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요미우리신문의 온라인 논문형 기사인 ‘후카요미 찬네루’, 뉴욕타임스의 온라인 취재기인 ‘타임스 인사이더’, 아사히신문의 온라인 유료 정보지인 ‘WEB신서’.
왼쪽부터 요미우리신문의 온라인 논문형 기사인 ‘후카요미 찬네루’, 뉴욕타임스의 온라인 취재기인 ‘타임스 인사이더’, 아사히신문의 온라인 유료 정보지인 ‘WEB신서’.

“서부의 LA타임스(LAT)는 잠자는 사자와 같은 존재다. 수십억달러 가치를 지닌 브랜드다. 동부의 뉴욕타임스(NYT)에 필적할 수 있다.”

올해 2월 LA타임스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마이클 페로(Michael Ferro)가 취임 직후 던진 말이다. 이 말과 함께 미국 미디어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전 세계 LA타임스 해외 지국 확대 방안이다. 신문의 쇠퇴는 인터넷 등장과 함께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온라인 뉴스에다 공짜 비디오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신문사의 해외 지국 감축도 당연시된다. 아날로그 해외 지국을 만드는 것보다 인터넷 정보체계 구축이 우선시된다. 그러나 135년 역사를 자랑하는 LA타임스는 마이클 페로 취임과 함께 역주행 방침을 천명했다. 왜일까? 이유는 새로 지국이 만들어질 7개 도시, 즉 홍콩·멕시코시티·라고스(나이지리아)·모스크바·리우데자네이루·뭄바이·서울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미디어 전문가들은 이들 7개 신설 지국이 들어설 도시의 공통점을 ‘오락지향(entertainment oriented)’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 관광을 하면서 음식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미국인을 위한 오락도시라는 점이 LA타임스 신설 해외 지국의 공통분모라는 것이다. 신문사의 기존 해외 지국은 정치·경제 지향이었다. 21세기 들어 아시아 외신기자들의 총본부가 도쿄(東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겨간 것은 좋은 예다.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중국이 일본을 압도하면서 나타난 일종의 ‘파워 이동’이다. 하지만 LA타임스는 그 같은 기존 관점이 아닌, 문화에 기초한 오락이란 새로운 관점에서 해외 지국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류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서울 같은 도시야말로 미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한 환경과 조건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7개 지국이 신설될 경우 특파원의 주된 업무가 무엇이 될지는 분명하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과 관련된 문화 콘텐츠를 찾아내 기사화하는 것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LA타임스가 7개 해외 지국 신설하는 이유

주목할 점은 LA타임스 신임 회장 페로가 7개 해외 지국 신설을 취임 첫 작품으로 내세운 이유다. 표면적으로는 오락기사 확장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고 이런 기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 창출이 가장 큰 배경이었다. 현지 기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서울이나 라고스로 날아가는 항공사의 광고가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7개국의 음악이나 음식에 관한 국가적 차원의 홍보물도 LA타임스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봤다. 소프트파워가 현 글로벌 시대의 대세다. 70대로 들어선 베이비붐 세대의 시선을 끌 만한 고가(高價)의 문화이벤트나 그룹투어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LA타임스는 95만명의 독자(일요일 기준)를 자랑한다. 미국에서 구독률 4위를 기록 중인 서부 미디어계의 얼굴이다. 그 같은 역사와 전통의 신문이 던진 2016년 승부수의 핵심이 바로 ‘열심히 놀게 해주는’ 해외 지국 개척이다.

