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 ‘모견도’, 16세기 초, 종이에 먹, 73.2×42.4㎝, 국립중앙박물관
이암, ‘모견도’, 16세기 초, 종이에 먹, 73.2×42.4㎝,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1402)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사간원에서 태종에게 간쟁(諫諍)을 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사간원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이 간쟁한 내용이 재미있다. ‘(왕이) 옷이 좋고 아름다워 제도를 따르지 않고, 매(鷹)와 개(犬)를 좋아하며 성색(聲色)을 즐기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셨다’이다. 한마디로 국사를 돌봐야 할 왕이 사치가 심하고 사냥을 좋아하며 지나치게 여자를 밝힌다는 일침이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간쟁을 하다니 너무 한가로운 시대가 아니었을까 상상하기 쉽다.

문제의 발단은 의외로 사소한 곳에 있다. 몇 해 전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시리즈에서 시구할 때 아식스 운동화를 신은 것이 네티즌의 도마에 올랐다. 아식스는 일본 제품이다. 독도 문제로 일본에 대해 감정적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대통령이 ‘메이드 인 재팬’을 홍보한 거나 다름없으니 네티즌이 발끈한 거다. 사간원과 네티즌이 지적한 것은 단순한 옷과 신발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세가 아닐까.

태종의 취미생활 때문에 괜히 죄 없는 개까지 싸잡아 도매금으로 수모를 당했다. 조금 불명예스러운 계기였지만 그 덕분에 개의 존재감이 국가프로젝트로 진행된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었다. 왕이 사냥할 때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는 사냥개 이전부터 매우 중요한 동물로 인정받았다. 부여(扶餘·기원전 2세기~494)의 관직명에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와 함께 구가(狗加)가 들어간 것을 보면 개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조에는 “유화부인이 다섯 되 크기의 알을 낳았는데 금와왕이 개와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았다”라고 하여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개가 사육되었음을 시사한다.

개가 항상 지탄의 대상으로만 구설수에 오른 것은 아니다. 집을 잘 지키고 사람을 따르는 충직하고 영리한 동물로 사랑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응희(李應禧)가 쓴 ‘옥담시집(玉潭詩集)’에는 개를 극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개는 ‘가축이라 미천한 동물이지만 북두성의 정기를 품었다’고 칭찬한 다음 ‘도둑을 지키는 어여쁜 성품’과 ‘주인을 연모하는 정성이 사랑스럽다’고 덧붙였다. 북두성의 정기까지는 좀 과하지만 사랑스러운 것은 맞다. 이런 개를 복날이라 해서 어찌 잡아먹을 수 있으랴. ‘여러 해 동안 정성 들여 길렀으니 차마 목숨을 죽이지 못하겠다’고 글을 끝맺는다. 그 때문일까.

개는 반려동물 중에서 정서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깝다. 개는 인간이 야생의 짐승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든 첫 번째 동물이다. 십이지지(十二地支)의 열한 번째 동물인 개는 늑대과의 동물이 가축화됨으로써 야생성을 상실하고 인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자로도 여겨졌다.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때 저승에서 이승으로 올 때 하얀 강아지가 길을 안내한다는 사상은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까지 널리 퍼져 있다. 알 수 없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갈 때 기왕이면 자신과 친숙한 동물이 길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비롯한 신앙이리라.

신석기 유적인 부산 영도구의 동삼동 패총에서는 개의 머리뼈가 출토되었다. 개가 제사에서 주술적 목적으로 희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의 뼈는 수렵과 호신(護身)을 위해 다듬어서 몸에 지녔다. 정초에 잡귀와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집 대문이나 광문에 개를 그려 붙이는 문배도(門排圖)가 성행한 것도 벽사(辟邪)적인 의미에서다.

순한 사람이 화내면 무서운 법. 개도 마찬가지다. 고대 우리 민족은 개가 사람에게 충성스러운 동물인 만큼 평소에 하지 않던 이상한 행동을 할 때는 불길하다고 인식했다. ‘개가 지붕 위에 올라가면 흉사(凶事)가 있거나 가운(家運)이 망한다’ 혹은 ‘개가 문 앞의 땅을 파면 불길하고 문 앞에 굴을 파면 주인이 죽는다’는 속담이 그러하다.

개가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해 온 만큼 개를 그린 견도(犬圖)도 매우 다양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 그림까지 수많은 종류의 개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4세기에 제작된 고구려의 안악3호분 벽화에는 음식 냄새를 맡고 부엌 주변을 얼쩡거리는 개가 그려져 있다. 덕흥리고분에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소의 고삐를 쥔 견우(牽牛)와 개를 데리고 서 있는 직녀(織女)의 전설이 그려져 있다. 각저총에는 씨름하는 사람들 곁 심판관 뒤에 개가 나무에 묶여 있다. 각저총으로 들어가는 널길(羨道) 오른쪽 벽에는 목에 검은 띠를 두른 누런 개가 컹컹 짖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다. 장천1호분의 예불 장면에는 불상(佛像) 대좌(臺座)에 사자를 닮은 사자개가 앉아 있다.

