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해밀턴’이 공연 중인 리처드 로저스 극장 전경.
뮤지컬 ‘해밀턴’이 공연 중인 리처드 로저스 극장 전경.

브로드웨이, 뉴욕을 뉴욕답게 하는 이름! 뉴욕이 만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이유는 뉴욕이 품고 있는 수많은 보석 때문이리라. 그 보석에는 타임스스퀘어도 있고, 센트럴파크도 있고, 월스트리트도 있다. 모두 저마다의 가치로 빛을 내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살아 있음을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브로드웨이만 한 게 있을까. 그런 면에서 대륙 맞은편의 할리우드와 같은 듯하면서 다른, 다른 듯하면서 같은 곳이 브로드웨이다.

브로드웨이는 맨해튼을 대각선으로 남과 북을 잇는 긴 길 이름이지만 우리가 이 이름을 부를 때 그 의미는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지칭한다. 타임스스퀘어 주변, 맨해튼 미드타운에 자리 잡고 있는 극장가들이 대부분 브로드웨이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는 이름에 비하면 그렇게 넓지 않다. 오히려 좁아서 붙은 이름이 브로드웨이인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도 좁았던 길이 이제는 보행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아예 두 개의 차선으로 줄어들어버렸다. 그러니 브로드(broad)하지 않은 브로드웨이에 실망하지 말라.

공식 집계에 따르면 브로드웨이에서 현재 뮤지컬, 연극, 스페셜 이벤트 등을 공연 중인 극장은 전부 40개이다. 이 40개의 극장이 연간 판매하는 공연 티켓 규모는 2015년 13억5400만달러였고, 총 관람자 수는 약 1300만명에 달하였다.

이 사람들이 공연 관람 외에 소비하는 외식, 주차, 선물 등 부대 매출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극장들을 통해 매년 새로 소개되는 뮤지컬만 해도 평균 40개 정도라고 하니 각 극장이 매년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 미제라블’ ‘라이언 킹’ ‘저지보이스’ ‘북 오브 모르몬’과 같은 장기 공연 작품들은 그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수작 중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

2015/2016 시즌, 브로드웨이를 달군 뮤지컬은 단연 ‘해밀턴’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원작자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로널드 체르나우이다. 토니(Tony)상 사상 가장 많은 16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었고,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그래미상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지금도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로널드 체르나우는 2011년 워싱턴의 일대기를 그린 ‘워싱턴: 한 인생’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실력 있는 작가이다.

사실 이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것이 아니고 오프 브로드웨이, 즉 변방에서 먼저 무대에 올려졌다. 맨해튼의 남쪽 끝, 뮤지컬의 본무대하고는 한참 떨어진 소호지역 무대인 ‘더 퍼블릭 극장’이 그곳이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대단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작품성 자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데, 바로 이 작품을 선택한 극장이 매년 센트럴파크에서 셰익스피어 작품 공연을 주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센트럴파크의 야외공연장인 델라코르테 극장은 매년 여름 ‘공원의 셰익스피어(Shakespeare in the Park)’라는 이름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료 공연한다. 무료라고 해서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알 파치노(2011), 앤 해서웨이(2009), 메릴 스트립(2008) 등이 출연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더 퍼블릭 극장’에서 ‘해밀턴’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 것은 그만큼 작품성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였지만 막상 무대에 올려진 후에 언론과 수많은 비평가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브로드웨이 메인 극장 중 하나인 ‘리처드 로저스 극장’이 마침내 이 작품을 브로드웨이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1925년에 문을 연 이 극장은 타임스스퀘어에서 서쪽으로 50m가량 떨어져 있으며, 브로드웨이 극장들 중 가장 많은 토니상 수상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안목이 탁월하다.

1804년 7월 11일 한여름의 이른 해가 이미 맨해튼섬 동쪽에 떠오를 무렵, 허드슨강을 사이에 두고 맨해튼과 마주 보는 오늘날의 위호켄, 그러니까 링컨터널의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 근처였을 것이다.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다른 한쪽은 허드슨의 푸른 강물이 흘러가는 그 숲속의 아침 이슬이 깨기도 전, 두 명이 목숨 건 결투를 위해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두 명은 시정잡배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현직 미국 부통령, 그리고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은 전직 미국 재무부 장관. 미국 정계의 두 핵심인물이 목숨을 건 결투를 위해 새벽에 조각배를 타고 맨해튼에서 위호켄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뉴욕주, 뉴저지주 모두 이런 결투는 불법이었지만 참관을 요청받은 사람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결투 현장의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묵계가 이뤄져 있었다.

전직 재무부 장관이자 페더럴리스트 당의 핵심인물인 해밀턴, 대통령이 될 뻔하다가 해밀턴의 방해공작으로 부통령이 된 애런 버(Aaron Burr)가 주인공이었다. 총을 먼저 뽑은 사람은 해밀턴. 그러나 그는 고의로 총알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이어서 터진 애런 버의 총성, 그의 총알은 해밀턴의 복부에 명중하였다. 이 결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해밀턴은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명성에 비하면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미국 초기 역사에 해밀턴만큼 많은 흔적을 남긴 건국의 아버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정도가 아닐까. 오늘날의 미국 곳곳에 그의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애런 버와의 결투에서 얻은 총상으로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수도 있었고, 그러면 미국의 역사는 어디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지하는 연방파(The Federalist Party)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의 반대편에는 각 주의 자율성과 중앙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토머스 제퍼슨이 있었고, 제퍼슨은 민주공화파를 이끌었다. 연방파는 해밀턴의 사망으로 그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반면, 제퍼슨의 정치적 유산은 미국 정계의 주류가 되었다.

약관 20세에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조지 워싱턴의 주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그는 미국이 독립한 이후 중앙정부의 역할과 이에 필요한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마침내 연방국가로 탄생하는 데 누구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강한 중앙정부를 강조하는 그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당이 앞서 말한 페더럴리스트 당이다. 미국 해안경비대(US Coastal Guard)를 창설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미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도 재임하면서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중앙은행 설립과 미국의 은행 시스템을 만든 사람도 해밀턴이다. 그가 오늘날 10달러짜리 지폐에 얼굴을 올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영광과 허무가 함께하는 해밀턴의 일생, 브로드웨이가 이런 인물을 놓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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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현 경기텍스타일센터 뉴욕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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