엔터테인먼트가 신문사 수익 창출의 근간이 된 것은 미국 미디어계의 일반적 현상이다. 미국 신문의 간판인 뉴욕타임스도 마찬가지다.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다. 20세기의 모순과 상처를 지우려는 오바마의 노력은 최근 베트남과 일본 히로시마 방문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그 같은 ‘오바마 레거시’를 찬미하고 확산시키는 리버럴 미디어의 선두에 서 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콘텐츠가 정치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뉴욕타임스 웹사이트 내 ‘타임 여행(www.nytimes.com/times-journeys/)’은 대표적인 본보기다. 뉴욕타임스는 쿠바 여행에 관한 규제가 풀리는 순간 가장 먼저 관광 비즈니스에 뛰어든 ‘업체’다. 크루저와 현지 요트 여행으로 이뤄지는 11박 문화 투어 상품을 선보였다. 가격은 1인당 무려 1만1000달러대에 달한다. 시니어 관광객을 배려한 고급투어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격이 비싼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쿠바에 관해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특별 가이드’가 붙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쿠바 특파원이나 쿠바 전문 기자가 동행하는 여행이다. 워터게이트사건 전모를 밝힌 워싱턴포스트(WP)의 밥 우드워드 기자가 백악관 투어 가이드로 나서는 식이다. 놀고 즐기는 여행만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문화체험으로 뉴욕타임스가 제안한 것이 쿠바 여행이다. 뉴욕타임스 ‘타임 여행’에 소개된 상품들을 보면, 부탄·카슈미르·미얀마·실크로드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특별 가이드 참가’라는 조건을 내걸고 소개돼 있다. 이미 음식배달업에 진출한 곳이 뉴욕타임스이지만, 이번에 베트남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즐긴 분짜 요리를 내건 하노이 음식 투어 프로그램을 선보일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오락·여행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에 주력하는 뉴욕타임스와 LA타임스의 ‘특별한 변신’과 관련해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수익 창출에 혈안이 된 다른 미디어들도 비슷한 비즈니스에 속속 뛰어드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차별화·특별화할 수 있을까? 현지 특파원 출신 관광가이드가 고가의 여행에 걸맞은 부가가치의 전부일까? 답은 글머리에 밝힌 페로 회장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수십억달러 가치의 브랜드’가 하루 1000달러 여행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가장 큰 동인이다. 브랜드는 가방이나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급 가죽에다 정성을 들인 수제품이라 해도, 최하 1000만원에서 시작되는 그레이스 켈리 에르메스 가방을 따라갈 수 없다. 디자인이 좋고 제품이 질기다는 것이 관건이 아니다. 수백 년 역사를 가진 브랜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격과 가치가 10배, 100배로 뛴다.

뉴욕타임스와 LA타임스는 글로벌 신문업계의 에르메스나 루이비통 어디쯤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거의 책처럼 느껴지는 일요일자 뉴욕타임스를 대하면 마치 전 세계의 지식과 지혜가 손안에 들어온 듯하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뉴욕타임스에 버금가는 편집 수준이나 아름다운 활자체를 본 적도 없다. 바로 세상 대부분이 인정하는, 브랜드의 권위다.

역사나 전통이란 말은 브랜드의 권위를 설명할 때 언급되는 필수 단어다. 사실 역사나 전통은 아날로그에 기초한 과거형에 집착하는 개념들이다. 짧고 간단하며 알기 쉬운 기사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상식이자 가치다. 구체적 숫자로 화려하게 장식된 재테크 기사나, 수영복 차림의 여성 사진도 비디오 시대에 걸맞은 콘텐츠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그런 시류와 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일단 대부분의 기사가 길고도 깊다. 오피니언이나 사설만이 아니라, 구체적 정보를 전하는 기사조차도 길다. 심층기사가 기본이고 갖가지 분석에 활용되는 구체적 통계나 객관적 데이터가 무성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기간 동안 뉴욕타임스는 하루 평균 2만자가 넘는 장문의 글들을 두 건씩 쏟아냈다. 한국 신문의 경우 대략 한 지면에 빽빽이 실린 기사의 글자 수가 1만자 내외다.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에 이어 방문한 일본 히로시마 관련 기사도 마찬가지다. 2만자가 넘어서는 기사를 하루 두 건씩 실었다. 짧고 간단하고 알기 쉽게 푸는 이미지 중심의 신문인 USA투데이도 있지만, 뉴욕타임스·LA타임스·워싱턴포스트 같은 권위 있는 브랜드 신문들은 반대로 한층 더 길고 깊게 나아간다.

