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

우리는 흔히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인 추구도 부도덕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국가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살상(殺傷)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된다. 비단 가족이나 국가뿐만 아니다. 조직과 개인 사이의 도덕적 괴리는 어디에서나 흔한 일이다.

이 난제에 아주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 고전이 있다. 바로 라인홀드 니버(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이다. 이 책이 나온 20세기 전반(前半)은 전쟁과 혁명과 대공황의 시대였다. 당시의 정치는 폭력과 이데올로기로 얼룩졌다. 그로 인해 19세기의 유산인 ‘이성의 시대’는 산산조각 났다.

이런 시기에 니버는 개신교 목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종교는 주로 개인의 내면을 중시한다. 그러나 그는 목회(牧會) 현장에서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을 목격하며 차츰 사회문제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 책의 논쟁적 제목에 잘 드러나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바꾸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접근은 종교적 또는 세속적 도덕주의나 합리주의이다. 그들은 사회적 갈등과 불의의 원인을 개인의 이기심이나 무지에서 찾는다. 따라서 교화나 교육을 통해 개인을 바꾸면 사회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버는 사회문제를 이렇게 개인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입장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에게 사회는 단순히 개인의 합(合)이나 연장이 아니다. 사회는 그것만의 독자적 특성을 갖는다.

그에 의하면, 개인은 타인의 이익을 이해하고 종종 그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줄 안다. 그런 면에서 ‘도덕적’이다. 그래서 개인은 도덕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 반면 집단은 충동을 통제하는 이성, 자기초월의 능력, 타인의 필요를 이해하는 능력 등이 개인보다 현저하게 미약하다. 대부분 집단이기주의(collective egoism)에 매몰되고 만다. 결국 집단을 도덕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사회는 도덕이 지배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 아니라, 이권과 이권이 충돌하는 곳이다. 그는 여기서 분출되는 갈등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강제력(coerc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강제력에 대해 별도로 구체적인 설명이나 정의(定義)는 없다. 그것은 의사에 반(反)해 강요하고 처벌할 수 있는 물리력, 제도, 기구 등을 망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강제력 자체를 어디까지나 도구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본다. 심지어 ‘폭력’이라는 강제력도 마찬가지다. 그는 좀더 높은 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폭력이나 혁명도 얼마든지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의 생각이 여기서 멈춘다면, 그는 여느 급진 사상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폭력이 병원(病源)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처럼 제한적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급진세력이 폭력의 속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를 비롯한 급진세력은 혁명과정에서 사회를 현실주의적(realistic)으로 이해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혁명이 일단 성공하고 나면, 그들은 마치 유토피아가 완성된 것처럼 별안간 낭만적으로 돌변한다. 이로 인해 그 도구적 성격이 망각된 채 폭력이 무절제하게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의 경고이다. 공산주의는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다 몰락한 것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초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초판

그는 현실에서 유토피아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지속적인 투쟁상태에 있고, 그래서 강제력 역시 언제나 도구로써 불가피하다. 이런 현실은 자칫 강제력을 만능으로 여기려는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 현실주의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정치공학적 접근방식에도 분명히 반대한다. 그것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을 일으킬 뿐이다.

그에게 정치는 양심과 권리가 만나는 영역이다. 달리 말해, 정치는 윤리적 요인과 강제적 요인이 상호침투하여 잠정적인 균형을 이루는 영역이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는 도덕주의자와 정치적 현실주의자의 통찰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다.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사상적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회윤리학자나 정치학자 이전에 목회자요, 신학자이다. 어떤 종교든 나름대로 종말론(終末論)을 가지고 있다. 종말이란 현세가 끝나고 도래할 ‘완성된’ 새 세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인간의 노력만으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 참회 등 절대가치를 붙들고 종말로 향하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를 통해 완성은 아닐지라도 되도록 그것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사회에서도 종말을 소망하는 도덕적 열정(pass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현실의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할 용기를 준다. 그는 종교적 바탕에 근거한 그런 도덕적 열정을 ‘숭고한 광기(sublime madness)’라고도 표현한다. 그는 “이런 광기를 갖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사악한 권력 또는 정신적 사악에 대항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상사회에 대한 열정, 아니 광기를 가지고 집요하게 그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강제력이 사라지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회는 결코 실현되기 어렵다. 그 대신, 이런 노력을 통해 강제적 요소가 합리적 또는 도덕적 요소로 충분히 제어되는 사회는 기대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적 목표이다. 이런 전망이 바로 그의 ‘도덕적 현실주의’의 골격인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한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운동권 서적인 양 오독(誤讀)된 적도 있다. 전체를 놓치고 지엽말단에 집착한 탓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이렇게 오독된 책이 부지기수이다. 그 시대의 빛바랜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도덕적 괴리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격정적으로 토로한 걸작이다. 오바마를 비롯해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앞다퉈 니버가 자신의 사상적 스승이라고 말한다. 스승은 정치적 제자들에게 묻는다. “숭고한 광기로 무장했는가?” 정치야말로 아무나 섣불리 덤벼들 업(業)이 결코 아닌 듯하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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