작가 미상, ‘문배도’, 종이에 색, 45×34㎝, 개인
작가 미상, ‘문배도’, 종이에 색, 45×34㎝, 개인

무용총의 무용 장면에는 말을 타고 연회에 참석하는 주인 앞에 개가 그려져 있다. 수렵 장면에서는 말을 타고 가는 무사 옆에 사냥개가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개는 무덤을 지키는 수묘견(守墓犬)임과 동시에 불법을 지키는 사자개이고 귀족들이 데리고 다니거나 집안에서 기르는 동물이다. 고신라에서 제작된 토우(土偶)에서도 여러 마리의 개가 발견된다.

우리나라 토종개는 진돗개, 삽살개, 풍산개, 제주개, 오수개, 발바리 등이 있다.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삽살개는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되었고 발바리는 재상가들의 애완견으로 사랑받았다. 특히 삽살개는 귀신 쫓는 개로 인식되었다. 신라시대 때는 왕실과 귀족들이 삽살개를 매우 신성하게 여겼고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사자개로 숭상되었다. 사자개는 고려 불화(佛畫)의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에 등장한다. 지장보살은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수라·하늘·인간세상의 여섯 가지 세상)의 중생을 구원하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이다.

지장보살도에는 선청(善廳·사자 형상을 한 흰 개)이라는 금모사자(金毛獅子)가 그려진다. 선청은 대비보살을 돕는 신비스러운 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몸통이 흰색인 선청은 조선의 삽살개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을 한 반면 몸은 흰색이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하고 왕방울처럼 튀어나온 눈을 부라리는데 귀에는 머리카락처럼 치렁치렁한 털을 늘어뜨렸다. 목에 단 방울이 아니었더라면 개로 보기 힘들다. 현실세계에는 없는 개를 형상화하기 위한 의도임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의 개는 나무 아래 그려진 경우가 많다. 조선 전기의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이 그린 ‘모견도(母犬圖)’가 대표적이다. ‘모견도’는 어미개가 나무 아래 앉아 있고 세 마리 강아지가 젖가슴을 파고드는 그림이다. 어미개는 몸통이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외래종으로 머리에 비해 얼굴이 넓고 길다. 어미 품을 파고드는 검둥이와 흰둥이는 젖을 찾느라 바쁘고 포만감에 빠진 누렁이는 어미 등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어미개의 목에 걸린 화려한 목걸이는 개의 주인이 왕족이나 귀족이었음을 말해준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가미된 목줄로 인해 단조로운 먹색 그림이 산뜻하게 살아난다.

배경처럼 등장한 나무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다. 몰골법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의 농담(濃淡)만으로 면을 채색해 나가는 기법이다. 이암은 ‘모견도’에서 나무의 일부를 그려 공간을 만들고 그 아래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집어넣는 구도를 따랐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전형적인 구도다. 나무 밑에 개를 그린 것은 단순히 개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둑맞지 않게 집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개를 뜻하는 술(戌)은 지킬 수(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 지킬 수(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고 나무 수(樹)와도 같다. 나무 아래 개가 있는 그림을 붙여 놓음으로써 도둑을 막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고구려 고분의 널길에 진묘수로 개를 그려 넣는 전통이 끈질기게 전해진 경우다.

이암은 ‘모견도’ 외에도 ‘화조구자도’ ‘화조묘구도’에서 황구와 백구 등의 토종개를 그렸다. 개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가축인 만큼 이암 외에도 많은 작가가 개를 그렸다. 조선 중기의 이경윤, 김두량, 김희겸을 비롯해 조선 후기의 조영석,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변상벽, 이희영 등 여러 작가들이 풍속과 결합한 개 그림을 남겼다. 그 전통은 조선 말기의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채용신으로 이어진다.

특히 삽살개가 가려운 데를 긁는 익살스러운 모습을 생동감 있게 잡아낸 김두량의 ‘긁는 개’, 일꾼들이 전부 식사가 끝나면 던져주는 음식을 먹으려는 듯 조용히 기다리는 김홍도의 ‘새참’, 부잣집 담장 안에서 소복 입은 젊은 과부와 몸종이 교접하는 개를 보고 있는 신윤복의 ‘이부탐춘’, 더운 여름날 웃통을 벗어젖히고 짚신을 꼬는 주인 곁에서 개도 더워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는 김득신의 ‘성하직구’ 등은 개 그림의 백미로 꼽힌다. 고구려 벽화에서 시작된 벽사적인 의미의 개는 민화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곁에 항상 개가 있었듯 개를 그린 개 그림도 계속 그려질 것이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면 개 그림도 바뀐다. 미래에는 어떤 개 그림이 등장할까.

조정육 미술사가·‘그림공부 인생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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