고급 취재기 ‘타임스 인사이더’

브랜드 신문으로서 뉴욕타임스의 위상과 권위가 돋보이는 콘텐츠로 ‘타임스 인사이더(Times Insider)’만 한 것도 없다. ‘편집국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Welcome to the newsroom)’는 슬로건을 내건, 심층 정보 전문 유료 사이트다. 온라인·오프라인 구독자의 경우 한 달에 10달러를 더 내면 구독할 수 있다. 신문에 실린 기사의 막후 스토리(behind the scenes insights)가 주된 콘텐츠다. 웹으로만 볼 수 있는, 기자의 단상(斷想)이나 취재기를 담은 글이다. 5월 25일 ‘타임스 인사이더’ 톱 스토리는 뉴욕타임스를 대표하는 고정 코너인 부음(Obituaries)에 관한 글이다. 숨진 지 7년이 지난 인물을 뉴욕타임스 부음란에 ‘뒤늦게’ 실은 이유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2009년 3월,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도널드 던컨(Donald Duncan)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특수부대 그린베레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퇴역 후 반전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배우 제인 폰다, 가수 존 바에즈와 함께 활동한 평화주의자로, 70대 베이비붐 세대에 잘 알려져 있다. 이미 7년 전에 사망한 인물의 부음을 왜 지금에야 실었는지, 왜 많은 독자로부터 던컨 부음 스토리가 박수를 받았는지에 대한 얘기가 잔잔하게 실려 있다. 던컨은 70대 들어서면서 ‘홈리스 도우미’로 나선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가난한 사람을 돕던 중 갑자기 사망한다. 1960년대 말 반전 평화주의자로 활동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욕타임스 부음기자들이 뒤늦게 사망 사실을 알게 돼 기사화했다는 것이다. 전례가 없는, 사망 7년이 된 사람의 부음기사가 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물론 뉴욕타임스 기사가 나간 후 감동적인 부음으로 알려지며 다른 신문·방송도 다루게 된다. 고독하게 세상을 떠난 반전 평화주의자를 발굴해 미국 역사의 일부로 창조해낸 것이다. 기자가 쓰는 뒷얘기나 비사(秘史) 같은 것은 전 세계 저널리즘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타임스 인사이더가 가진 특징은 단순한 뒷얘기가 아니라, 감동을 동반한 취재기라는 점에 있을 듯하다.

요미우리의 ‘후카요미 찬네루’

최고급 브랜드로서의 저널리즘은 일본의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디지털 저널리즘=타블로이드 스타일의 싸구려 편집과 내용’이 보편적 상식이지만, 일본의 브랜드 신문은 반대로 나아간다. 뉴욕타임스의 ‘타임스 인사이더’에서 보듯, 길고 깊은 기사에 주목한다. 요미우리신문의 ‘후카요미 찬네루’(www.yomiuri.co.jp/fukayomi/)와 아사히신문의 ‘WEB신서’(www.asahi.com/webshinsho/)가 대표적인 예다. 이 역시 웹에서만 볼 수 있는 기사로 요미우리는 무료, 아사히는 유료로 제공한다. 요미우리의 후카요미는 각계 전문가가 기고한 장문의 논문형 기사다. 보통 기사 하나에 1만5000자를 넘어선다. 5월 25일자 후카요미의 주제를 보자. ‘일본은 이민자에게 좋은 직장을 제공하는 나라인가?’ 미쓰비시(三菱)종합연구소 선임연구원이 기고한 글로, 전부 읽는 데 15분 정도가 걸린다. 일본 내 이민자와 직장 현황에 관한 통계와 분석이 다른 나라와 비교돼 실려 있다. 일본 내 이민에 관한 객관적 정보와 분석이 모두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후카요미에는 1주일에 2~3개 정도의 새로운 콘텐츠가 실린다. 시의적절한 주제를 각계의 전문가가 기고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후카요미는 현재 요미우리가 주목하는 인터넷 뉴스의 핵심에 속한다. 요미우리 인터넷판 뉴스에 들어가보면 상층부에 10건 정도의 주요 뉴스가 나오는데, 후카요미 기사는 곧바로 뒤에 등장한다. 정치·경제·사회 관련 뉴스는 후카요미 뒤에 나온다. 짧은 스트레이트성 기사가 아니라, 장문의 논문형 심층기사가 요미우리의 주된 콘텐츠다.

아사히의 ‘WEB신서’는 온라인판으로 제공되는 유료 정보지다. 약 1만자 정도의 기사로 1회 다운로드 가격이 216엔이다. 시의적절한 주제를 통해 일본과 세계를 읽는 내용이다. 5월 16일 출간된 ‘WEB신서’는 미국인과 결혼한 오키나와 여성 스토리다. 미군기지를 대하는 입장이 미묘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오키나와 현지인의 감정으로 기술한 6300자에 달하는 소책자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과 오키나와 미군 기지 주변에서 발생해온 살인사건을 염두에 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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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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