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무엇이든 먹을 수나 있을까를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요즘같이 맛있는 음식 만들기 열풍이 가끔은 낯설 때도 있다. 배고픔이 가장 큰 서러움이었던 시절을 가슴 저리게 생각나게 했던 몇 해 전 일이 떠오른다.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혼자가 편하다며 가까운 곳에 사는 어머니께 음식을 조금 갖다 드리게 되었다. 항상 집사람과 같이 가곤 했는데 그날따라 혼자 가게 돼서 모처럼 어머니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늘 하는 인사로 시작했다. 집이 춥지 않으세요. 난방은 잘 들어오고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고요.

그러다 무심코 물었다. 쌀은 떨어지기 전에 늘 사다 놓으시죠. 응, 20㎏짜리 사다 놔. 무거울 텐데 10㎏짜리 사다 드시지 그러세요. 그것도 한참 드실 텐데. 쌀독에다 부으려면 힘드시잖아요.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하셨다. 10㎏짜리 사다 부으면 쌀독이 반도 안 차. 쌀독이 비어 있으면 너희 어렸을 때 힘들었던 생각이 나서 싫어. 그래서 항상 20㎏짜리 사다 쌀독이 가득 차게끔 부어 놔. 그러다 쌀독이 한 반쯤 비면 다시 사다 채워놓고. 나는 어머니의 대답에 그냥 무너져 내렸다.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더 나누다 나왔지만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 안에서 한참을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 힘든 시절의 어머니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뒤 어버이날을 앞두고 마침 정기적으로 쓰던 칼럼 차례가 돌아와 이런 내용을 글에 담았다. 며칠이 지난 어버이주간 주말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같이 하게 됐다. 내가 쓴 글을 조카가 읽어드렸는데 어머니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일화였다.

동연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저녁 칼국수를 끓였어. 쌀이 떨어져 밀가루를 밀어 국수를 끓였지. 그런데 한밤중에 동연이가 공부하다 나와서 배가 고프다면서 아까 먹다 남은 국수 좀 없냐고 하는 것이야. 남은 게 없었어. 사실은 양이 충분하지 않아 너희들에게는 국수를 주고 할머니와 나는 국물로 배를 채웠거든. 없다고 하니까 동연이가 방으로 들어가면서, “보리밥이라도 좋으니 배부르게 한번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혼잣말하는 것이야. 그날 한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다시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서른둘에 혼자되시고는 열한 살 장남인 나부터 네 살 막내까지 자식 넷을 홀로 기르셨다. 도망치듯이 가서 살았던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마저 철거되고 나서는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 한동안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세끼를 온전히 챙겨 먹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외상 달고 됫박으로 샀던 쌀. 많이 못 들이고 몇 장씩 사다 쓰던 연탄. 유난히도 추웠던 여러 해의 겨울들. 끼니로 자주 먹던 국물 많던 칼국수와 수제비. 어머니는 채석장에서 무거운 돌을 나르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캐서 길에서 좌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철인(鐵人) 같아서 나와 동생들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칼국수나 수제비는 쌀이 떨어졌을 때 먹는 구휼식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나는 칼국수나 수제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칼국수를 만드는 것을 옆에서 자주 봤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줄 알면서도 그랬다.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하면서 약간의 콩가루를, 아주 적은 양의 소금물과 함께 넣었다. 콩가루를 많이 넣으면 반죽이 뻣뻣해지기 때문에 적은 양을 넣어 부드러운 맛이 나게 했다. 반죽하면서 손으로 계속해서 조물조물거리는 것을 어머니는 ‘치댄다’고 표현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이 말을 쓰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는 동그란 나무판에 반죽을 올려놓고 홍두깨로 반복해서 아주 얇아질 때까지 밀었다. 밀면서 밀가루를 조금씩 뿌리는데 달라붙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내 고향은 충북 음성이고 어머니의 친정은 바로 인접한 진천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충청도식 칼국수였다.

국물은 그냥 맹물에 간장을 조금 넣어 끓였다. 형편이 조금 나아진 뒤에는 멸치나 닭 국물을 우러나게 해서 썼다. 보통은 호박을 썰어 넣었지만 호박이 귀한 겨울에는 김치를 넣어 끓였다. 조금 살 만한 뒤에 매운 풋고추와 마늘, 파, 깨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장을 만들어 국수에 넣었다. 가끔은 국물에 된장을 넣어 끓이기도 했는데 이것을 어머니는 원주식이라고 하셨다.

열일곱 나이로 상업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언제부터인지 칼국수와 수제비를 밥보다 더 좋아하게 됐다. 길을 가다가 ‘손칼국수’란 간판만 봐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힘든 시절 숱하게 먹었던 그 음식 속에 들어 있던 어머니의 고생과 정성이 무의식중에 되새김질돼서일까. 김소운 선생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에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옆에 남긴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란 쪽지와 같은 여운이 내 마음에 남아 있어서일까. 살며 얻은 내 인생 작은 성취의 모든 뒤안길에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희생을 상기시켜 주는 소울푸드이기 때문일까.

음식의 맛을 넘어 추억이 주는 ‘맛’이 분명 있음이리라. 지금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부르는 그 힘든 시절의 추억.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주는 맛.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일류 식당에서 먹는 어떤 음식보다도 허름한 칼국수집에서 먹는 이 밀가루 음식이 더 정겹다. 콩가루를 조금 넣고 손으로 밀어 만든 충청도식이라면 더욱 좋지만, 흔히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있는 칼국수나 수제비여도 무방하다.

지난 설 어머니에게 그 어렵던 시절 해주셨던 칼국수 조리법에 대해 여쭤봤다. 어머니는 당신이 해주는 칼국수가 먹고 싶어 레시피를 물어본다고 생각하시고는 “내가 국수 밀어 보낼 테니 어미에게 끓여달라고 해라” 하면서 벌써 신이 나셨다. 아,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찾는 것만으로도 효도가 되는 것을. 팔순 넘은 어머니가 언제까지고 칼국수 밀 기운이 있으시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드렸다.

김동연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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