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사기’의 일부 / ‘욥기’의 일부 / 사마천 초상
(왼쪽부터) ‘사기’의 일부 / ‘욥기’의 일부 / 사마천 초상

착한 사람은 행복하고 악한 사람은 불행하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이치에도 어김없이 예외가 있다. 세상에는 악인의 평안도 있고 의인의 고통도 있다. 간혹 그 정도가 매우 가혹한 경우마저 없지 않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하늘도 무심하다”는 탄식을 토하며 심적인 혼란에 휩싸이곤 한다.

2000여년 전에 이런 혼란을 극단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BC 145?~86?)이다. 그의 평온한 일상은 어느날 송두리째 뿌리 뽑힌다. 그는 흉노(匈奴) 토벌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이릉(李陵) 장군을 문죄하는 자리에 사관(史官)의 자격으로 참석한다. 무제는 이미 이릉을 단죄하기로 작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객관적 정황상 죄를 묻기 어렵다”고 곧이곧대로 소신을 피력한다. 무제는 격분하여 그에게 궁형(宮刑)을 내린다.

사마천은 ‘망가져 못 쓰게 된 몸’으로 부친의 유지(遺志)인 ‘사기’ 집필에 골몰한다. 그는 백이숙제(伯夷叔齊)를 ‘열전’의 첫 편으로 놓고, 자신의 이력과 심경이 담긴 자서(自序)를 마지막 편으로 삼는다. 서(序)는 본래 맨 앞에 놓고, 또한 본문과 구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서가 ‘열전’뿐만 아니라 ‘사기’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이므로 맨끝에 놓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러나 거기에 정식 편명을 부여하여 형식상 본문의 일부로 삼은 것은 다소 의아하다.

첫 편의 백이숙제도 단순히 시대 순에 따른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잘 알다시피백이숙제에 대한 공자의 논평은 유명하다. “인(仁)을 구해 인을 얻었는데 무슨 원망이 있으랴?”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평가에 감히 의문을 표한다. 백이숙제 같은 의인은 고사리나 캐먹다 굶어 죽었다. 반면, 도척(盜跖) 같은 악인은 매일 사람을 죽이며 횡포를 부렸지만 평안 속에 천수를 누렸다.

그는 “이런 것이 천도(天道)라면 과연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라고 반문한다. 여기서 백이숙제를 첫 편으로 놓은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이 물음은 또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자서가 마지막 편이 된 이유이다. 이처럼 백이숙제 편과 자서는 시작과 마무리로 서로 호응하며, ‘열전’이 어떤 고뇌를 담고 있는지 암시하고 있다.

그의 고난은 그의 시선을 심오하게 만든다. 잘난 삶이든 못난 삶이든 그의 눈에 귀하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다. ‘사기’는 크게 보아 제왕을 다룬 ‘본기’, 제후를 다룬 ‘세가’, 그보다 ‘못난’ 사람들을 다룬 ‘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2000여년 동안 가장 사랑받은 것은 ‘본기’도 ‘세가’도 아니다. 바로 ‘열전’이다. 만약 그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못난’ 사람들이 이렇게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백이숙제나 사마천은 우리를 ‘의인의 고통’이라는 혼란에 빠뜨린다. 이 난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서양의 문헌이 바로 ‘욥기’이다. 이것은 테렌스 맬릭 감독의 ‘더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의 모티브로도 유명하다. 성서 중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유일한 예외가 바로 ‘욥기’이다. 이것은 중근동의 이민족 현자(賢者)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약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이유가 있다.

‘욥기’는 마치 한 편의 웅장한 서사극을 연상시킨다. 어느날 ‘의인’ 욥은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잃고 온몸이 종기투성이가 된다. 그의 친구들이 위로차 찾아오지만, 이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만다. 친구들은 “네가 죄를 져서 벌을 받았다”고 윽박지르고, 욥은 “그럴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친구들의 단죄(斷罪)와 욥의 반론이 장황하게 전개된다.

사실 모두(冒頭)에 그가 고통을 받게 된 까닭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흠 없는 의인이다. 그럼에도 악마는 그가 복을 노리고 신실한 것이라고 고발한다. 복은 믿음의 결과이지, 결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복(祈福)은 종교적으로 매우 심각한 죄악이다. 이로 인해 그는 재산, 가족, 건강 등 모든 복을 박탈당한 채, 믿음의 순수성을 시험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천상에서 결정된 일이다. 지상의 인간들은 알 길이 없다.

친구들과 욥의 설전이 끝나자,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천상의 절대자가 등장한다. 그는 욥이 고통받게 된 까닭을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아니, 말해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되풀이해서 강조할 뿐이다. 억울함을 토로하던 욥은 정작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조아린다. 그와의 관계만 회복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하찮다고 여긴다. 이를 통해 그가 바란 것이 복이 아니라 믿음임을 인정받고 재산, 가족, 건강 등을 더 크게 돌려받는다.

반면, 욥의 친구들은 “옳지 못하다”고 크게 책망을 듣는다.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이 왜 잘못된 것일까? 욥의 고통은 하늘의 뜻이었지, 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처럼 욥과 같은 의인도 얼마든지 고통과 불행을 겪을 수 있다. 다만, 거기에는 각별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인과응보론은 의인의 고통을 외면하여, 그 의미를 탐색하려는 노력을 아예 차단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 책망받은 이유이다.

사마천과 욥은 도무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시공(時空)은 아득히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 준다. 사마천은 자신에게 닥친 혹독한 고통을 ‘사기’를 완성하라는 천명으로 받아들인다. 욥도 모진 고난을 겪지만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하늘에 더욱 간절하게 매달리고 의지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결실을 얻는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의인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는 세상을 아예 고해(苦海)라고 규정한다.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관건이다. 고통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고통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고통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심지어 추구할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인류 위에 내려진 저주였다.”

고통의 의미는 없다며 단념하고 주저앉느냐? 어렵더라도 그 의미를 탐색하며 일어서느냐? 이것은 결단의 문제이다. 그 과정도 결코 단순할 리 없다. 아마 단념과 탐색이 뒤엉킨 복잡한 형태일 것이다.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 이것이 ‘사기’와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차가운 교훈이자, 또한 뜨거운 격려이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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