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기타줄 위에서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췄다. 리듬이 빨라지고 장단을 맞춘 사람들의 박수 소리도 빨라졌다. 손가락이 마지막 줄을 튕기자 함성이 터져나왔다.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었다. 기타줄의 울림이 관객의 심장으로 전해지고, 관객의 호응이 연주자를 춤추게 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연주자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멀리서 제 얼굴이 잘 찍히겠어요?”

무대를 벗어난 연주자가 갑자기 뒤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 앞으로 뛰어가 렌즈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장난스럽게 셀카를 함께 찍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연주는 계속된다.

“제 이름이 뭘까요?”

연주자가 종이를 펼치자 ‘정선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펼칠수록 종이가 커지면서 이름도 점점 커졌다. 흥이 오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정선호’라는 이름을 연호했다. 지난 5월 2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열린 기타리스트 정선호(33)의 공연은 에너지가 넘쳤다. 길거리 공연, 즉 버스킹의 매력이다.

그는 버스킹 1세대이다. 우리나라에 버스킹이라는 단어가 낯설던 2010년부터 기타를 메고 거리로 나섰다. 그는 지난해 국내 최고의 버스커를 뽑는 ‘2015 버스킹 라이징 스타’ 대회의 우승자다. 250여개 팀이 참가해 예선만 3개월을 치렀다. 버스킹의 성지로 꼽히는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그는 터줏대감 격이다. 이곳은 요즘 앳된 소녀들로 이뤄진 댄스 버스커들이 점령하고 있다. 뮤지션은 찾아보기 어렵고 댄스팀 공연이 요란한 틈새에서 그는 일정 없는 주말이면 이곳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거리에서는 행인을 관객으로 만드는 것도, 관객이 행인으로 돌아가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제 별명이 양반김입니다. 검정색 옷을 좋아하는데 공연하고 나면 땀 때문에 소금이 좍 뿌려집니다. 조금 있으면 왜 양반김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자, 그럼 또 두들겨 볼까요?”

그의 외침은 자신에게 거는 주문(呪文) 같았다. 지난 5월 23일 월요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역 근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의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고, 연주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심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는 공연 때와 똑같은 검정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옷장에 항상 10장은 있어요. 버리고 또 사고. 얼마 전에 ‘1+1’ 행사를 하기에 6장 샀어요. 땀을 하도 많이 흘려서 몇 번 못 입어요.” 검정 티셔츠가 몇 벌이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그의 전직(前職)은 직업군인이다. 5년 근무하고 중사로 전역했다. 기타를 너무나 치고 싶어서였다. 전역을 앞두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는 그때 작곡한 ‘군대를 나가면’이란 곡을 들으면 알 수 있다. ‘이 폭포를 지나’로 제목을 바꾼 곡은 요즘도 공연에서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주요곡으로 연주되고 있다.

지난 5월 21일 저녁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정선호씨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photo 황은순
지난 5월 21일 저녁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정선호씨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photo 황은순

인터넷에 올라온 그에 관련된 글에는 ‘기타 천재’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 있지만 그는 사실 천재도 아니고 기타에 미친 청소년기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21살 때 처음으로 기타를 잡았다.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순전히 노력이라는 이야기다. 기타를 두드리느라 손바닥에 혹처럼 튀어나온 뼈가 그 노력을 말해줬다. 그는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이다. 핑거스타일은 퍼커션(타악기의 총칭), 베이스, 멜로디를 한 번에 연주하는 주법(奏法)이다. 다른 기타 연주에 비해 기술이 많이 요구되는 만큼 소질보다 노력이 중요하다. 그는 대학 때 레크리에이션학과를 다녔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노래 동아리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목이 상할 지경이 됐다. 노래 대신 집어든 기타에 그야말로 미쳤다. ‘기타에 인생을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군대를 나와 핑거스타일 기타가 우리보다 앞서 있던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사람들 반응도 좋았고 하루 공연만 해도 10만~20만원을 벌 수 있었습니다. 기타로 먹고살 수 있겠다,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5개월 만에 돌아와 연습실 1년치 사용료를 선불로 냈습니다. 하루 12시간씩 연습했습니다. 1년을 3년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기타리스트로 서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제1회 ‘마틴기타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타면서였다. 줄기차게 반대하던 부모님도 이때부터 그의 지원군이 됐다. “기타가 밥벌이가 되겠냐면서 전역을 2년 동안 말리셨습니다. 한동안 저를 안 보셨죠. 본선에 진출하고 연락을 드렸는데 오셨더라고요. 대상을 발표한 순간 아버지가 제 손을 꼭 잡고 ‘해냈어’ 소리를 치시는데 소 울음소리 같았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큰소리로 외치는 걸 처음 봤습니다.”

그의 공연 장소와 일시는 페이스북(www.facebook.com/sunho.jung.5)을 통해서 공지한다. 그의 부모님은 공연 때면 찾아와 팁 박스에 5만원권을 슬며시 놓고 가기도 한다. 버스커들은 관객들이 박스에 놓고 가는 팁이 주 수입원이다. 올해 들어 그는 불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2~3년 전만 해도 팁 박스에 쌓인 돈이 쏠쏠했다고 한다.

“한번은 중년 아저씨가 슬리퍼를 끌고 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만원씩 넣는 겁니다. 도중에 사라져서 갔나 했더니 현금지급기서 돈을 뽑아온 겁니다. 18곡을 불렀는데 공연이 끝나자 찾아온 돈을 전부 던져 넣고 갔어요. 30만원은 됐던 것 같습니다.”

무대가 없어서 나섰던 거리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겨울에 얼어붙은 손으로 기타줄을 튕기다 부상을 겪기도 하는 등 힘든 시간을 견딘 덕분에 그는 유명해졌고 행사 섭외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봄, 가을 시즌 때는 한 달이면 20여건의 무대를 뛰어야 한다. 그만큼 고민도 많아졌다. “즐기는 연주가 아닌 생존을 위한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지금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더 유명해지고 싶지 않냐고요? 지금이면 충분합니다. 대신 실력을 키우고 싶습니다.”

그는 현재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 회사인 한 애플리케이션 회사에서 주최하는 ‘에어라이브 글로벌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있다. 6월 말까지 8개월 동안 온라인을 통해 진행되는 예선에서 그는 현재 1등을 달리고 있다. 본선은 총상금 10억원을 놓고 7월 LA에서 열린다. 이변이 없는 한 그는 본선에 참가한다. 지난 연말 ‘라이징 스타’ 우승 상금 1000만원으로 미국에서 버스킹을 하겠다는 약속도 이번 본선행을 계기로 실행에 옮길 계획이다. “기타는 무조건, 이유 없이 좋다”는 그는 “이번 대회에 죽을 힘을 다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3년 같은 1년으로 오늘까지 온 것처럼, 10년 같은 3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상금을 타면 진짜 미친 듯이 연습만 할 겁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세계 어디를 가서, 어떤 아티스트들과도 서로 마음에 드는 협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제 목표는 ‘정선호’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하.”

키워드

#컬처人
황은순 차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