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한다. 이 학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학교로 본격적인 전문 예술가 교육을 처음 시작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엘리트 아트스쿨로 꼽힌다.

여름전시회가 열린 영국 왕립예술원.
여름전시회가 열린 영국 왕립예술원.

영국 왕립예술원은 이름과는 달리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정부기관이 아니다.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저명한 예술가나 건축가가 운영하는 독립기관(independent, privately funded institution led by eminent artists and architects)’이다. 영국 시각예술의 발전을 전시와 교육을 통해 꾀한다는 목적으로 조지3세의 칙령에 의해 세워졌다. 여름전시회 이외에도 역사적인 거장의 명화 전시회나 생존하는 거장 초대 단독 전시회를 수시로 연다. 연간 120만명이 관람을 해 관람객 순위로는 영국 내 관광지 중 11위를 기록할 정도로 국가 보조 없이도 성공적으로 운영해 가고 있다.

예술원이라고 하면 전통 예술만을 지키는 고루한 곳이라는 인상을 갖기 쉽지만 영국 예술원은 열려 있다. 예를 들면 예술원은 1997년 ‘충격(Sensation)’이라는 전시회를 열어 세상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전위예술가라고 불릴 정도로 난해한 YBA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일반인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모험을 했다. 전시 작품들은 세계 일류 광고회사 설립자이자 YBA 작품 전문 수집가인 찰스 사치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전시회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경악 수준이었다. 잉크와 달걀이 작품에 던져지고 심지어는 폭파 위협까지 나올 정도였다. 특히 34세의 마르쿠스 하비라는 신진작가의 작품이 문제였다. 어린이를 다섯 명이나 살해하고 종신형을 받았지만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피해자 유해 매장 장소를 밝히지 않아 유족들의 애를 태운 극악한 살인자의 대형 초상화(2.7×3.4m)가 하비의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사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어린이들의 손자국을 모아 모자이크 방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도저히 전시할 수 없을 것 같은 작품이었지만 영국 예술원은 이를 전시했다.

예술원은 80명의 현직 예술가들로 이루어진다. 전 회원이 총회에서 선출되는데 80명 중에 조각가가 14명, 건축가가 12명, 판화가가 8명이고 나머지 46명이 화가이다. 75세가 되면 원로회원이 돼 예술원 업무에서는 제외되지만 다른 권한은 다 가진다. 이름 뒤에는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예술원 회원이라는 RA(Royal Academician) 표시가 따른다. 언론에서는 물론 어느 서적이나 자료에도 항상 RA 표시를 한다. 그만큼 존경스러운 직함이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작품을 예술원에 기증해야 한다. 초대 원장부터 시작된 전통이다. 이러한 작품 기증과 함께 다른 후원자들의 기증으로 현재 예술원 소장예술품은 1000여점에 달한다. 제대로 된 미술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예술원의 2014년 예산은 3314만파운드였다. 그중 딱 50%인 1660만파운드가 후원자들로부터의 기부와 유산 등에서 나왔다. 특히 그중 거의 반인 818만파운드가 예술원후원자협회(the Friends of the Royal Academy)의 8만7000명 회원들로부터 나왔다. 예술원 후원자협회는 예술원과는 별도 재단으로 1977년 설립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예술원 후원자들이 세상을 뜨면서 예술원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일도 굉장히 많아졌다. 지난해에는 78건의 유산이 예술원으로 넘겨졌다. 이런 후원자들로부터의 수입이 없다면 영국 예술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다. 영국의 기업과 상류층이 예술원과 어떤 관계인지는 올 여름전시회 작품목록 뒤에 나오는 예술원 재단이사와 개인 후원자, 후원 기업의 명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재단 이사들은 물론이고 개인 후원자 명단을 보면 영국 상류층이나 지도층을 총망라한 듯하다. 영국 공익 재단의 이사는 대부분 명예직이지 어떤 대가가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 왕립예술원 같은 문화재단 이사 자리는 저명인사라면 누구나 이름을 올리고 싶어하는 명예로운 자리다. 하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다. 우리처럼 전직 고위직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경우는 없다. 어떤 면에서든 실제 예술원을 도울 수 있는 사회 명사여야 한다. 거기다가 예술원이 어떤 기관인가. 이름에 왕립이 붙어 있어서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왕가와 연관이 있다. 예술원 재단 명예이사장이 찰스 왕세자이고 주요 후원자 명단 중 제일 첫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예술원 후원자 명단에는 두 개의 외국인 단체도 보인다. 하나는 ‘왕립예술원 미국인 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the Royal Academy Trust)’ 명단이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일본인 명예위원회(Japanese Committee of Honour)’ 회원 명단이다. 미국이야 영국과 특별한 관계이니 이해를 한다고 쳐도 일본인이 이런 식의 단체를 만들어 예술원을 후원한다는 것은 상당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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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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