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홍길동’에서 길동 역을 맡은 이제훈(왼쪽 사진), ‘신 스틸러’로 활약한 말순이(왼쪽)와 동이.
‘탐정 홍길동’에서 길동 역을 맡은 이제훈(왼쪽 사진), ‘신 스틸러’로 활약한 말순이(왼쪽)와 동이.

열두 명의 어벤저스 군단이 돌아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는 토르와 헐크를 제외한 마블코믹스의 모든 히어로가 등장한다. 액션의 스케일은 웅장하고, 싸움의 이유 또한 명료해 할리우드 히어로물의 교과서를 보는 느낌이다. 이에 맞서는 한국 고전 히어로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는 단 한 명의 히어로가 등장한다. 알다시피 홍길동이다. 그는 ‘호부호형 트라우마’에 갇혀 ‘다크 히어로(어두운 성격의 영웅)’이 됐다. 미국 대표 히어로즈와 한국 고전 히어로가 맞붙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지만 다윗의 돌팔매도 꽤 매섭다. 할리우드처럼 물량공세를 펼 수 없다면 가장 ‘한국적인 한 방’으로 붙어 보자는 게 감독의 전략이다.

5월 18일 현재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시빌 워’)의 관객 수는 828만명이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은 123만을 돌파했다. 개봉은 ‘시빌 워’가 일주일 빨랐다.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는 한국 영화의 보릿고개, 4월에 찾아온 어벤저스 군단은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았다. ‘탐정 홍길동’은 2012년 ‘늑대소년’으로 700만 관객을 동원한 조성희 감독의 신작이다. 그는 이미 전작 ‘남매의 집’ ‘짐승의 끝’ 등에서 ‘사실과 동떨어진 초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판타지영화 ‘늑대소년’이다. 신작인 ‘탐정 홍길동’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그의 표현대로 영화는 “냉정하게 보면 말이 안 되는, 현실성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관객이 그의 영화에 반응하는 이유는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은 초현실적 세계는 현실적인 마을공동체 위에 있다. 마을에 사는 소녀의 이름은 순이(‘늑대소년’)이거나 말순이(‘탐정 홍길동’)다. 실제로 ‘늑대소년’의 철수(송중기 분)는 1950~1960년대에 발생해 방치된 숱한 전쟁고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주민들은 이 반인반수의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고 보듬는다.

‘탐정 홍길동’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늑대소년’보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개발과 성장에 대한 신화와 공산주의의 위협, 종교집단의 광신적 믿음이 뒤섞인 혼란의 시대다. 종교집단의 교주의 아들로 자란 길동은 그 집단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그를 보듬어주는 것 역시, 필부필부가 사는 마을공동체다.

‘시빌 워’에는 열두 명의 어벤저스 군단이 출연한다.
‘시빌 워’에는 열두 명의 어벤저스 군단이 출연한다.

할리우드 히어로 vs 한국 히어로

할리우드 히어로에게 마을공동체는 그가 구해야 할 대상이다. 초인적 힘을 가진 이들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구원을 요청하고 히어로들은 온몸으로 응답한다.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다. 이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어벤저스 군단이 출동하면 그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전작의 배경이 된) 뉴욕이 그랬고, 워싱턴 DC가 그랬으며, 소코비아도 아수라장이 됐다. 정의의 이름으로 죽어간 숱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초인등록제’를 통해 “어벤저스 군단 역시 UN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아이언맨 그룹과 “누군가의 관리를 받게 되면 정의에 제한이 생긴다”고 말하는 캡틴 아메리카 그룹이 나뉜다. 전작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에서 자신이 만든 울트론이 세상을 위협하는 괴물을 되는 걸 본 아이언맨은 어벤저스에게도 ‘외부 세력의 견제’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한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2014) 편에서 자신의 상부조직인 쉴드가 어둠의 히드라에게 잠식돼 악의 축이 되는 걸 본 캡틴 아메리카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이번 시리즈의 제목이 ‘시빌 워’, 즉 ‘내전(內戰)’인 이유다. 어벤저스는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인해 위기를 겪는다. “강해지면 착할 수 없고, 착하면 강할 수 없다”는 초인의 딜레마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홍길동은 애초에 강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조성희 감독은 홍길동을 떠올리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의 배우 이제훈을 캐스팅했다. 그에게는 마을을 구하고자 하는 거창한 사명감 따위는 없다. 오직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광은회’에 대한 사적 복수심이 그를 움직인다. 마을의 꼬마 말순이는 이 복수를 이루기 위해 납치된 인질일 뿐이다.(이 말순이가 스칼렛 요한슨 부럽지 않은 조성희 감독의 한 방이다.) 이렇게 숨어든 마을에서 그는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다. 중국집 주인은 짜장면밖에 먹지 못하는 말순과 길동에게 탕수육 그릇을 슬그머니 내민다. 이들의 임시 숙소인 여관의 주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락한 피신처와 푹신한 침구를 제공한다. 길동이 광은회로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진 이유는 이 순박한 이들과 정분이 쌓였기 때문이다. ‘구해야 하는’ 정의감이 아니라 ‘구하고 싶은’ 정(情)이 쌓였을 때 길동은 변하기 시작한다. ‘시빌 워’에서 이름도 사연도 모른 채 살거나 죽었던 대중이 ‘탐정 홍길동’에서는 저마다의 사연과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길동을 영웅으로 만든다.

어벤저스는 ‘세계경찰국가’로 살아온 미국 스스로의 거울처럼 보인다. 그들이 고군분투한 결과 악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그들이 강해진 만큼 상대도 강해졌는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세계는 과연 이전보다 더 좋아졌는가. 히어로 영화의 망원경 버전이 ‘시빌 워’라면, ‘탐정 홍길동’은 현미경 버전이다. 홍길동은 이제 막 영웅으로서의 자각이 깨어난 신생 히어로다. 조성희 감독과 주연배우 이제훈은 ‘탐정 홍길동’을 ‘어벤저스’ 부럽지 않은 하나의 시리즈물로 성장시키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잘 자란 히어로물이 나올 수 있을까. 흥미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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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톱클래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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